"나는 인과론이 아니다"
자아가 자기를 신처럼 만들기 위해 이용하는 핵심적인 도구가 바로 서사(narrative)다. 서사를 시간순에 따라 배열된 이야기라고 보통 정의한다. 그러나 더 정확히는 인과론에 따라 배치된 이야기다.
시간을 인과론적으로 구조화해서 이야기하면 그것이 역사가 된다. 자아는 이 역사를 틀어쥐려고 한다. 역사를 지배하는 만큼 자기의 정당성이 확고해지고 자신이 더욱 높은 존재로 입지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자아는 역사를 신적인 것처럼 말한다. 거룩한 과거의 역사를 통해 자신이 만들어졌으며, 그 역사의 위대한 의지에 따라 이제 자신이 미래를 개척하는 중요한 소명을 떠맡은 것처럼 간주한다. 이른바 역사라고 하는 것은 자아에게는 예언서와도 같다. 자기만이 해독해서 사람들에게 예지를 제공할 수 있는 특수재다.
여기에는 하나의 전제가 존재하는데, 그것은 바로 역사가 마치 모범적인 설계도에 따라 시행착오를 거치면서도 결국에는 정합적인 모습으로 발전해갈 것이라는 낭만적인 생각이다. 즉, 역사의 전개에 있어 모종의 합리적인 설계자 및 운영자가 가정된다.
그러나 그러한 주체는 없다.
역사가 이 모든 것을 인과론적으로 아귀가 딱딱 맞아 떨어지게 기획하고 실행해온 어떤 주체에 의해 이루어진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완전한 착각이다.
그러한 주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주체가 있는 것처럼 스토리텔링을 한 것뿐이다.
나중에, 사건들이 펼쳐지고 난 나중에.
사실은 그저 누구도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한 채 그저 흐름에 떠밀리듯 움직여온 것뿐이다. 그 흐름이라는 것도 즉발적인 것이고 충동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이 마치 계획되어 있었던 것 마냥, 또는 흐름의 결과가 마치 가장 좋은 진보를 위해 예정되어 있었던 것 마냥, 자아는 재구성의 작업을 한다. 불확정적인 흐름을 마치 인과적 스토리인 것처럼 소설을 써낸다.
지진이 일어나서 건물이 다 무너지면 "새로운 공법으로 도시계획을 집행해야 했는데 철거비를 덜었네, 껄껄, 역시 역사란 참 오묘해. 역사는 언제나 진보적으로 움직이는군 그래."라고 말하는 식이다.
자아가 인과론적 이야기를 도구로 사용하는 이유는 이처럼 합리화를 위해서다. 상실도, 아픔도, 상처도, 그 어떤 티끌도 자기에게 남겨지는 것을 자아는 용납하지 않으려 한다. 자신은 표현 그대로 무오해야만 한다. 오류가 없어야만 한다. 하얀 나라 백조여야만 한다.
만약 자신이 더렵혀진다면 자아는 자기가 신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더 정확히는 신으로 유지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자아에게 있어 신이라고 하는 것은 항구성이기 때문이다. 변하지 않는 속성, 그것이 자아에게는 신성이다. 때문에 더렵혀진다는 것은 처음의 모습과는 달라진다는 것이며, 이는 자아에게 있어 신의 옥좌로부터의 추락을 의미한다.
어떠한 맥락에서는, 자아는 순수하다고 말할 수 있다.
원래 모든 거짓말쟁이는 순수한 법이다.
거짓말을 해서라도 자기의 순수함을 지키려고 해서 거짓말쟁이가 되는 까닭이다.
더렵혀질 요소가 많다는 것은 변화의 요소가 많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현대사회는 시시각각으로 찾아오는 변화의 사건들이 빠르게 연쇄되고 있는 장이다. 때문에 자아가 이러한 조건 속에서 자신의 신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아는 더욱 거짓말쟁이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결국 자아가 향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음모론이다.
인과론의 광적인 소비자들은 반드시 음모론에 빠지게 된다.
