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의 아름다운 무용성을 상기하기 위해"
이를테면 <비밀의 숲 테라비시아>에서 주인공 소년이 "이제 난 환상을 만들 수 있는 마법사가 되었어."라고 하며 자기 동생의 친구들을 숲으로 함께 불러, 언어로 세상을 판타지처럼 보는 마법을 가르쳐주는 대신에 그들에게 10달러씩을 받는다고 해보자.
또는 자기가 좋아하는 판타지의 이야기와 동일시되어 자기 또한 현실에서 최고의 주인공으로 대접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서 늘 잠정적으로 화가 나있는 이의 모습을, 나아가 가득찬 화를 소화할 수 없어 늘 만성적인 우울함 속에 있는 이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또는 자기는 허구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데 능하니까, 이 현실이 자기가 쓴 판타지 소설처럼 되어야 한다고, 자기가 신인 척 행세하고 있는 이를 떠올려보자.
이것은 판타지를 소비하는 가장 나쁜 방법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판타지를 소비하는 이는, 군더더기를 다 빼고 아주 핵심만 얘기하자면 그저 "내가 왕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소비자에게 있어 판타지란 자기를 왕으로 만들어줄 익숙하고 효율좋은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니 실은 이러한 소비자는 판타지의 가치 또한 모독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이 세상의 모든 사물과 사상, 그리고 사람들은 단지 자기에게 부와 명예, 권력을 집중시켜, 자기를 왕으로 만들어주기 위한 도구적 소재에 불과하다.
판타지의 소비를 통해 사람들에게 왕이 되고자 하는 이, 그는 기본적으로 정신병이다. 정신병의 핵심은 병식이 없다는 것이다. 왕의 꿈을 꾸는 한 반드시 왕에게 착취되고 남용될 다수의 노예들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왕이라는 것이 성립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실제적인 차원에서 사람들을 착취하고 남용하기를 꿈꾸면서, 이러한 이는 자신이 대단히 선량한 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선한 마음으로 살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처럼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자각이 없다. 병식이 없다. 아주 단순하게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것을, 굳이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왕처럼 살 수 있었던 짧은 시기가 있다. 영유아때다. 그 일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부모님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큰 애정으로 기꺼이 착취되고 남용되어주었기에 영유아는 왕처럼 행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누군가가 자기를 위해 반드시 희생되어야만 자기가 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이와 같이 자명한 것이다. 왕은 혼자 잘나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왕은 반드시 타자의 희생 위에서만 존립된다.
그러니 판타지를 잘 소비하면 왕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결국 판타지를 타인의 희생을 창출하는 기제로 삼고 있는 셈이다.
모든 정신병이 병이라고 불리게 되는 그 이유는 무엇인가?
자기만의 판타지 속에서 그 판타지만을 고집함으로써 자기뿐만 아니라 타인 역시도 고통스럽게 만든다는 것이다. 실질적인 고통을 만들어내니까 병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판타지를 소비하는 나쁜 방법이 낳은 이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해 채택하는 약 또한 판타지라는 것이다.
약은 약인데 마약이다.
판타지를 소비하는 가장 나쁜 방법, 그것은 판타지를 마약으로 소비하는 것이다. 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 포이어바흐와 같은 현대의 시대정신을 형성하는 데 핵심적으로 일조한 사상가들은, 이 판타지가 사람들에게 마약으로 소비되고 있다는 사실을 예리하게 지적한 바 있다.
마약은 현실을 굴절시키고 왜곡시킨다. 현실 대신에 판타지가 정신을 지배하도록 만든다.
왜 현실을 이토록 부정하려고 하는가?
판타지를 마약으로 소비하는 이들에게는 현실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이것이 출발점이다. 현실을 고통스럽게 경험한 이가 판타지를 소비하게 되고, 그 결과 정신병처럼 더 고통스러워지게 되며, 그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해 또 다시 판타지를 마약으로 소비하는 방식으로, 악순환이 이어진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현실은 왜 고통스럽게 경험되었는가?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고집을 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실 자체가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다. 현실을 부정하려는 고집이 사실은 고통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붓다는 모든 고통은 집착에 의해 발생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고집이 바로 집착이다. 이러한 고집을 "진정한 나의 길을 간다."라는 판타지의 방식으로 미화까지 하고 있다면 여기에는 전적으로 답이 없다.
분명하다. 어떠한 이가 판타지를 나쁜 방식으로 추구하는 정도는 그가 고통받고 있는 정도에 정확하게 비례한다. 그리고 그가 고통받고 있는 정도 역시 그가 고집을 부리고 있는 정도에 비례한다.
물론 고집을 부리고 있는 그 내용 또한 판타지다. 그렇게 이 고집과 고통의 유구한 순환은 그 시작도 판타지고 그 끝도 판타지다.
