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는 복종하지 않는다 #7

"나에게는 성역이 없다"

by 깨닫는마음씨



과거의 누가 우리를 위해 살았고, 그러한 이 덕분에 우리가 있게 된 것이 아니다. 이것 또한 커다란 판타지다.


지금 이렇게 뻔뻔하게 말할 수 있는 자유조차도 그의 희생을 통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그렇다면 이렇게 다시 되물을 수 있다.


왜 더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데?


우리를 위해 살았다고 칭송되는 과거의 누군가를 말하려면, 직립보행을 시작해 손을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만든 유인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 유인원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지금 이렇게 키보드로 글을 쓸 수도 없을텐데.


이집토피테쿠스는 존경하는 조상님으로서 매년 제사를 올리며 공경하지 않고 왜 원숭이로 보는가?


네안데르탈인과 싸워 자유를 쟁취한 호모사피엔스는 민주주의의 선각자로 보지 않고 왜 미개한 원시인으로 보는가?


대체 우리를 위해 살았다는 '그'의 경계는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인가?


가장 정확하게 한다면, 우리는 최초의 단세포생물을 바로 우리를 위해 희생하며 살았던 거룩한 아담으로 모셔야 하는 것이 아닐까?


경계를 모호하게 한 채, 임의적으로 특정시간대와 특정세대와 특정집단을 신화화하려는 불순한 의도를 유포할 때, 그 반대편에서는 필연적으로 거부감이 생긴다. 사람들은 마치 남의 집 연예인잔치에 박수해주러 불려간 들러리 신세처럼 자신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유라는 것이 고작 한 개체 내지 한 집단의 행위에 전적으로 좌우될 정도로 그렇게 작고 미약한 소재던가?


그 누군가가 없었으면 우리가 자유를 누리지도 못했다는 말은 가장 공공연한 거짓말이며, 애초 성립되지도 않는 공허한 판타지다.


자유를 우습게 보고, 인간이라는 존재를 우습게 볼 때에만 나올 수 있는 말이다.


선민의식으로 가득한 이들이 그러한 말을 한다.


자기 및 자기와 동일시된 특정집단의 우수한 역량이 아니었으면 인간은 변변찮게 살았을 것이라는 전제를 내포하고 있기에 가능한 말이다.


이 선민의식을 유지하기 위해 설정되는 것이 성역이다.


고로 나는 이 모든 성역에 복종하지 않는다.


성역화하지 마라.


다른 것이 독재가 아니라, 성역화의 의도 자체가 바로 독재다.


그 자신을 향해 열심히 산 인간의 삶을 성역이라는 금줄 안에 넣고 박제로 만들어 신격화하지 마라.


삼류 저질 주술사회를 제발 민주주의라고 말하지 마라.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자유를 향해 뜨겁게 달려나간 인간에 대한 가장 큰 모독이다.


인간을 가장 모독하는 길은 인간을 신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것도 박제된 신으로 만드는 것이다.


박제된 신 앞에 인간모독자들이 모여들어 축제를 벌인다. 축배처럼 촛불을 높게 들어 인간의 자유를 위해 희생한 신의 업적을 기린다.


그렇게 인간을 신으로 만들어, 인간에게서 자유를 강탈한다.


인신공양된 유해를 나눠 먹듯이, 인간모독자들은 강탈한 자유를 나누어 가진 뒤 "이것이 그가 희생을 통해서라도 우리에게 주고자 했던 바로 그 자유다!"라고 외친다. 그의 심장을 들고 제사단 위에서 웅장하게 선포한다. 누구는 감동받아 까무러치고, 통곡하며, 광소하고, 기쁨으로 춤을 추며, 경배하고 또 경배한다.


그리고 나는 성큼성큼 걸어 들어간다.


나에게는 성역이 없다.


유해가 다 산산이 흩어진 채 심장으로만 남은 그라도 다시 찾기 위해, 금줄을 헤치며 들어간다.


그가 나고 자란 땅에 고이 묻을 것이다.


더는 누구도 나를 위해 희생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땅 위에 새길 것이다.


나는 희생을 먹고 살지 않는다.


나는 나를 위한 인간의 죽음을 양분으로 살지 않는다.


나는 신격화라는 이름의 인간모독이 펼쳐지는 이 성역의 활극에 절대로 복종하지 않는다.


네가 나를 위해 살았던 것이 아니다.


내가 너를 기억하기 위해 지금 있다.


성역으로부터 해방되어 이제 인간일 너를 위해, 나는 복종하지 않는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우리는 왜 사이비에 빠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