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명품인 인간의 자기소외가 부른 마음의 짝퉁화"
명품처럼 자유를 꿈꾸던 이는 어떻게 추락했는가? 왜 가짜의 대명사가 되었는가?
이것은 한 개인의 인격과 관련된 것이 아니다. 오늘날의 인간이 어떻게 비루한 모습으로 몰락하게 되는가의 이유를 담고 있는 보편적 현상이다.
지금은 이야기가 과도하게 예찬되고 있는 시대다. 저마다 자기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조바심에 쫓기는 동시에, 한껏 예의를 차린 정치적으로 올바른 모습으로 상대들에게도 "당신의 이야기를 해보세요. 제가 경청하겠습니다."라고 권면하는 식으로, 개체의 이야기를 하는 일이 무슨 절대적 미덕이기라도 한 것처럼 요청된다.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이야기주술 때문이다.
주술이란 '임의적 허구의 양식으로 현실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행위'를 일컫는다.
이야기주술이란 결국 이야기로 현실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실천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주술을 성립시키고자 하는 대전제는 이러하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이 이야기로 되어 있다."
이것은 사실인가?
삶은 정말로 이야기인가, 그렇지 않은가?
이 대답은 어려운 것 같지만 생각보다 간단하다.
삶은 이야기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이야기가 아니다. 이야기처럼 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언어로 사유하기 때문이다. 언어적 문법은 이야기 구조를 갖는다. 그러니 우리에게 사유된 삶은 이야기라고 하는 형틀에 들어와 마치 원래 이야기였던 것처럼 재구성된다. 그러나 언어를 통한 사유구조에 의해 착각이 일어나고 있을 뿐, 삶이 원래 이야기인 것은 아니다.
이를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자아의 입장에서는 삶은 이야기이지만, 존재의 입장에서는 삶은 이야기가 아니라고.
정말 웃기게도 자아는 자기가 삶을 만들고 이끄는 주체라고 생각한다. 삶이 자기 머릿속에서 레고블럭처럼 구성과 해체를 반복할 수 있는 소재인 것 같기 때문이다. 자기가 효과적으로 머리를 굴려 삶에 대한 이야기를 짜내면 삶이 그 방향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유(思惟)로 사유(私有)하고자 하는 행위다.
언어에 대한 착각으로 인해 이러한 일이 생겨난다. 정확히는 언어를 유한한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것으로 오해하는, 언어에 대한 신격화가 이 착각을 발생시킨다.
이 착각에서 시작된 믿음이 강화되어 광신이 되면 그것이 바로 이야기주술이다.
곧, 자아중심주의가 이야기라고 하는 직접적인 주술도구를 남용하는 형태로 드러난 것이 이야기주술이다.
물론 "삶은 이야기다."라고 하는 진술이 타당할 때도 있다. 그것은 맥락상 그러한 진술을 발화하는 이가, 이야기라고 하는 것을 인간이 임의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 운명적 세력으로 묘사할 경우다. 프로이트와 정신역동 계통의 세력들이 보통 이러한 표현을 잘 활용한다. 여기에서 인간의 임무는 자기 머릿속에서 짜낸 이야기로 운명적 이야기를, 무슨 소설 플롯을 갈아 엎듯이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의 운명성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무의식은 언어다."라고 아주 직접적으로 진술한 라캉의 경우에도, 인간이 작가와 같은 이야기의 주체가 되어 자기 생각대로 운명적 이야기를 임의적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망상을 걷어내고, 인간은 끝없이 운명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다소간의 비극성을 드러내기 위해 그러한 진술을 했다.
마치 매트릭스의 네오처럼, 무의식의 언어를 파악하면 해커처럼 이 모든 삶을 편의대로 조종하고 변화시킬 수 있다는 유아적 판타지는 정신분석가들에게 가장 엄격하게 경계되는 것이다.
이와 동일한 의미를 전하기 위해 실존철학 및 실존상담의 입장에서는, 또 선(禪)의 입장에서는 그 표현을 반대로 "삶은 이야기가 아니다."라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이들의 관점에서 삶은 머릿속(mind)에서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한 이야기는 모두 외재적 삶에 대한 모방품일 뿐이다. 진짜 삶은 언어적 생각(mind) 밖에 있기에 결코 통제하거나 조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즉, 삶이라고 하는 것의 불확정성을 말하고자 하려는 그 의도로 발화된다면 "삶은 이야기다"와 "삶은 이야기가 아니다."라는 두 진술은 동시에 성립된다.
