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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아는 일이 왜 중요한가?

"개체의 서사에서 벗어나 개인으로의 스타트업"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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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아는 일은 이 시대에 정말로 중요하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단적으로 말해, 마음을 알지 못하면 다음과 같은 일들이 벌어진다.



0001.jpg?type=w1600 <미생> 시즌 2 114화 中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냥 마지못해 하루하루 사는 거지, 뭐 재미가 있나."

"우울하다. 이런 게 삶인지."


무기력해지고, 공허하고, 침체되고, 활력이 없고, 다 피곤하고, 그러다보니 그냥 알아서 흘러가는 유튜브 영상이나 보며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때우는 일이 유일한 여가활동이 되어버리고, 결국에는 의지를 내어 하는 일이라는 것이, 어린 시절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았던 유치원 학예회 활동 같은 것을 인생에서 가장 보람있던 시간으로 간주하여 다시 이루고자 하는 SNS 유사연예인 활동이 될 뿐이며, 그렇게 동굴 속으로, 엄마의 자궁 속으로 숨어 들어가는 퇴행을 소망하게 되는 일이 바로 우리가 우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마음을 알지 못하면 이 우울한 인생은 필연이다.


우울은 현대인의 만성적 징후라고도 말해진다. 그만큼 현대인에게는 마음을 아는 일이 요청되고 있으나 여전히 마음을 모르고 있는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후기 근대, 즉 현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마음을 아는 일이 절실하게 요청된다. 누가 요청하고 있는가?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근대성이 보편적 진리의 이름으로 종국에는 창출해낸 전체주의의 폭력에서 벗어나고자, 그리고 그 폭력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고자, 인간은 개인이 되려고 했다. 다시 말하자면, 보편적 일자(一者)가 아니라 구체적 다자(多者)가 되기로 했다.


이 구체적 다자가 되기 위해서, 즉 개인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마음이다.


여기에는 개인과 개체의 차이가 놓여 있다.


개체는 전체의 마음을 구성하는 부분의 요소다. 개체가 모여 공동체를 이루면, 그 공동체가 공유하는 집단정신은 개체의 정신보다 더 보편적이고 진정한 것으로 가정된다. 합체 로보트처럼 더 많이 합체할수록 더 완전해지는 것이다.


이것을 통합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그래서 개체는 언제나 통합되어야 하는 소재며, 스스로도 통합을 지향한다. 개체는 늘 더 강하고 완전해보이는 세력에 자신을 함입시키고 싶어한다.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아무 것도 두렵지 않았다."가 바로 개체의 슬로건이다.


그만큼 개체는 자기 자신을 온전하지 못한 존재로 상정한다. 단지 전체를 위한 하나의 작은 부품으로서의 역할과 기능으로만 자신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역할과 기능을 충분히 다할 때만 개체는 자신을 온전한 존재로 평가 가능하게 된다. 때문에, 이를테면 개체가 공동체에 헌신하는 일에 곧잘 매진하는 이유는, 개체가 특별히 도덕적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해야만 자기의 존재가치가 생겨나는 것 같아서다.


이것을 불안의 문제와 연결하여 읽을 수 있다. 개체는 자신의 불안을 집단주의적 소재에 언제나 위탁하려고 한다. 자기보다 더 권위있는 남을 모방해야 하고, 남의 말이 자기의 말과 같아야 안심이 되며, 자기도 남을 위해 친절하게 헌신하는 속에서 안정을 찾는다.


그러나 개인은 전적으로 다르다. 개인은 개체와 달리, 불안을 자신이 떠맡는다. 떠맡는다고 표현하지만, 사실 그렇게 비장한 것이 아니다. 시지프의 바위와 같은 것이 아니다.


불안에 대해 정확하게 말해보자. 불안은 단지 이것이다.


'그런 일이 나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


불안은 인간의 가능성이다.


이 가능성에 대한 언술을 능동형으로 바꾸면 또한 이렇게 된다.


