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받고 싶은 마음의 여정"
결론을 먼저 취하자면, 이해받고 싶은 마음이 사이비에 빠지게 된다.
이해받지 못한, 또는 이해받을 수 없다고 간주된 마음이 사이비에 빠지게 된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이 이해받지 못할까?
3년 전에 한 입만 먹고 그대로 냉동실 제일 구석에 적재해둔 민트초코 아이스크림과 같은 마음이 이해받지 못한다.
한번 조심스럽게 드러내보았는데 거절되었거나, 처음부터 감히 드러낼 생각조차 하지 못한, 그래서 충분히 드러날 수 없었던 마음이 이해받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마음은 보통 이렇게 평가된다.
'유치한 마음'
타인에게서나 자기 자신에게서 유치하다고 평가된 마음이 수치심 속에서 더욱더 동굴 구석으로 비집고 들어가 자신을 은폐한다. 그럼으로써 개방되는 일을 더욱 어렵게 한다. 이해받는 현실이 점점 더 요원해진다.
그래서 사이비는 결코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천재적이고 마법적인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사이비의 이야기가 놀라운 수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이야기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이비는 아주 유치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이비의 이야기는 사람들의 귀에 쏙쏙 스며들어온다. 바른생활 교과서처럼 아무 걸림없이 완벽하게 이해되는 진정한 진리처럼 새겨진다.
이러한 이유는, 사이비가 하는 이야기가 곧 사이비에 빠진 사람들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인 까닭이다. 즉, 사이비와 사이비에 빠지는 사람들의 상태 및 수준은 완벽하게 동일하다. 그래서 완벽하게 이해되는 것이다. 더 높은 수준에 있는 사이비가 더 낮은 수준에 있는 사람들을 가르치거나 인도하는 구도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변별점은 다른 곳에 있다.
자신의 마음이 유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 마음에서 비롯한 자신의 말에 당당하지 못할 때, 사이비는 똑같은 말을 우주의 당연한 진리라도 되는 것처럼 아주 자신감 넘치게 발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사이비를 마치 자신들의 세계관을 전적으로 긍정해주며 그 세계관이 정답이라고 증거해주는 거의 유일하게 탁월한 인물인 것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왜냐하면, 그동안 사람들 자신의 이야기는 유치하다고 판정되어 그 자신에게서나 타인에게서 소외되기만 해왔는데, 사이비는 오히려 그 이야기를 가장 성숙하고 진정한 진리로서 평가해주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가장 유치한 내 모습이 실은 진정한 영웅의 모습이었어!"
이러한 방식으로 기만은 시작된다.
유치함을, 유치함이 아닌 다른 것으로 변조하려는 기획은 사이비를 통해 가공의 정당성을 얻는다.
사이비는 사실 사람들보다 한 발 먼저 그 기획을 실현하려고 했던 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사이비의 모습을 보며 그러한 기획이 가능하다는 착각을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사이비는 사이비에 빠지는 사람들에게 있어 일종의 이상적 자아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 이상적 자아와 동일시되어 자기도 사이비의 모습과 똑같이 되려는 역동이, 곧 사이비에 빠지는 이들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사람들이 자기 자아를 수호하려고 하듯이, 사이비를 열렬하게 수호하게 되는 일은 당연하다. 사이비가 공격받는 일은 자신이 공격받는 일과 같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유치한 마음의 이야기는 결국 불가침의 성역에 자리잡아 신성한 진리가 되며, 끝없는 동어반복과 자기복제 속에서 확장되는 전체주의의 구심점이 된다.
사이비가 독재적인 형상으로 출현해 있을 때, 거기에는 반드시 대중독재도 필연적인 한쌍으로 자리하게 되는 그 이유다.
사이비와 사이비에 빠지는 이들은 분명 한쌍이다.
기생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다.
실제의 마음을 회피하고 자아의 영광을 드높이기 위해 서로를 남용하고 착취하는 기생공동체다.
