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이루는 법에 대하여"
'나는 크리슈나무르티가 되고 싶다.'
자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아가 이러한 생각을 하는 동안에는, 시야는 크리슈나무르티에 고정되어 좁아진다. 크리슈나무르티만이 세상의 중심이 되어버린다. 사람들이 자기를 "어머, 크리슈나무르티 같으시네요."라고 인정하도록 하는 데만, 또는 크리슈나무르티 자신이 "그래 이제는 자네가 나보다 더 나답구먼 그래."라고 승인하도록 하는 데만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자아가 노력을 기울이는 그 핵심은 바로 모방이다. 자아는 크리슈나무르티를 스토킹하며, 그의 말투와, 문체와, 언어습관과, 행동패턴과, 그가 읽는 책과, 그의 옷차림과, 그의 머리색깔을 모방한다.
크리슈나무르티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얻어 그 정보대로 자신을 재구성해나가면 결국 자기도 크리슈나무르티와 같아질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무슨 매트릭스 영화에서 해당 정보가 프로그램으로 입력되면 바로 그 특성을 갖게 되는 모습처럼, 자기가 모방하는 것과 같아지는 일에는 동일한 정보가 가장 중요한 소재라고 자아는 생각한다.
이를 더 쉽게 묘사하자면, 최고의 요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해당 요리의 레시피가 있으면 된다고 하는 것이다. 일정 정도의 시행착오만 겪으며 숙련도를 쌓아가면 레시피를 통해 동일한 정보를 공유하고 있으니 자기 또한 최고의 요리를 만들 수 있게 된다는 논리다.
이 논리는 잘못되었는가? 또는 무용한가?
그렇지 않다. 아주 잘 작동하는 효과적인 논리다. 이 논리를 잘 적용하면 킨포크 화보처럼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할 수 있는 멋진 요리의 그림이 나온다.
그러나 이 방식으로는 크리슈나무르티는 될 수 없다. 이룰 수 없다.
더 근본적인 형태로 질문을 만들어보자.
"모방을 통한 실현은 가능한가?"
이것이 질문이다.
실현(實現)이라는 것은 현실(現實)이 뒤집어진 것이다. 마찬가지로 실현이 뒤집어지면 현실이 된다.
실현과 현실은 이처럼 서로가 서로를 엎는 관계다. 이 전복의 양상으로 지속되는 관계다. 서로 다른 면을 가진 동전이 계속 회전하는 모습을 떠올려볼 수 있다.
이 말은 무엇인가?
실현이라는 개념 속에는 단지 한 번 어떠한 형상을 만들어내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을 지속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실현된 것은 반드시 자신의 현실이 되어야 하며, 그 현실은 다시금 실현을 위해 전복되어야 한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에게 실현된 것으로서 또 자신의 현실인 것으로서 자신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성립된다.
모방으로는 이것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모방에는 지속을 위한 동력이 없기 때문이다.
아주 쉽게, 우리가 모방을 통해 어떠한 것을 이룬 듯한 그림을 떠올려보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잠깐 감격과 환희에 젖었다가 금방 지루해진다. 이제는 다 아는 것 같아 뻔하게 생각되고 흥미가 떨어진다. 그리고는 새롭게 실현할 것이 없나 하며 새로운 소재를 찾아 헤맨다. 만성적인 게임불감증 속에서 새로운 게임을 끝없이 소비하려는 모습과 같다. 멍하니 화면 흐르는 대로 넷플릭스와 유튜브를 보며 앉아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현실을 회피하고 싶은 까닭이다.
현실에서 살고 싶지 않아 현실을 부정하려는 이들이, 실현이라는 이름으로 현실을 떠날 궁리를 한다. 그리고 모방을 통해 어떠한 실현을 하기라도 한 양 모양새를 낸 후에는, 마치 영원히 현실을 떠나도 되는 자격이라도 얻었다는듯이 또아리를 틀고 다 이룬 사람처럼 행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현은 현실에 대한 최종의 만능해법 같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아니라, 다만 과정일 뿐이다.
실현은 현실의 과정이며, 현실은 실현의 과정이다.
무엇인가를 정말로 이루었다는 것은, 이룬 그것을 다시 뒤집어 현실로 살아가는 양상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다.
이것을 쉽게 표현하자면, 실현은 이룬 것을 잃고 또 잊는 과정까지를 포함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다시 또 이룰 수 있으며, 삶이라고 하는 실현과 현실의 순환이 지속될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삶을 이룬 것의 누적으로만 간주할 때, 그럼으로써 결코 잃거나 잊지 않고, 마치 이룬 것만 같은 모든 것을 통합하려고만 할 때, 이것이 현실을 부정하는 삶이 된다. 현실 위에 서있지 않은 삶이다. 망상하는 삶이다. 가장 정확하게는 삶이라고 하는 순환이 완결되지 않았기에, 계속 충족되지 않는 욕구불만으로만 남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욕구불만의 정체는 정말로 살고 있지 않기에 생겨나는 삶에의 좌절이다. 정말로 산다는 것은 현실에서 산다는 것이다. 현실에서 산다는 것은 사실로 산다는 것이다.