반대로, 삶은 언제나 언어적 구조로 통제가능하다는 고집을 부리려는 의도 속에서는 어떠한 진술을 취하든 간에 늘 맹렬한 반론에 부딪히게 된다.
삶을 쉽게 이해하면 무엇인가?
사건들의 연쇄다. 존재사건들이 계속 들이닥치는 것이다.
그 사건들에 담긴 의도가 바로 마음이다. 사건의 뜻이 마음이며, 삶의 뜻이 마음이라고 말해도 좋다.
불교는 이러한 부분에서 언제나 정밀한데, 마음의 핵심은 바로 의도다.
이 의도는, 기독교적 비유로 묘사하자면 언제나 '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지 '나의 뜻'이 아니다. 즉,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나의 책임 또한 아니다. 이 사실을 발견하는 자리에서 인간은 자유로워진다.
기독교에서는 "내 뜻이 아니니 당신의 뜻에 맡기옵니다."라고 통상적으로 말한다. 불교에서는 "마음이 하는 일이다."라고 통상적으로 말한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쪽에서 언어적 간섭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운명적 세력을 운명적 세력으로 온전하게 존중하고 수용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자신을 이야기의 주체로 세우고 싶어하는 자아는 언제나 자기가 모든 것을 통제하려고 한다. 겸손한 척 표현들은 동일하게 할지라도, 그 실질적인 내용은 마음이라고 하는 운명적 세력에 대한 불신을 담고 있다. 자기가 똑바로 보지 않으면, 언어로 잘 방향을 잡지 않으면, 마음이 언제라도 자기를 해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담고 있다.
그래서 자아는 이야기주술을 채택한다.
마음 앞에 이야기라고 하는 주술적 방비책을 세우는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코미디가 시작된다. 짭자아의 역사가 시작된다.
이야기주술에 빠진 자아는 이렇게 말한다.
"더 많은 이야기를, 더 좋은 이야기를 수집하고 소비할수록, 더 좋은 마음을 갖게 되며, 더 좋은 내가 된다."
다시 기억해보자.
마음은 오리지널의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는 삶이라고 하는 마음의 흐름을 언어의 한계 속에서 그 일부분만을 포착해 만들어난 하등의 모방품일 뿐이며, 마음의 환원적 대체물일 뿐이다.
곧, 마음은 원본인 명품이고, 이야기는 명품의 짝퉁이다.
이에 따라, 다시 진술해보자.
"더 많은 짝퉁을, 더 좋은 짝퉁을 수집하고 소비할수록, 더 좋은 명품 원본을 갖게 되며, 더 좋은 명품 소비자가 된다."
대체 무슨 말인가?
그냥 정신나간 말이다.
이야기를 통해 마음이 더 건강하고 멋지게 될 수 있다는 말도 한다. 아니 짝퉁을 통해 오리지널의 명품이 대체 뭐가 더 좋아지는가? 짝퉁 제작자들의 노고에 감동받아 샤넬 수석 디자이너가 눈물을 흘리며 "앞으로 더 정진하겠습니다! 싸부님!"이라고 회심이라도 한다는 말인가?
마음이라는 명품이 우리를 좋게 만들어주는 것이지, 우리가 이야기라는 짝퉁으로 마음이라는 명품을 좋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말만 들어도 너무 이상한 표현 아닌가.
이처럼 이야기주술에 빠져 살고 있으면 결국 놀림거리가 된다.
명품 같은 이야기를 많이 소비한다고 명품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짭자아의 현상이 이미 잘 보여주고 있다. 명품 같은 이야기란 것이 바로 짝퉁이기 때문이다.
곧, 사이비다. 사이비의 정의는 '진짜와 비슷하게 보임으로써 진짜인 척하는 것'이다.
이야기주술은 이 사이비로 직행하는 길이다.
그렇다면 사이비는 나쁜 것인가?
1차적으로는 나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이 고통이 이내 타인에게 제공되는 고통으로 확장된다. 그래서 2차적으로는 나쁜 것이 된다.
이렇게 이해해볼 수 있다.
"좋은 이야기를 많이 소비하면 좋은 마음이 되고 좋은 인간이 되며 좋은 내가 된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형태의 진술이지 않은가?
