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는 캐릭터메이킹의 산물이 아니다"
존재에 대해 이해하고자 할 때 우리는 하이데거에게서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하이데거만큼 존재를 향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섬세한 탐구를 전개한 사상가도 달리 없기 때문이다.
아주 거칠고 무식하게 하이데거의 철학을 한 마디로 감히 말하자면 이러할 것이다.
"존재는 신비다."
존재가 그 신비성을 잃고 일개의 정형화된 대상적 소재로 촌스럽게 환원되는 일을 비판적으로 지시하기 위해, 그리고 존재의 신비성을 시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하이데거는 그 모든 말을 했다.
그리고 사실 엄밀히는 이 글은 여기에서 끝이다. 존재가 신비라는 것은, 인간이 존재를 들었다 놓았다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대로 시사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존재를 만든다(make)고? 심지어는 존재를 꾸밈으로써 보완(make up)하기까지 한다고?
존재에 대해 인간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메이킹을 시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이데거에게 있어서는 존재자를 존재로 착각하는 전형적인 오해다. 그러니까 마치 빨간색 볼펜을 보며 그 빨간색을 존재의 속성이라고 간주하여, 색을 파란색으로 바꾸면 존재도 바뀐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볼펜의 색을 어떠한 색으로 바꾸든, 볼펜 자체가 '있다는 사실'에는 아무 영향도 주지 않는다. 빨간색인 것이 파란색인 것으로 있게 된 것이지, 존재가 더 있게 되거나 덜 있게 된 것이 아니다.
이것을 다시 파도와 바다의 비유로도 이어갈 수 있다. 바다는 파도라는 사건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지만, 파도가 바다 자체인 것은 아니다. 파도의 높낮이를 임의적으로 바꾼다고 바다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높은 파도일 때나 낮은 파도일 때나 바다는 그저 온전한 바다 그 자체다.
이 말은, 인간의 존재는 그의 어떤 개성에도 불구하고 늘 최대치로 충만한 존재 그 자체라는 의미다.
자신이 못났다고 생각하던 이가 머리를 염색하고 타투를 해서 "그래, 이제 난 분명한 존재감을 얻게 되었어."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그의 존재감은 그가 검은 머리였을 때나 형광색 머리로 바뀌었을 때나 늘 똑같이 충만하다. 단 한 번도 손상된 적이 없으며, 단 한 번도 보완된 적이 없다.
존재자의 개성을 임의적으로 강화하거나 약화하면, 존재하는 정도가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 심대한 착각은, 우리가 이야기의 작법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
즉, 자신을 작가로 간주하고, 세상을 원고지로 간주하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를 소설 속의 등장인물처럼 간주할 때, 이러한 착각이 발생한다.
그리고 결국 이 착각 속에서 살아가는 작가적 주체는 자신이 마치 소설 캐릭터를 설정하듯이 존재에 새로운 개성을 언술적으로 부여함으로써 존재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망상을 품게 된다.
이것이 이야기의 작법으로 세상을 산다고 하는 모습이다.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망각 속에서 존재를 소설 캐릭터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소설 캐릭터는 전형적으로, 갈등 속에 노출되어 그 갈등을 이겨냄으로써 고유한 자신의 개성을 강화시키게 되는 서사과정을 밟게 된다. 편집자나 독자들이 보며 "와 캐릭터 잘 만드셨네요. 갈등요소도 분명하고, 캐릭터의 강단점도 분명해서, 성격이 아주 명확하게 드러나네요. 존재감이 아주 확실한 걸요."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이루게 하기 위해 이 메이킹 작업은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다시 한 번, '소설 캐릭터의 개성'을 '사실적 존재의 속성'으로 완벽하게 착각하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그러나 전술했듯이, 개성과 존재감은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이다. 개성이 많든 적든 간에, 존재는 그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우리가 온전한 것은 우리의 개성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그 자체의 본성이 원래 그러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 본성을 받아들여야만 우리가 온전해지는 것 또한 아니다. "이제는 받아들일 거예요. 이제는 제가 온전하다는 사실을, 두렵지만 용기있게 한번 받아들여보려고 해요. 제 자신을 가득 안아주고 사랑해볼 거예요." 이 또한 개성의 차원이다. 이러한 수행자적 개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소설 캐릭터의 모습일 뿐이다.
존재는 우리가 힘들게 받아들이든 편하게 받아들이든, 또는 애써 받아들이지 않든 간에, 그 모든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 우리의 그 모든 임의적 행위와 아무 상관없이 존재 그 자체로 그냥 온전하다.
소설 캐릭터의 모든 임의적 행위는 작가에 의해 설정된다.
소설 캐릭터가 특정한 행위를 통해 존재감을, 곧 존재의 온전함을 확보할 수 있다고 설정되는 까닭은 단순하다. 작가 자신이 바로 온전함을 부여하는 신적 주체인 척 행세하고 싶어하는 그 이유 때문이다. 매트릭스 속 구원자의 꿈 같은 것이다.
이러한 가상현실 속에서는, 작가가 존재감 있게 설정해준 캐릭터는 존재감이 강화되거나 보완되며, 그러지 않은 캐릭터는 존재감이 약화되거나 결여된다. 그렇게 존재감을 충분히 얻지 못한 캐릭터는 결국 작가의 무능력성 내지 무책임성과 연결된다. 때문에 작가는 책임을 통감하며, 어떻게든 자신으로 인해 소설 캐릭터들이 온전한 존재감을 얻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매진한다.