자신의 마음을 소외시키면 외로워진다. 외로움이란 어떠한 마음이 소외된 그 결과다. 때문에 이 기생공동체를 외로운 이들이 모여 서로를 핥아주며 위로하는 자위공동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것이 자위인 이유는 기생공동체를 구성하는 어느 쪽의 입장이나 실은 동일한 자아이기 때문이다.
유치한 마음을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반드시 채택하게 되는 방향성이란 곧 자아의 영웅화다.
사이비는 이 자아의 영웅화를 시도하는 대표적인 세력이다.
특정한 영웅의 형상을 가진 거푸집에 마음을 밀어넣고, 동일한 모습으로 복제물을 양산해내는 과정이 곧 사이비의 주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세련되게는 이 작업을 모델링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모델링의 결과, 우리는 사실 더욱더 외로워진다.
우리가 자의로든 타의로든 유치한 마음이라고 판정하고 있었던, 그 결과 우리에게서 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그 마음은, 자기 외에 다른 어떤 것이 결코 되고 싶지 않았던 까닭이다.
자기 자신으로 이해받고 싶었을 뿐, 자신이 아닌 다른 좋은 것이 되어 이해받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유치한 것을 유치한 것으로 알리지 않고, 마치 유치한 것이 더 성숙하고 진정한 영웅인 것처럼 기만할 때, 그 의도는 언제나 사이비(似而非)가 된다. 표현 그대로다. 그럴 듯해 보여도, 본질적으로 완전히 아닌 것이다.
아이가 아이로서 사랑받지 못하는 세상일 때 사이비는 창궐한다.
아이에게 어른스러움을 과잉되게 요구하거나, 반대로 아이를 약한 유아처럼 과소하게 보려고 할 때, 사이비에 대한 면연력은 한없이 낮아진다.
유의미한 점은, 이 두 가지 현상은 동시에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제 너도 다 컸으니 니 일은 자립적으로 알아서 열심히 해야지."의 목소리와 "엄마가 숨겨놓은 초능력으로 우리 애기 다 지켜줄게."의 목소리는 언제나 한 주체에게서 동시에 들려온다.
바로 유치한 마음을 소외시킨 주체에게서 들려오게 되는 유치한 목소리다.
부모가 되었다고 자동으로 성숙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부모라는 역할을 자기의 유치함을 정당하게 소외시킬 수 있는 수단으로 삼는 한, 그 유치함은 더윽 커진 세력으로 번성하여 일그러진 형태로 작동하게 된다.
그 결과, 유치함이 유치함을 낳고 세상이 유치함으로만 가득하게 된다.
유치한 자아가 독재하는 세상이 된다.
그러면서도 이 자아는 자기가 유치하지 않다고 착각한다.
사이비란 원래 타인을 속이기 이전에 자기 자신을 가장 능숙하게 속이는 법인 까닭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모든 사이비의 목소리는 이렇게 갈무리될 수 있다.
"우리 아이들을 지켜야 합니다!"
아이들을 수호한다는 그 대의를 빌미로, 사이비와 사이비에 빠지는 이들은 자기의 유치함을 찬란하게 포장할 수 있는 각색의 기회를 얻는다. 사이비가 실제로 하고 있던 일은 바로 이 일이며, 사이비에 빠지는 이들이 사이비와 동일하게 되고자 하는 모습도 바로 이 모습이다.
이들은 분명 아이를 구하고 싶은 것이다.
자기의 아이가 아니라, 자기라고 하는 아이를.
그러나 그 사실이 망각되어 있다.
자신이 실은 유치하지 않고 영웅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이들의 신앙은 다시 말하자면, 자신이 실은 아이가 아니라 진정한 부모라고 믿고 싶어하는 그 신앙이다. 곧, 부모를 영웅상으로 삼는 신앙이다.