바른생활과 도덕, 그리고 윤리 교과서를 지배하고 있는 유교의 실천강령이다. 소위 유교주의적 사유를 하는 인문학 무당들 또한 같은 말을 한다.
유교는 일종의 행동주의 심리학이다.
인간은 처벌과 보상에 따른 학습기제, 그중에서도 모델링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결국 그 핵심은 모방이다.
유교에 있어서 좋은 인간이 된다는 것은 이상적 모델에 대한 모방을 잘 해서 얻게 되는 성취다.
이러한 차원에서 유교는 사이비심리학인 NLP와 대단히 유사하다. 실제로도 NLP를 좋아하는 이들이 유교주의적 속성을 갖고 있고, 유교주의적 속성을 가진 이들이 쉬이 NLP에 매료된다.
즉, 유교는 사실 최면과 세뇌의 접근이다.
최면과 세뇌라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을 특정한 거푸집의 형상에 넣고 임의로 주조하려는 것이다.
"좋은 거푸집에 넣으면 좋은 사람이 나온다." 이 말은 "좋은 이야기를 소비하면 좋은 사람이 된다."라는 말과 완벽하게 동일한 말이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짝퉁이 되면 결국 좋은 명품이 된다."
헛소리 중의 헛소리다.
짝퉁은 결코 오리지널의 명품이 될 수 없으며, 즉 이야기는 아무리 해도 오리지널의 마음과 같을 수 없다.
오리지널의 마음은 존재로부터 나온 것이며, 마음의 모방품인 이야기는 개체의 왜소한 언어활동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애초 그 출처가 다르다.
이처럼 애초 될 수 없는 것을, 완벽하게 불가능한 것을, 마치 가능하다고 믿으며 실천하고 있는 이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괴롭지 않겠는가? 억지로 자신을 거푸집 속에 늘 밀어 넣어야 하는 일이 고통스럽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러한 이가 자기 몸에 맞지도 않는 짝퉁 청바지에 억지로 다리를 끼워넣고 상쾌한 척 웃으며 후보정을 한 뒤에 SNS에 업로드한 사진을 보며, "와, 저 명품 청바지 너무 멋있다. 다리도 되게 기시네. 나도 저렇게 입고 싶다. 저 명품 청바지 사고 싶다."라며 다른 이들 또한 동일한 짭자아의 길을 가고자 할 때, 이것이 고통의 양산이 아니면 다른 무엇이겠는가?
물론 이미 이야기주술을 사용할 의도를 내고 있는 이가 마찬가지로 이야기주술을 성공적으로 사용해내고 있는 것만 같은 이에게 끌린다. 이것은 분명 쌍방과실이다. 그러나 쌍방과실이라고 하는 것은 이쪽에는 책임이 없는 것인가? 사기를 당한 이가 잘못이지, 사기친 이는 무오한 것인가?
"사기인 줄 몰랐어요. 저도 제 자신에게 속았던 거예요."
걸작인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에서의 임병석의 그 외침은 분명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나 임병석은 이야기를 주술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더 순수한 신앙이었다. 이야기가 도구가 아니라 신앙의 대상이었다는 말이다.
반면 이야기주술을 사용하는 이는 이야기를 신격화하는 동시에, 그 신격화된 도구를 마치 마술지팡이처럼 활용할 수 있는 자신 또한 신격화시킨다. 그러니 자신에게 속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알고 하는 일이다.
무엇을 아는가?
이야기가 사실은 마음의 짝퉁이라는 것을 안다.
단적으로 말해보자.
좋은 이야기를 많이 소비하면 깨달을 수 있는가? 정말로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선가(禪家)에서 왜 좋은 이야기가 많이 적혀 있는 경전을 굳이 불태우고 불립문자(不立文字)를 말하겠는가.
이야기로는 절대로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존재의 사실 위에 명징하게 선 것이다.
치열한 긴장 속에서 자위를 한 끝에 찾아온 현자타임과 같이 모든 것이 평화롭게 경험되는 이완의 상태가 아니다.
깨달은 이들은 깨닫는 그 순간 실감한다. 자신이 지금 이야기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그리고 그 즉시 알게 된다. 원래 이렇게 당연하게 존재하고 있었는데 그 사실을 망각하고, 이야기를 존재의 대체재처럼 삼아 이야기에 의존해서만 자기가 존재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마음은 언제나 깨닫기를 바란다. 가만히 놓아두면 깨닫는 쪽을 향해 나아간다. 그 뱡항이란 언제나 이야기의 바깥이다.