그럼으로써 이 모든 것을 뒤에서 다 조종하고 있는 거대한 힘의 주체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물론 그러한 것은 없다.
음모론적 거악은 인과론을 광신하는 이들이 만들어낸 허깨비다.
자기 뜻과는 다르게 자꾸만 변화에 노출되어 더렵혀지는 자기를 합리화하기 위해서는, 자기보다 더 강해서 자기를 강제적으로 더럽히는 세력을 상정해야만 하기 때문에 창조된 소설의 악역 캐릭터 같은 것이다.
동시에 이는 음모론적 거악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 자아의 자기투사물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자아 자신이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조종하는 주체가 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기에, 그 반대편에서 자아의 뜻과는 다르게 임의적으로 이 모든 것을 조종하는 가상의 주체를 투사해 배치시킨 것이다.
그 다음으로 자아는 이제 그 거악의 주체와 대립하는 구도를 설정한다. 그리고는 그것을 투쟁과 쟁취에 의한 역사의 발전과정이라고 부른다.
자기 혼자 다락방에서 거울을 보고 쉐도우복싱을 하면서 "더러운 자본주의자 놈들과 싸워 인류의 승리를 쟁취하리라!"를 부르짖고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것이 역사다.
자아의 영웅신화가 곧 역사다.
영웅신화는 인간이 신이 되는 이야기다. 이것을 인과론적으로 구성함으로써, 자아는 자기가 신이 되는 것이 필연적인 귀결인 것처럼 그 결말을 만들고 싶어한다.
유아적 전능감에 사로잡혀 싸이월드 일기장에 적을 법한 삼류 저질 스토리다.
그런데 싸이월드가 아니라 의무교육 교과서에 나온다.
고조선에서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를 지나 조선이 건국되고 이제 대한민국이 성립되기까지, 거기에는 마치 일관된 하나의 주체가 한치의 오차없는 정합적 방식으로 그 과정을 집행한 것 같은 묘사가 이루어진다. 가장 현명한 이들이 미래를 내다보고 그 모든 것을 만든 것처럼 기술된다.
"바로 후손인 너희들을 위해서 우리가 그 모든 일을 했단다."
인자하게 다들 공자를 닮은 영감탱이들이 다 이해한다는 눈빛으로 웃고 있다.
진실로 삼류 저질 스토리들이다.
자아는 이 삼류 저질 스토리를 너무나 사랑한다.
왜 그런가?
두렵기 때문이다.
인과론을 신봉하는 이는 두려운 이다.
두려운 이는 인과론적으로 모든 작용을 설명함으로써 세상이 마치 정합적인 컴퓨터 알고리즘인 것처럼 믿고 싶어한다. 그러면 이제 프로그램의 규칙만 숙지하는 한 두려울 것이 없어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모든 불확정적인 것이 다 예측가능한 통제범위 내에 있게 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위는 그 자체로 사기가 되는데, 그 이유는 이러하다.
모든 것이 통제가능하려면 예외가 없어야 한다. 자기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모두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따라서 인과론을 신봉하는 이는 자기만을 위한 세상의 지도를 작성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두에게 지당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전제하는 세상의 지도를 날조하게 되는 셈이다. 그렇게 날조해낸 지도로 이것이 진짜 지도라며 보급하고 또 판매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표현 그대로 사기라고 말할 수 있는 행위다.
음모론은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생산된다. 의도를 중심으로 표현하면 사기라고 말해지고, 결과를 중심으로 표현하면 음모론이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자아는 이처럼 인과론적 음모론을 통해 자기가 두려운 만큼 모두를 전부 두렵게 만들고 싶어하며, 동시에 자기가 헤매는 만큼 모두를 전부 헤매게 만들고 싶어하는 거짓말쟁이다. 자기에게 거짓말을 하기에, 필연적으로 타인에게도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이 자아다.
