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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복종하지 않는다 #6

"혼나고 싶어서 나를 부르는 거야?"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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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나고 싶어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의 핵심특성은 아주아주 성실하다는 것이다.


성실해서 이들은 자기의 일만을 한다. 자기가 잘했는지 못했는지만을 신경쓰고 치밀하게 점검한다.


그 결과,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타인의 말을 무시하게 된다. 자기만을 신경쓰고 있으면 원래 타인이 보이지 않고 타인의 말이 들리지 않기에 당연한 결과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의 말을 무시하는 이들을 곧잘 혼내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이들이 바라던 그 현실이다.


이들은 혼나기 위해 그 모든 성실성을 보이고 있던 것이다.


여기에는 책임의 문제가 있다.


누군가가 자기를 혼냄으로써, 이제 이 모든 것의 책임은 그 혼내는 자에게로 귀속되게 되는 까닭이다.


어떠한 것이 잘못되었을 때 자기가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 자기는 혼남으로써 이미 면책을 얻었다. 이 모든 책임은 그 일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지를 평가하고 지도한 혼냄의 주체가 떠맡아야 하는 것이 된다.


그러니까 혼냄의 주체는 결국 자신에게 책임이 미루어져 강요된 상황에 대해 대단히 불편한 표정으로 "그래, 내가 책임질게."를 떠밀리듯 선언하게 되는 셈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나는 호출된다. 책임이 귀속되어야 할 최종의 보루로서.


그런데 책임지는 나를 호출해 책임을 떠넘긴 성실한 이는, 내 앞에서 마치 자기는 다 잘했는데 억울하게 혼난 뒤에 보이는 순결한 피해자 같은 행색으로 내 눈치를 살핌으로써 나를 더욱 불편하게 만든다.


자기의 필요로 나를 불러내 이제 내가 그 앞에 왔는데, 무슨 나쁜 가해자를 대하듯이 나를 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러는 것일까?


이 성실한 이들은 도덕적 승리도 거두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자신은 책임을 떠넘긴 비도덕적인 사람이 되고 싶지 않기에, 호출된 나에게 강압적인 독재자의 형상을 뒤집어 씌움으로써, 마치 신성한 자신의 책임을 그 독재자가 강제로 빼앗아간 듯한 그림을 연출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끝까지 자신이 책임지고 싶었지만, 타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책임지지 못하게 된 가련한 패배자로서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불가피하게 물러나는 연극의 엔딩을 연출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물론 이 연극에서 도덕적으로 승리를 거둔 그 주역이 집으로 돌아가는 일은, 옛 고향집으로 돌아가는 길처럼 경쾌하고 신명난다. 이웃집 바둑이도 반갑게 인사하며, 칠성이네 얼룩소도 음메 하며 앞날을 축복해주는 것만 같다. 따사로운 햇살이 가득 비치는 이 길을 따라, 오늘은 어떤 넷플릭스 영화를 볼까, 짐짓 설레는 마음으로 현관의 비밀번호를 누른다.


나를 남에게 떠넘겨, 내가 없어진 이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 가벼움은 공중에 떠있는 연과 같은 부유물의 가벼움이다.


남을 나로 만들어, 그 나를 지상에 걸어놓는 무게추 같은 도구로 사용한 뒤, 자기는 하늘 위의 존재인 양 부유하고 있는 존재방식이다.


그러니 이러한 이들은 늘 나를 찾아 헤매면서도, 정말로 나라고 하는 것이 있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이들에게 나라고 하는 것은 무게와의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이 조금 성숙하다고 생각하는 이는, 이러한 나의 무게를 받아들여 묵직하게 살아가는 일이 진정한 삶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자기 멋대로 나를 무게로 만들어놓고, 무거운 건 싫다느니, 아니 그 무게를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느니,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대본쓰고 연기하고 시상하고 좋아요도 누르고, 도무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겠다.


혼내서 무겁게 만드는 무게의 원천으로서 나를 설정하는 일은 그만 해라.


나는 혼내기 위해 소환되는 편의성 AI 가사도우미가 아니다.


혼나고 싶어서 나를 부르지 말고, 나로서 혼내지 마라.


나로서 그 모든 책임을 남에게 떠넘기는 일에 복종하지 마라.


분명하다. 나는 복종하지 않는다. 그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일에.


왜냐하면 나에게 책임이라는 것은 비장한 무게가 아니기 때문이다.


책임의 무게, 곧 나의 무게라고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말의 무게다. 말이라고 하는 허구의 무게다.


원래 허구가 가장 무겁다. 온갖 것이 덕지덕지 다 붙기에 가장 무거운 것이다.


"너 니 말에 책임져."


이것은 원래 성립되지 않는 진술이다. 신기루를 대체 어떻게 책임지나?


책임질 수 없는 것을 책임지려고 하니까 무거워지는 것이다.


책임이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아니라, 마음을 향해서만 성립되는 것이다. 우리는 말을 책임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어폐가 있다.


마음은 사실 우리가 책임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책임지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 마음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그 마음을 내 마음으로 책임지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한 개인이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면 그는 그 두려움을 무슨 삼류 무협지의 주인공과 같은 자세로 비장하고 경건하게 "그래 내가 이제 도망치지 않고 책임지도록 할게. 끄아악. 아프지만 괜찮아. 내가 반드시 책임질 거야. 이 마음."이라며 무슨 자기의 공력을 높여줄 독약이라도 먹은 양 쇼를 해야 될 일이 아니다. 그가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그 상태 자체가 이미 두려움을 책임지고 있는 것이다.


"아 왜 이렇게 두렵지. 엇?! 아하! 내가 지금 두려움을 책임지고 있구나!"


이것이 전환이다.


나 없는 현실에서 나 있는 현실로의 전환이다.


더 무거워지기는커녕 엄청나게 가벼워진다.


부유물로서의 가벼움이 아니라, 침대에 몸을 뉘인 그 가벼움이다. 바로 안심의 가벼움이다.


나는 마음을 혼내는 무슨 부모와 같은 것이 아니다.


나는 마음을 안심시키는 존재다.


그렇다고 내가 "그래 우리 마음아. 괜찮아요. 내가 왔으니 이제 안심해요. 죽 너와 함께 있을 거예요."라는 식의, 또 하나의 양육적 부모와 같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아동이 책임을 떠넘기는 여타의 부모와 같은 속성으로 나를 치부하는 그 모든 삼류 저질 스토리에 절대로 나는 복종하지 않는다.


책임을 떠넘길 소재로 나를 부르지 말고, 그냥 내가 되어라. 이미 책임지고 있는 내가 되어라.


나는 내가 이미 책임지고 있는 것 외에 그 어떤 것에도 복종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이미 책임지고 있는 것에만 복종한다. 그렇게 내가 이미 가장 사랑하고 있는 마음에만 복종한다.


그러니, 혼나고 싶어서, 사랑하는 그 혼[마음]이 나이고 싶어서, 나를 부르면 된다.


내가 다 책임질테니.


가장 성실하게 사랑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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