진짜 오리지널의 명품은 짝퉁의 거푸집 속에 갇혀 있는 것이 너무나 갑갑하고 속상해서 스스로 그 밖을 향하는 법이다. 이와 같다.
그러나 이야기주술의 주체는 이 움직임을 어떻게든 봉쇄하고자 한다.
정말 재미있게도, 명품을 짝퉁 안에 가둔 뒤 오히려 그 짝퉁을 명품가격으로 팔고자 한다.
실제의 명품인 마음은 팔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마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갖고 있는 패시브 스킬이어서다. 즉, 마음은 오리지널의 명품이면서 무료다. 인간이면 당연하게 누구라도 누릴 수 있는 선물이다.
그러니 돈이 되려면, 여타의 상징자본을 갖추려면, 짝퉁을 팔아야 한다.
그래야 불안하지 않다.
이제 우리는 이야기주술이 왜 이렇게 번성하고 있는가의 그 핵심적인 이유에 다가가고 있다.
바로 불안이다.
불안은 마음이, 그리고 마음의 흐름인 삶이 결코 이야기일 수 없는 그 이유이기도 하다.
만약 우리 삶의 모든 것이 진짜로 이야기라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 단지 이야기일 뿐이기 때문이다. 또 이러한 이야기의 함의에 따르면, 이야기는 언제라도 언어에 의해서 통제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우리는 이야기로 죽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죽는다.
왜 죽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죽는지도 모른다. 또 언제 죽는지도 모른다.
죽음은 언제나 가장 정직하다.
삶이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가장 정직하게 드러낸다. 모를 수가 없게끔 분명하게 드러낸다.
이처럼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통제에서 벗어나있기에, 죽음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다. 죽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비로소 운명적 세력 앞에 겸허해질 수 있다. 거짓된 책임을 벗고, "저는 삶을 책임질 수 없습니다."라고 하는 유한자의 고백을 이룰 수 있다. 그리고 그 고백이야말로 진짜 책임이다. 유한자에게는 유한자가 되는 책임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감수성은 그대로 자유에 대한 감수성이 된다.
유한해서 자유롭다.
기독교적 비유로 다시 말하자면, 인간이 유한하기 때문에, 인간이 책임질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책임져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책임져주신다는 그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 그렇게 자기를 유한자로 명확하게 자각하는 일이, 다시 한 번 인간이 떠맡아야 할 유일한 책임이다.
유한자로서의 그 책임만 다하면, 인간은 허락된 시간 안에서 무한히 자유롭다.
더는 자기 존재를 자기가 떠맡는다고 하는, 마치 개미가 하늘을 책임진다고 하는 어리석은 일에 한평생의 영혼을 갈아넣지 않아도 되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야기주술은 바로 그러한 방향성을 갖는다.
이야기주술에 가정되어 있는 숨겨진 전제는 "내[자아]가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이다. 그래서 이야기주술을 사용하는 주체는 근본적으로 오만하다. 원래 불신은 오만을 낳는다. 루시퍼의 비유다.
그래서 이 또한 코미디다.
짝퉁이 짝퉁인데다가 오만하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대체 이 짝퉁의 존재가치는 무엇인가?
더 근본적으로, 우리는 대체 왜 이러한 짝퉁으로 살아야 하는가?
다시 비유적으로, 우리는 왜 하나님이 허락하신 오리지널의 명품으로 살지 않고, 구태여 고집을 부리며 짝퉁으로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존재다.
태어났을 때부터 당연하게 명품인 존재다.
인간은 존재명품이다.
이야기가 아니다.
존재는 단 1mg도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존재는 단 1mm도 짝퉁으로 만들어져 있지 않다.
비유적으로, 하나님을 바보로 봐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야기가 없으면 존재가 미완이기라도 한 것처럼, 이야기를 통해 인간이 더 좋은 존재가 될 수 있다니, 대체 얼마나 더 하나님을 우습게 보고 싶은가?
마치 3살 아이가 루이뷔통 가방에 크레파스로 색칠하며 "이제야 예뻐졌네."라고 하는 꼴이다. (물론 이것은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 또 다른 의미로 너무 멋진 예술이다. 조악한 비유의 한계다.)
이 이야기주술의 횡포는 상담현장에서도 드러난다.