이 신앙은 자기를 영웅적 부모로 설정함으로써, 자기라고 하는 아이를 최대한 빨리 망각하려는 의도를 위해 전적으로 기능한다. 망각은 투사를 통해 일어난다. 자기라고 하는 아이의 형상을 자기의 아이에게 투사함으로써, 자기는 지금 제대로 아이를 구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정말로 구해야 할 것은 내팽개친 채, 다른 대상에게 과잉되거나 과소된 거푸집을 씌워 자기가 투사한 형상으로 그 대상을 임의적으로 주조하려고 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아이는 거듭해서 소외된다. 소외의 역사는 반복된다.
사이비는 가장 아이를 지킨다고 주장하면서, 실은 가장 아이를 소외시키는 현상이다.
그렇게 소외된 채 자란 아이들이 다시금 사이비를 찾게 되고, 그 사이비와 동일시되어 또 다시 아이를 소외시키는 부모가 되며, 그러한 그들의 아이들 또한 새로운 사이비의 잠정적 고객이 되게 하는 데 일조한다.
외로운 아이들이 아이로서 이해받지 못한 자신의 마음을 의탁하고자 사이비를 찾아 헤매게 된다.
"그래, 이해받지 못했던 너의 이야기를 이제 시작해봐! 네가 바로 주인공이야! 너의 이야기를 마음껏 펼쳐봐!"
이것이 아이가 이해받는 방식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사이비의 방식이다.
사람들 앞에서 코트를 풀어젖히는 바바리맨을 양산하는 방식이다.
엄마가 불러온 친구들 앞에서 꼬츄를 내밀고 열심히 코끼리춤을 춰서 관객들의 웃음을 얻는 이 노출증의 방식으로 대해졌기에 아이는 구석으로 숨게 된 것이다. 자신을 민트초코 같은 존재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더 정확히는 민트초코를 나쁜 것으로 간주하게 된 것이다. 민트초코가 강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이비가 그 앞에 나타나 "민트초코는 가장 깨달음이 높은 이들만이 먹는 영성식품입니다."라고 말해주니, 아이는 "그래, 이것이 진정한 나였어, 흑흑."이라며 이 모든 것을 굴절시키게 된다. 자신에게 강요되어서 싫었던 것을, 이제는 자발적으로 예찬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아이는 다만 이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어머, 공산당을 싫어하다니, 유치하네. 어디 보수꼰대들에게 세뇌되었구나. 사회주의란 게 사실은 굉장히 진보한 사상이고, 탁월한 지성인들은 모두 다 인류를 평등하게 만들어주는 그 아름다운 의의에 동의하는데, 너는 자기만 생각하고 아직 이기적이구나. 생각하는 게 그저 유치한 아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네."
그러나 하나의 절대적 진리로서 강요되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이라도 싫은 법이다.
우리는 언제 이해받고 싶어할까?
어떠한 것이 강요되어 있을 때, 그래서 우리가 실제로 느끼는 것을 그대로 느끼면 안 된다고 요구될 때, 우리는 이해받고 싶어진다.
강요되지 않을 자유가, 싫어할 자유가, 느끼는 그대로 느낄 자유가, 바로 마음의 자유가 자신에게 있어도 된다는 사실을 정말로 이해받고 싶어한다.
자유로운 마음은 유치한 마음의 원형이다.
자유로운 마음이 그 자유로움으로 드러나지 못했을 때, 유치한 마음이 된다. 그리고 유치한 마음조차 성숙함에 대한 강요로 소외되었을 때, 유치한 마음은 결국 유치한 언행이 된다.
이 일련의 과정을 사이비라고 부른다.
그래서 사이비는 정말로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한 좌절과 패배의 역사다. 아무리 영웅흉내를 내며 유치찬란한 원색들을 동원해 자기도취의 날조를 시도한다 할지라도 그 우울의 색조는 숨길 수가 없다. 지키지 못해서 생긴 화는 어디 가지 않고 고여서 늪이 될 뿐이다.
무엇을 지켜야 했던가?
자신이라고 하는 아이, 바로 자신이라고 하는 자유로운 마음이다.
우리는 자유로워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자유롭지 못해서 외로워진다. 그리고는 이 외로움을 성숙하지 못한 유치함이라고 치부하며, 유치함을 숨긴 채 유치함이 진정한 것으로 바뀔 자리를 찾아 헤매는 동안 실제로 유치해진다.