자아 자체가 인과론적 음모론의, 또는 음모론적 인과론의 결과물이기에 이는 필연적인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자아는 가상의 역사가 만들어낸 가상의 소재다. 이 자아라는 가상의 소재가 다시 가상의 역사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되물림은 이어진다.
어떠한 것이 인과론적인 논리체계로 설명이 된다고 그것이 사실인 것은 아니다. 그러한 발상은, 말만 되면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다고 믿는 망상과도 같다.
그러나 아무리 항구적으로 유지되는 말이 되더라도, 그 말한 주체는 죽는다. 말로 죽음을 봉쇄할 수는 없다. 내 작품 속에서 나는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다, 진실로 이렇게 믿는 이는 없다. 그 우렁찬 영웅적 포효는 단지 두렵기 때문에 목소리를 크게 내려는 발버둥에 불과하다.
자아는 대체 왜 이토록 두려워하는가?
자기가 언제라도 사라질 가상이라는 것을, 허구의 존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라고 하는 것을 견고한 사실적 소재로 믿으며 자아는 역사에 자기를 의존하려고 하나, 그 역사 자체도 가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라고 하는 인과론적 서사에 의존하면 할수록 자아는 실은 더 두려워진다. 서사에 자기를 의존해 굳건한 정체성을 성립시키고자 하는 자아의 운명은 그저 북풍 앞에 노출된 촛불의 운명에 불과하다.
"그 촛불들이 모이고 모여 함께 SNS로 연대한다면 그 어떤 북풍도 우리를 꺼트리지 못하리라!" 물론 자아는 그렇게 믿어도 좋다. 자기가 사라지게 될 죽음의 문제를 회피하고자 하는 자아의 원래 의도와는 다르게 그 믿음에 의해 더욱 빠르게 순교하게 된다 할지라도, 그 또한 그렇게 믿고자 한 자아 자신의 몫이다.
이와는 다르게 자아가 믿는 것을 믿지 않는 이들이 있다.
이러한 이들은 역설적으로 자아를 아주 신뢰하는 이들이다.
자아는 반드시 이상한 것을 믿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믿는 이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자아가 믿는 것은 일단 거르고 본다.
그 대신에 이들은 자아가 믿는 것의 반대편에 복종한다.
따뜻한 온돌방과, 전기난로와, 막 끓인 코코아와, 무릎 위에서 동그랗게 뭉쳐있는 고양이에게 복종한다.
북풍을 존중함으로써 북풍과 함께 지혜롭게 사는 방법을 터득한 인류에게 복종한다.
후손을 위해 쌓은 가상의 역사가 아니라, 동시간적 조건 속에서 그 자신을 위해 정성스럽게 응답해낸 그 인간의 삶에게 복종한다.
바로 나에게 복종한다.
자아가 복종해야 할 것은 바로 나다.
가상의 자아가 안식을 찾아 헤매던 견고한 사실적 소재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나는 역사적 주체가 아니라, 지금 이순간의 실존이다.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는 이유는 내가 있기 때문이다. 나만 있으면 삶은 어디에서든 가능하다. 깊은 바다 속에서도, 먼 우주 끝의 어느 행성에서도, 내가 있으면 삶은 흐른다. 가장 자유롭게 흘러서, 가장 자유로운 인간이라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때문에 역사라고 하는 것에 나는 결코 복종하지 않는다.
역사가 만든 자아라고 하는 것에 나는 결코 복종하지 않는다.
나는 인과론이 아니다.
과거에 생존했으니 미래에도 생존할 것이라는 작위의 믿음이 아니다.
나는 지금 이순간 살아있다.
모든 인간이 각자의 시공에서 펼쳐진 상황들 속에서 아름답게 나로서 응답해냄으로써 "나는 살아있다!"라고 느끼게 된 바로 그 방식으로, 그 동시적인 방식으로 나는 살아있다. 인과론적 역사가 아니라, 시공을 넘어 실시간으로 그렇게 인간은 지금 이순간 함께 살아있다.
진짜로 살아있기에, 나는 복종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