'그런 일을 내가 할 수 있다는 가능성'


이것이 무엇인가?


바로 자유다.


우리가 어떠한 상황을 떠올리면 불안해질 때, 거기에는 반드시 그렇게 할 수도 있을 능동적 자유의 가능성이 있기에 우리는 불안해지는 것이다.


조금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학창시절에 우리를 괴롭히던 일진 앞에서 우리가 불안해질 때, 우리는 사실 그 일진의 폭력 때문에 불안한 것이 아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우리가 그 일진을 실제로 죽여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의 그 마음에 불안해지는 것이다. 진실로 그 마음이 실현 가능한 소재이기 때문에 불안해지는 것이다.


"아, 쟤가 너무 두려워."와 "아, 쟤를 죽여서 살인자가 되어 인생을 망치는 게 너무 두려워."는 달라도 너무 다른 것이다. 똑같은 떨림이지만 질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이것이 바로 개체와 개인의 차이다.


개인은 '자신에게 언제든지 실현 가능한 마음의 힘이 온전하게 내재되어 있는 그 사실 속에서 사는 이'를 의미한다. 빨간 펜으로 밑줄을 여러 번 그어도 좋다. 개인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에 의해서 힘을 얻는 이다. 그 마음의 힘에 따라 자기의 현실을 스스로 경영할 수 있는 이다.


개체에게는 불안이라고 불리는 것이, 개인에게는 자유라고 불린다.


바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알고 있는가에 대해 나뉘는 차이다.


개체는 근본적으로 자기의 마음은 보잘 것 없는 것으로 가정한다. 즉, 개체에게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늘 작아야 하는 소재다. 그러니 커다란 마음이 드러날 때 개체는 그것을 불안으로 경험한다. 그래서 개체는 자신이 불안으로 경험하는 마음을 집단에 위탁한다. 집단이 대신 자기의 마음을 처리해달라며 마음을 집단에 투기[투사]한다.


그러나 마음은 힘이다. 개체에게 커다란 마음이 드러난 것은 그 순간 커다란 힘이 필요해서다. 그런데 그 힘을 오히려 소외시키고 다른 곳으로 갖다 버리니, 개체는 더욱더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 결국 개체가 자신의 힘을 투기한 집단은 점점 더 힘있게 되고, 힘을 스스로 상실한 개체는 점점 더 무기력한 모습이 된다. 곧, 개체는 한없이 우울해지는 것이다.


이 우울함 속에, 개체는 결국 자신이 힘을 투기해 강화시킨 집단에 스스로 겁먹으면서 더욱더 집단에 의존하게 되는 한편, 그러한 집단에 예속되어 있는 자신의 처지를 답답하게 여기며 반항하기도 한다. 의존과 반항은 이처럼 원래 한쌍이다. 스스로가 힘을 준 허깨비 같은 대상과 스스로 싸우고 있는 일종의 삼류 연극을 수행하고 있는 상태다.


그리고 이 상태가 당연히 우울의 상태다.


우울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이 되지 못한 개체의 핵심적 특성이다.


개인은 우울 대신에 불안을 선택한다. 물론 개인에게는 불안이 아니라 그것은 자유다.


다양한 심리적 스펙트럼이 펼쳐지는 수평선 위에서, 원래 한쪽에는 우울이 자리하고, 다른 반대쪽에는 불안이 자리한다.


우울증의 특효약은 우울증을 호소하는 이를 불안하게 하는 것이다.


아무리 인생의 무의미함을 말하며 정신적 공허 속에서 침대에 무기력하게 쓰려져있는 이라도, 부엌에서 냄비가 타는 냄새가 나면 벌떡 일어나 뛰쳐나오게 된다. 그와 같다.


개체의 고질병인 우울의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개인이 되면 된다.