이처럼 결국 자신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이가 사이비에 빠진다.
사람들이 자신을 자유로운 존재로 확인하고 있을 때, 그 자리에는 사이비가 발을 붙일 곳이 없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느껴진 바 그대로 그렇게 느껴도 되는 존재로 존중할 때, 우리 자신은 존중받는다.
이와 같이, 내 마음의 자유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이해될 때 우리 자신도 이해받는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가장 시급히 회복되어야 할 마음의 자유는 바로 싫어할 자유다.
우리는 사실 우리가 성숙하게 되기 위해서는 지켜야만 한다고 간주하는 그 대상을 가장 싫어한다. 그런데 싫다고 말하지 못한다. 싫다는 마음을 없는 것처럼 취급하려고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정말로 지켜야 할 것인 우리의 마음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 싫어하는 대상을 지키기 위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마음을 내다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사이비에 빠진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사이비는 부모가 아이를 싫어할 수 있는 마음을 소외시키고, 언제나 진정으로 아이를 좋아하기만 하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곤 한다. 사이비가 그리는 그림 속에는, 늘 순도 100%의 여린 천사 같은 아기의 모습과 그 모습에 감동받아 눈물흘리는 순도 100%의 아이에 대한 호감으로만 가득한 영웅적 부모의 관계가 자주 묘사된다.
아이를 실제로 키워본 이라면, 이것은 순도 100%의 거짓말이라는 것을 바로 이해한다.
아이에게도 일방적인 형상을 강요하고, 부모에게도 일방적인 형상을 강요하는, 아주 유해한 판타지다.
역으로 물어볼 수 있다. 그러한 부모들은 자기 자신을 100%로 좋아하기만 하는가?
자기 자신도 100%로 좋아하지 않고 호불호가 갈리는데, 자기의 유전자를 이어받아 더 노골적으로 자기의 모습처럼 드러나는 아이의 모습이 100%로 좋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럴 수가 없다.
그것이 늘 좋지만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할 기회를 얻는 것이다.
이미 100%로 다 좋은 것만 있다면, 우리에게는 사랑이라는 것이 굳이 필요하지 않다.
사이비가 최악인 이유는, 우리에게서 바로 이 사랑할 능력을 원천적으로 박탈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싫어할 마음을 소외시킴으로써 결국 우리는 사랑의 능력을 거세당한다. 남는 것은 사이비가 만든 가상의 판타지다. 텔레토비처럼 모두가 헤벌레 웃으면서 서로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거짓된 인형극의 세상이다.
어떠한 것을 좋아해야만 한다고 진리의 세계관처럼 강요될 때가 아니라, 그것을 싫어할 마음의 자유가 존중될 때 그것에 대한 사랑 또한 가능해진다. 사랑은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무슨 도사처럼 미소지으면서 "그래, 지금은 더 많이 싫어하도록 하렴. 마음껏 자유롭게 네가 싫어하는 것을 싫다고 말해봐. 나중에 더 큰 사랑으로 너에게 알려질 거란다."라는 식의 또 다른 사이비 기만극을 펼쳐야 하는 것 또한 아니다.
이 모든 사이비의 삼류 알고리즘은 결국 사랑을 통제하기 위해 기획되고 운영된다.
이것이 이제 우리가 사이비에 빠지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를 시사한다.
사랑이 두려운 이들이 사이비에 빠진다.
사랑이 두렵기 때문에, 그 사랑을 자기 생각대로 조종하려는 의도로 사이비는 펼쳐진다.
모든 자아는 그래서 근본적으로 사이비다.
자아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자아는 사랑 속에서 반드시 용해된다. 그래서 자아에게는 사랑이 두렵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하다. 더는 자기가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는 착각의 무게를 짊어지지 않아도 되는 까닭이다. 그러나 어떻든 두렵다. 아직까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자아에게는 늘 사랑이란 미지의 두려움이다.