특급 요리사처럼 되고 싶어한 이가 레시피를 따라해 스테이크를 멋있게 만들어 사람들의 박수를 받는 것은 좋다. 그러나 그 화려한 갈채의 순간이 지나간 후, 관객이 없는 주방에서 스테이크를 만들며 살 수 있는가? 스테이크를 굽는 일을 지속할 수 있는가?
지속할 수 있다면 실현한 것이다.
반대로,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을 또 다른 소재에 대한 모방을 시작하고 있다면, 무엇을 하든 간에 아직 이룬 것이 아니다.
실현이 현실이 되고, 그 현실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실현한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갖게 된다는 뜻이다.
크리슈나무르티가 사는 그 현실에서 살고 있지 않은 한, 우리는 크리슈나무르티가 결코 될 수 없다.
크리슈나무르티를 실현하고 싶다면, 크리슈나무르티의 특성을 모방해야 할 것이 아니라, 크리슈나무르티가 어떠한 현실에서 살고 있는지를 알고 우리도 그 현실에서 살아야 할 필요가 있다.
크리슈나무르티가 크리슈나무르티라고 하는 고유한 삶으로 감동을 주는 이유는, 그가 삶이라고 하는 실현과 현실의 끝없는 전복의 과정을 성공적으로 지속했기 때문이다. 모든 고유한 삶은, 표현 그대로 그것을 삶으로서 성립시켰기에 삶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다.
그렇다면 크리슈나무르티와 같은 현실에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아가, 현실에서 살며 그것을 뒤집어 실현하고 다시 뒤집어 현실로 지속할 수 있는 그 동력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이다.
그러나 크리슈나무르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크리슈나무르티가 사랑했던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 또한 억지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이제부터 사랑해야지 요이 땅!"하며, 임의적으로 시작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가 어떠한 것처럼 되고 싶다고 할 때, 사랑은 이미 시작되어 있다.
특급 요리사처럼 되고 싶다고 하는 이는, 특급 요리사가 구워내는 그 스테이크에 대한 사랑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보고 따라해서 만들 수 있는 그 스테이크가 아니다. 특급 요리사조차도 아직은 구워내지 못한 가장 완벽한 스테이크의 육질과 향기와 풍미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특급 요리사 역시도 바로 그러한 미지의 스테이크에 대한 사랑으로 현재 스테이크를 굽는 일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 미지의 스테이크란 바로 미지의 자신이다.
크리슈나무르티가 사랑했던 것, 그가 지속적으로 삶의 과정을 통해 향하고자 했던 것도 바로 나다.
크리슈나무르티는 내가 되고 싶었다.
아직 한 번도 드러나지 않은, 살짝 이룬 것처럼 해보았다 하더라도 금방 빠져나가 더 거대한 면모로 자신을 다시 알리는, 바로 그러한 나를 이루고 싶었다.
삶이란 곧 나를 향해 가는 이 지속적 과정이다.
특급 요리사에게는 그 이동수단이 스테이크이고, 조나단 갈매기에게는 비행이며, 크리슈나무르티에게는 마음의 대화인 것뿐이다.
이것은 "자 제가 이런 대단한 것을 알고 있어요, 후후. 박수 부탁합니다."의 길이 아니다. 그 반대로, 아직 모르는 대단한 것을 알고 싶어서 가는 길이다. 자아의 뽐내기 경연대회로 입장하는 길이 아니라, 나를 향해 미지의 현실로 출국하는 길이다.
실현은 왜 하는가?
기존의 현실을 미지의 현실로 뒤집기 위해서다.
현실은 왜 사는가?
기존의 것을 반복하는 실현을 미지의 것을 향한 실현으로 뒤집기 위해서다.
나는 왜 나인가?
사랑하고 있어서다. 자신이 나라고 생각하는 뻔하고 지루한 자아를 뒤집어, 더 사랑할 수 있는 나라고 하는 것을 알기 위해, 그렇게 나의 사랑이 끝없고 영원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무엇을 이룬다는 것은 결국 사랑을 이룬다는 것이며, 그것을 이루는 것 또한 사랑이다.
사랑을 실현하려면, 사랑을 현실로 살면 된다.
즉, 현실을 사랑하면 된다.
모든 것을 실현하는 가장 빠른 길은 현실을 사랑하는 것이다.
현실을 사랑한다는 것은, 현실에 이야기를 입히지 않는 것이다. 사랑은 있는 그대로를 향한 긍정인 까닭이다.
현실을 자꾸 꽃같이 가공하려 하지 말고, 다만 현실을 정성스럽게 대하면 어느덧 현실이 꽃이 된다.
나는 꽃이 되고 싶었는가?
나는 크리슈나무르티가 되고 싶었는가?
아니다.
크리슈나무르티처럼 나를 향해 나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꽃처럼 나를 향해 나부끼고 싶었던 것이다.
크리슈나무르티처럼, 꽃처럼, 현실이 나를 향해 서있었고, 나는 현실을 실현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사랑으로 그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