자신을 신이라고 간주하는 부모가 아이들에게 하는 그 행위와 같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자신의 소설 캐릭터로 보며 이러한 일을 하고 있는 작가적 주체는, 모든 것을 자기의 아이들로 간주하고 있는 셈이다. 즉, 자기 아래의 것들로 대단히 우습게 보고 있는 것이다.
우습게 보기 때문에 작가적 주체는 세상 모든 것들에 친절해질 수 있다. 우쭈쭈, 하며 비위를 맞출 수 있다. 근본적으로 자신을 위협하지 않는 아랫것들인 까닭이다.
이것이 오만 중의 오만이다.
사실적인 존재들에 대해 캐릭터메이킹을 시도하고 있는 작가적 주체란 가장 큰 오만의 결집물이다. 존재의 신비성을 깔아뭉개고 대신 자신이 신처럼 보이고 싶어하는 유아적 전능감의 구현물이다.
이러한 주체의 근본적인 착각은 자신이 사건을 통제할 수 있다고 여긴다는 점이다. 아니 바로 그러고 싶어서 이들은 작가가 된다.
그러나 사건이 통제되는 것은 자신이 임의적으로 사건을 배치하는 일이 가능한 소설의 작법 속에서일 뿐이다. 실제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알아서 찾아온다. 세상은 절대로 소설의 작법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사건이란 무엇인가?
바로 존재가 스스로를 드러내기 위해 우리에게 밀어닥치듯 찾아오는 현상이다.
그래서 존재사건이라고 부른다.
삶은 존재사건이다.
자신의 각본을 이미 벗어나 있는 이 존재사건을 임의적으로 메이킹하는 일이 정말로 가능한가?
나도 바로 그 존재사건이다.
자신의 각본을 이미 벗어나 있는 이 나라고 하는 존재사건을 임의적으로 메이킹하는 일이 정말로 가능한가? 나를 소설 캐릭터처럼 설정해서 캐릭터메이킹을 통해 나의 존재감에 영향을 주는 일이 정말로 가능한가?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면, 이는 주술을 시사한다.
언어로 존재를 바꾸고자 하는 그 모든 의도가 바로 주술적 의도다.
주술은 존재에 대한 폭력이다. 존재를 임의적으로 정형화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한 폭력이다. 그리고 폭력적으로 존재 자신이 대해질 때 존재는 스스로를 숨긴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존재는 섬세한 까닭이다.
이야기의 작법에 따라, 장르 공식의 알고리즘처럼, 거칠고 투박한 태도로 무식하게 존재를 막 다룰 때, 섬세한 존재는 뒤로 물러남으로써 결국 우리는 존재감의 은폐를 경험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개성이 없어서 존재감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식적 행위로 존재에 개성을 부여하여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폭력적 작가정신 앞에서 숨어버린 존재로 인하여 존재감을 느끼기 어렵게 된 것이다.
작가는 분명 자신의 소설 속에서는 가능한 캐릭터메이커일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절대로 그 어느 곳에서도 존재메이커가 아니다.
존재는 존재자가 아니듯, 존재는 캐릭터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보자.
"존재는 신비다."
신비라는 것은 언어로 규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가장 위대한 작가의 그 어떤 언술 속에서도 존재는 빠져 나온다. 자신의 언어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그 어떤 신적 주체의 메이킹 작업 속에서도 존재는 미끄러져 나온다.
존재 그 자체가, 언어로 구성한 그 어떤 구조보다도 언제나 더 거대하고, 그만큼 영원히 자유롭다는 사실을 스스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신비는 그 전모를 알 수 없이 다만 거대한 자유를 의미하는 표현이다.
존재는 자유롭다. 충만한 존재감이란 바로 그 자유에 접촉해있을 때 경험되는 것이다. 나를 임의적으로 규정하는 그 모든 이야기의 작법에서, 즉 자기가 나를 만들고 보완해줄 수 있다며 신적 주체로 군림하려고 하는 작가의 독재에서 벗어났을 때 실감되는 것, 그것이 바로 존재감이다.
그래서 존재를 향해 필요한 우리의 태도는 작가적 태도가 아니다. 우리는 존재를 향해 성실한 독자로 드러날 필요가 있다. 존재 자체가 작가다. 존재 자체가 우리를 메이킹한다. 하나의 마스터피스로서.
존재가 우리를 마스터피스로 만들고 있는 그 작업에 되도 않게 우리가 작가인 척 한 숟가락 얹으며 방해만 하지 않으면 된다. 우리는 그저 충성스러운 존재의 애독자이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이내 존재감이 가득 실감된다.
존재감이란 결국 우리가 존재를 애독하며 경험하게 되는 진한 감동인 까닭이다.
존재감은 존재에 대한 감동이다.
우리의 존재가 얼마나 거대하고 자유로운, 상상 그 이상의 신비인지에 대한 자각이 낳은 바로 그 감동이다.
존재는 결코 캐릭터메이킹의 산물이 아니다.
우리 자신이 존재가 메이킹한 선물이다.
매일 받아도 질리지 않고 늘 새로우며 늘 완벽한 그 선물에 대한 감동이 곧 존재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