사상사적으로도, 근대성이 만든 만성적 우울에서 탈피하기 위해 이 개인이 되고자 하는 문을 열어젖히며, 현대라고 하는 시대적 전환은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니 현대의 사상가들은 다 하나같이 불안의 문제를 말한다. 불안을 말하지 않고는 개인으로 가는 길을 안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불안이라고 하는 소재는 우리가 개인으로 실현되는 문제와 직결된다.


개체와 개인을 가르는 핵심적인 경계, 바로 불안이다.


자기의 불안을 소외시키면 개체고, 자기의 불안을 자유로 정확하게 알아 그 자유의 힘을 자기가 유용할 수 있으면 개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시사점이 출현한다. 그것은 개체가 자기의 불안을 소외시키는 그 방편으로 가장 많이 활용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다.


불안을 소외시키려는 개체의 목적에 봉사하는 주요한 도구, 그것은 바로 서사(narrative)다.


서사는 이야기를 보편화시킨 것이다.


누가 들어도 쉽게 논리적 구조에 따라 이해할 수 있게끔, 즉 그렇게 보편성을 형성할 수 있게끔 제조된 이야기가 바로 서사다.


서사는 개체가 자신을 의탁하는 최고의 소재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마음은 언제나 지금-여기에서의 실시간적인 역동이다. 이것을 마음의 동사성이라고 한다. 지나가버리면 이미 없는 것이며, 이미 그 모습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 마음을 억지로 정형화시켜 패턴처럼 만들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 그 의지의 발현자가 바로 개체다. 개체는 마음이 휙휙 바뀌면 불안하기에 마음을 통제하고자 의지를 세운다. 그리고는 그 의지로 마음을 열심히 가공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가공품이 바로 서사다.


서사란 즉 마음의 환원된 대체물이다. 개체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노력을 통해 이제는 불안하게 경험되지 않게 된 마음이다.


물론 그것은 실제의 마음이 아니라 가공의 것이다.


그래서 힘이 없다.


불안하게 경험되지 않게 된 마음이란, 그저 그 유기체적 생명력을 잃어 무기물로 화석화된 마음이다.


이러한 서사라고 하는 화석을 장대에 높이 매달아 인간 모두를 향해 "바로 이렇게 살면 우리가 불안하지 않다!"라고 외치는 것이 곧 이념의 선전활동이다.


이처럼 서사의 실용태가 이념이다. 이념은 곧 윤리가 되며, 뒤이어 명예와 권위, 권력 등을 얻게 해줄 상징자본이 된다.


개체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성공이라 불리는 것이다.


자신이 제조한 서사를 이념화해, 집단주의적 소비재를 더욱 많이 쟁취하는 행위가 결국 개체의 인생목표인 셈이다.


유아적 전능감에 사로잡힌 삼류 판타지 작가들의 발상과 동일하다.


이러한 기획이 뜻대로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 개체는 우울감에 빠진다. 그러나 그 우울감은 사실 개체 자신이 마음을 서사라는 무기물로 만들고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불안 그 자체로, 곧 자유 그 자체로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실이다.


"마음은 온전하다."


이 말은 대체 무슨 뜻인가?


개체에게 있어서는 이 말이 "마음은 내 자신을 불안하게 하지 않고 언제나 조금만 노력을 기울이면 통제범위에 들어오는 착한 돌고래처럼 안전하다."의 뜻으로 들린다. 아니 개체는 그렇게 듣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 말의 실제적인 뜻은 "마음은 내 자신을 불안하게 한다."이다.


그리고 개인은 이 말의 가장 놀라운 뜻을 바로 알아 듣는다.


"마음은 내 자신을 자유롭게 한다."


이 말을 통해 개인은, 내가 지금껏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그런 일을 이제 할 수도 있는, 위대한 자유의 힘을 전적으로 소유한 완전한 존재로서 자기 자신을 다시 발견한다.


그것이 정말로 자신이라고 하는 존재의 위세임을 깨닫는다.


존재가 출범한다.