이 판타지의 나쁜 소비자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는 때도 생겨난다. 그것은 자기와 똑같이 고집부리는 상태 속에 있어 현실을 고통으로 경험하고 있는 이가 그 해결책으로 판타지를 마약으로 소비하고자 할 때, 그래서 판타지의 마약냄새를 따라 자기를 찾아올 때다. 그러면 이제 이 판타지의 소비자들은 그에게 고통을 대신 떠넘길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자신은 노예가 된 방문자 앞에서 왕처럼 행세할 수 있게 된다.
보통 사이비구루라고 묘사되는 이들이 하는 일이다.
모든 사이비구루는 현실에 대해 불만족인 상태다. 자기 고집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대해 늘 불만이 가득한 상태다.
아무리 여여하고 평화로운 척을 해도, 그 자체가 연극적인 풍모를 띤다. 과장되고 과잉되어 있다. 조바심이 나기 때문이다.
그 조바심은 자기가 이렇게 살다가 왕이 아닌 것으로 죽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낳은 조바심이다.
즉, 어쩌면 자기가 고집부리고 있는 그 판타지가 사실은 다 거짓말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낳은 조바심이다.
그렇듯 판타지를 나쁜 방법으로 소비하고 있는 이들도 실은 알고 있다. 자기가 지금 거짓말을 늘어놓고 있다는 것을. 거짓말이 아닌 것처럼 유려한 고급언어들을 구조적으로 짜맞추어 흡사 논리적으로는 말이 되는 것처럼 보이게 하지만, 그 내용은 기실 작동하지 않는 허깨비라는 것을.
아주 단순하게, 자기의 그 어떤 판타지라도 자기의 현실을 바꿀 수는 없다는 바로 그 사실을, 그들은, 아니 우리는 모를 수가 없다.
자기의 현실을 정직하게 마주보는 이는 그래서 판타지를 현실에 대한 구원재 내지 보완재처럼 소비하지 않는다. 그의 현실에는 판타지가 전혀 필요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가 사는 현실이 판타지보다 더 아름답고 감동적이기 때문이다.
잘 만든 판타지는 우리로 하여금 현실이 바로 이러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끔 도와준다.
즉, 잘 만든 판타지는 판타지 자신을 붕괴시킴으로써, 오히려 판타지의 소비자가 현실에 눈뜨도록 만든다.
그러나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잘 만든 판타지가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윤리와 교육의 기능을 수행한다는 말이 아니다. "아, 저 멋진 주인공의 모습처럼 나도 살아가야겠다." 이러한 것이 아니다. 판타지가 이처럼 프로파간다로 작용할 때, 바로 그것이 판타지를 소비하는 나쁜 방법이다.
잘 만든 판타지가 작동하는 방식은, 판타지가 그저 판타지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잘 만든 판타지의 문학적 효과는 낭만적 고양감을 부채질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적 상실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판타지를 소비하는 동안 현실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사실을 실감하게 해주는 것이 잘 만든 판타지다.
이렇듯 잘 만든 판타지가 하는 가장 위대한 일은 결국 허구와 현실과의 경계를 명확하게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잘 만든 판타지를 소비하는 이들은, 보자기를 어깨에 걸치고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리거나, 애인한테 고백편지를 쓸 때 "너를 3000만큼 사랑해."라고 쓰거나, 현실 조직의 그 어디서나 "나는 왕이라구!"라고 주장하지 않게 된다.
또는 무슨 미국드라마를 보고 드라마 주인공이 하는 독심술을 가르치거나 배울 수 있다고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애초 자본이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대중을 상대로 제작한 통속적인 콘텐츠가 심도있는 인생의 진리를 말해준다고 간주하지 않으며, 가장 단순하게는 판타지의 이야기를 현실의 원리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처럼 잘 만든 판타지가 향하는 방향성은 자연스럽게 판타지를 잘 소비하는 방법과도 연결된다.
그 핵심은 판타지를 인생의 모범적 해석틀로 삼아 그 해석틀에 현실을 끼워맞추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 표현을 임의적으로 해석틀이라고 하고 있지만, 특정한 틀에 끼워맞춰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은 애초 해석이라고 하지도 않는다.
연구자마다 조금씩 이견이 있겠지만, 어떻든 이렇게 말해볼 수 있다.
"현상학이 되지 않으면 해석학은 되지 않는다."
현상학이라는 것은 보는 법이다. 여기에서 본다는 것은 기존의 틀 없이 본다는 것이다. 특정한 틀을 갖고 보게 될 때 현상은 언제나 굴절된다. 그런데 심지어 이미 굴절되어 있는 판타지를 틀로 삼아 현실이라고 하는 현상을 본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렇게 굴절에 굴절을 거듭해 보게 된 상을 해석한다는 것은 이미 해석이 아니라, 이미 시작부터 짜맞춰져있던 정답을 동어반복하는 꼴에 지나지 않는다. 즉, 답정너다.