그래서 자아는 마음에 대한 구속을 풀고, 자유로운 마음을 자유롭게 놓아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자유로운 마음은 그냥 놓아두면 나풀나풀 경쾌한 몸짓으로 반드시 사랑을 향해 날아가기 때문이다.
마음은 언제나 이해받고 싶어한다. 그래서 자신을 이해해줄 사랑이 있는 곳으로 이동해가려는 본성을 갖는다. 철새들이 날아갈 곳을 감지하듯이, 마음 또한 정확하게 사랑이 있는 곳을 감지한다. 마음을 그냥 내버려두면 마음은 사랑에게로 종국에는 안내된다.
이처럼 자아 자신은 두려워서 쉬이 할 수 없는 것이지만, 마음이 하도록 두면 자연스레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자아에게는 사랑이 두렵지만, 마음에게는 사랑이 두렵지 않다.
그러나 자아가 자기의 두려움으로 마음을 봉쇄하려고 할 때, 그러한 마음은 필히 날개가 뜯겨 사이비의 늪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마음을 사이비의 늪에 빠지게 한 뒤, 자아는 사랑 대신에 자신이 마음을 사랑하려고 한다. 자아는 자신에게 사랑할 권능이 있는 것처럼 행세함으로써, 사랑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려고 하는 것이다. 즉, 사랑을 자기가 행사할 수 있는 도구적 소재로 설정함으로써, 자기가 사랑 위에 있는 주체인 것처럼 구조를 성립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이는 거칠게 비유하자면, 아이가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을 가로막고서는, 부모가 아이에게 자신이 하나님인 척하고 있는 모습과 같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부모가 하나님을 극복하기 위해 아이를 도구로 쓰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삶이라고 그 표현을 바꾸어도 된다.
삶을 두려워하는 것은 부모 자신이지 아이가 아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기의 두려움을 투사하여 아이의 삶을 가로막는다. 그리고는 부모를 의존하지 않고서는 삶을 잘 살아나갈 수 없는 것처럼 말하곤 한다.
이것이 사이비며, 자아가 바로 이러한 입장에 있다.
가만히 놓아두면, 사랑을 향해 자연스레 나아갈 이해받고 싶은 마음을, 사랑에 대한 자아 자신의 두려움으로 인해 강제적으로 사이비에 빠지게끔 한다.
결론을 다시 말하자면, 이해받고 싶은 마음이, 바로 자아에 의해, 사이비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어떻게든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말해야 하며, 그 이야기들을 꽉 끌어안아 어떻게든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무조건 사랑해야 합니다. 나의 소중한 이야기들을 반드시 지켜내야 합니다. 모두가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하찮게 생각할지라도 우리 자신만은 어떻게든 그 이야기들을 가득 품어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은, 단 한 번뿐인, 당신의 이야기이니까요. 나는, 내가 아니면, 누구도 사랑해주지 않을, 오직 나만 기다리고 있는, 나이니까요"
이것은 자아로부터 나온 사이비의 말이다.
이해받고 싶은 마음은 이렇게 말한다.
"싫어요. 내 자신이 싫어요. 세상이 싫어요. 공산당이 싫어요. 문재인이 싫어요. 방역패스가 싫어요. 민트초코가 싫어요. 제로투 댄스가 싫어요. 넷플릭스가 싫어요. 탕수육 찍먹이 싫어요. 이것이 올바른 것이고 현명한 것이며 좋은 것이라고 강요하는 그 모든 것이 싫어요. 제발 날 좀 그냥 내버려두세요. 좀머씨가 보고 싶어요. 엉엉엉."
어렵지 않게 벌써 이해받았다.
자아가 가는 비장미 넘치는 길은 언제나 무겁고 심난하지만, 마음은 가볍고 쉽게 늘 이해를 얻는다.
이해받고 싶은 마음은, 그냥 놓아두기만 하면 아주 신속하게 사랑을 얻어, 이내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드러난다.
사랑스러운 마음이 있는 곳에, 사이비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