스타트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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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체가 만들어내 공동체의 이념으로 작동시키고 있는 서사들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다. 단지 거대서사[담론]에 대한 의미만이 아니다. 미시서사들 또한 저마다 짹짹대며 자기의 이야기를 한답시고 신도림역의 통근지하철처럼 세상의 빈 공간을 꽉꽉 채우고 있다.


이처럼 세상이 서사로 가득 찰수록 세상은 더욱더 좁아지며 갑갑한 곳이 된다. 모든 것이 다 뻔하고 재미없는 곳이 된다. 서사를 소비하는 주체들은 '세상 이런 거였어? 별 거 없네.'라며, 마치 모든 것을 다 아는 대현자인 양 착각의 정체성 또한 갖게 된다.


그렇게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의 우울도는 증대한다.


정형화되고 패턴화될수록, 우울 또한 그 세력이 견고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은 절대로 여기에 갇히지 않는다.


생명을 장벽 안에 가두어둘 수 없듯이, 마음은 반드시 자신이 자유롭게 회복될 새로운 공간을 찾아 비상한다.


<미생>의 장백기가 말하듯이, '전에 없던, 필요했던, 없어서 아쉬웠던 것'인 바로 개인을 찾아, 나를 찾아 날아오른다.


개체를 찾아 들어온 마음은 언제나 부분으로 환원될 뿐이다. 서사가 원래 그러한 것이기 때문이다. 등장인물들을 위해 서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서사의 완결성을 위해 등장인물들이 봉사하는 것이다.


각자의 고유한 이야기를 풀어낸다고 하는 미시서사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 안에서도 마음은 환원된다. 미시서사를 성립시킬 특정한 개성만을 중요시 여기며, 나머지의 것들은 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위에서 난도질되기 때문이다.


마음은 결코 이미 부분으로 정립된 개체 안에서는 온전한 형상으로, 온전한 힘을, 온전한 위격으로 작동시키지 못한다.


집단에 위탁하지 않고, 마음을 스스로 향유하는, 이미 스스로 온전한 존재로 자신을 자각하는 개인 안에 들어올 때만이 마음은 온전한 세력을 그대로 펼칠 수 있다.


그래서 이것은 마음의 사업이다.


개인이라고 하는 것을 실현하기 위한 스타트업의 비지니스다.


마음을 안다는 것은, 마음이 바로 개인으로의 스타트업을 추동하는 실질적 힘을 갖고 있는 소재라는 근본적 사실을 안다는 것이며, 동시에 어떠한 마음이든지 우리가 개인으로서 정당하게 누려도 되는 소재라는 기능적 사실을 안다는 것이다.


그 모든 서사를 떠난 자리에서 개인이 발견된다.


그 어떤 서사 안에도 자신의 자유를 구속시키지 않고, 자유의 힘 그대로 온전하게 펼치는 자리에서 개인이 실현된다.


거대서사에서 벗어나 미시서사를 추구하는 이가 개인이 아니다. 그것은 똑같은 개체일 뿐이다.


개인이 된다는 것은 단순하게 서사를 떠난다는 것이다.


붓다의 말처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거대서사도 아니고 미시서사도 아닌 바로 그 자리에 마음이 있다. 그럼으로써 개인이 있다.


그 구체적인 몸뚱아리 하나로 인간을 대표하는, 가장 구체화된 것으로 가장 보편적인 것을 이미 성립시키는, 존재 그 자체로 온전한 개인이 있다. 통째의 마음을 통째로 향유하는 통째의 개인이 있다. 이 개인의 존재론적 질량은 그래서 언제나 우주만큼이다. 내 삶의 의미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렇게 알려진다.


대체 어떤 것이 우울하고, 어떤 것이 불안한가?


우울도 불안도 없다.


자유로울 뿐이다.


이제 스타트업이다.


나라고 하는 이 우주에서 가장 온전한 그 이름을 가진 개인을 향해, 이제 훌쩍 스타트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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