실제로 판타지를 나쁜 방법으로 소비하는 이들은, 자기가 아무리 새로운 판타지 콘텐츠를 접한다 하더라도, 이미 그 정답을 관람 전부터 내려놓고 있다. 장르공식에 따라 대충 어떠한 결과가 나올 것이며, 자기는 어떠한 특수효과를 경험하게 될지를 예측의 범주에 놓아 둔다. 마약과 같다.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 아니라, 늘 익숙한 특수효과를 반복적으로 경험하고 싶을 뿐인 것이다.
그 특수효과란 결국 현실이 뽕 맞은 것처럼 자기에게 "아유 대단하네 우리 귀욤둥이 예쁜이, 우쭈쭈." 하며 유난스럽게 건네는 찬사를 통해 생겨날 정서적 고양감이다. 현실이 이것을 해주지 않기에 이 판타지의 소비자들은 늘 욕구불만에 시달리는 것이다.
즉, 현실이 자기처럼 마약을 복용하지 않기에 이들은 화가 나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판타지의 우수성을 열띠게 호소하며, 이 모든 현실이 판타지라는 마약을 복용하는 현실로 바뀌어야 한다는 보급운동을 펼치게 된다.
말했듯이, 병식이 없다.
이렇게 비유해보자.
마약중독자는 마약을 사랑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사랑의 반대말은 바로 고집이다.
모든 중독자는 중독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중독재에 대해 그저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판타지의 나쁜 소비자들은 사실 판타지를 사랑하지 않는다. 판타지를 고집하고 있을 뿐이다.
반대로 판타지를 잘 소비하는 방법이란 결국 판타지를 사랑하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사랑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과의 자기동일시를 해제하는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그것과의 경계를 명확하게 설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경계를 소중하게 존중하는 것이다.
판타지와 현실의 경계가 분명할 때, 그럼으로써 현실의 우리가 판타지와 동일시되지 않을 때, 우리는 정말로 판타지를 사랑할 수 있다.
판타지를 있는 그대로의 판타지로서 사랑할 수 있다.
판타지는 인간이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만든, 또는 자신의 불완전함을 보완하기 위해 만든, 또는 더 완전한 인간이 되는 법을 배우기 위해 만든 소재가 아니다.
판타지는 그냥 심심해서 만든 것이다.
비장한 소재가 결코 아니다. 유난스러워야 할 소재 또한 결코 아니다.
판타지는 언제나 잉여의 것이다. 잉여의 것이니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것이다.
판타지를 소비할수록 마치 좋은 음식을 먹는 것처럼 인간이 심리적으로 더 건강해진다는 주장을 하는 융과 같은 이들이 있다. 실제로 융은 정신병이었다. 현실을 한사코 거부하고자 리얼리스트 중의 리얼리스트였던 프로이트에게 고집을 부리며 정신병에 빠져든 융이 결국 만든 구조는, 여성들을 모성적 대상으로 자기에게 종속시킴으로써 그녀들의 희생 위에서 왕이 되는 일이었다.
판타지를 의식주와 같은 인간의 필수재로 착각하면 이러한 희생이 반드시 유발된다.
필수재가 될수록 판타지는 점점 더 무거워지며, 그 고집의 무게가 더해가기 때문이다. 경계가 없어서 무게도 그 끝을 모르고 한없이 무거워지게 된다. 그러니 자기 대신에 그 무게를 버텨줄 누군가가 필요해지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것, 그것은 바로 환상의 무게다. 판타지의 무게다.
그러니 애초 판타지라고 하는 것은 들어올려 선전해야 할 깃발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 자리에 둔 채 감상해야 할 것이다. 들꽃처럼.
들꽃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잉여재이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현실에 무용하기에 그 자리에서 아름다움을 빛내며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현실에 유용한 판타지? 현실을 더 좋게 만드는 양분이 되는 판타지?
꿈 깨자.
현실에 무용한 잉여재일수록 판타지는 판타지로서 가장 아름다워진다.
무용하다는 것은 동시에 무해하다는 것이다.
현실에 무용한 판타지는 누구도 착취하거나 남용하지 않는다. 역으로, 판타지의 나쁜 소비방법에 의해 착취되고 남용된 이들이 잠깐 쉴 수 있도록 무해한 그 아름다움을 전할 뿐이다. 이것이 아름다운 무용성의 판타지, 곧 있는 그대로의 판타지가 하는 일이다.
이처럼 판타지 그 자체에 아무 것도 더하지 않고 그저 아름다운 잉여재로서의 판타지를 사랑하는 일, 그렇게 있는 그대로의 판타지를 사랑하는 일, 이것이 판타지를 잘 소비하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