심리상담은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줌으로써 상대의 인격을 더 높은 차원으로 성장시켜주는 활동이 아니다. 그것은 교육학의 일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굴절된 전제에 입각해, 상담현장에서 상담자는 이야기주술을 사용하는 스승의 입장으로, 또 내담자는 그러한 스승을 소비하며 인격도야를 꿈꾸는 무슨 서당학동 같은 입장으로 앉아 활동을 전개한다. 상담자에게도 내담자에게도 이 이야기 속 등장인물 같은 역할이 이야기주술에 의해 강요된다.
이것은 상담인가?
최면이며 세뇌다. 잘 말해줘야 코칭이다.
이런 활동을 하는 이가 상담자인가? 이것은 상담자로서의 경력인가?
만약 그렇다면 군대의 행정보급관이 40년 넘는 경력을 가진 최고의 상담전문가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상담의 정의(定義)가 헷갈릴 때, 상담자들이 돌아갈 수 있는 지점은 바로 칼 로저스다. 로저스가 심리상담이라고 하는 활동을 최면이나 세뇌, 모델링 같은 여타의 활동들과 변별짓기 위해 이룬 큰 노력의 성과들이 결국 그를 상담자 중의 상담자라고 불리게 만들었다.
로저스에게 있어 상담의 핵심은, 자아의 자서전 같은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이 아니다.
로저스는 결코 "이제 당당하게 고유한 너의 이야기를 해봐."라며 자아중심주의를 더 키우지 않았다.
상담시간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내담자를 로저스가 성공적으로 상담한 사례는 유명하다. 그 장면에서 로저스는 대체 무엇을 했던 것인가?
바로 내담자의 존재를 만나고 있었다.
내담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담자의 존재를 만나는 것, 이것이 바로 상담이다.
내담자의 존재는 언제나 내담자의 이야기 밖에서 발견된다.
존재의 속성은 언제나 탈서사성인 까닭이다.
이것을 쉽게 말하자면 이러하다.
그가 어떠한 사람이고, 무엇을 하고 산 사람인지, 그 모든 서사적 이야기와 무관하게 그 존재는 온전하다는 사실을 상담자는 상담장면에서 느끼고 체험하며, 그렇게 발견된 그 존재의 사실을 내담자에게 피드백하는 것이다.
로저스는 그의 말년에 자신을 실존상담자라고 불러달라고 말하곤 했다.
실존상담에서는 이러한 관점이 더 명백하다.
자아의 이야기를 듣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시간은 내담자에게나 상담자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곧 인생이다. 이야기로 인생을 낭비하는 일은 실존상담의 입장에서 너무 속상한 일이다.
그렇다고 내담자의 말을 막은 뒤 상담자가 제공하는 더 좋은 대안적 이야기를 내담자에게 주입시키는 활동이라는 것이 아니다. 실존상담은 그 어떤 접근보다도 경청하는 접근이다. 그러나 자아의 이야기가 아니라, 존재의 느낌을 경청한다. 마치 숲속에서 오감을 섬세하게 하여 숲을 총체적으로 느끼듯이, 내담자의 존재가 발화하는 느낌을 따라 그 존재로 다가가는 길을 한 발 한 발 내딛는다.
그렇게 상담자와 내담자에게 존재가 함께 만나졌을 때 내담자의 보고는 대개 이러하다.
"ㅋㅋㅋㅋㅋ"
지금까지 자신의 존재가 갇혀 있던 그 이야기가 코미디라는 것을 알아본 까닭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존재가 이야기 속에 갇혀 있었다는 것이 애초 말도 되지 않는 코미디라는 것을 실감한 까닭이다.
여기에 대안적 이야기는 없다. 더 좋은 이야기는 없다. 내담자는 나쁜 이야기를 좋은 이야기로 바꾸어, 그 좋은 이야기와 자기를 이제 새롭게 동일시하고 있는 중이 아니다. 즉, 새로운 자아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자아의 이야기를 떠난 것이다.
자아의 이야기를 떠나 존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체험을 한 것이다.
이야기주술이 무너진 순간이다.
물론 이것은 상담자의 능력으로 인한 성공이 아니다. 내담자 자신이 이야기 밖으로 나가 자신의 존재를 회복하고 싶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던 현실이다. 상담자가 아무리 유능하게 촉진한다 하더라도, 내담자 자신이 이야기를 벗어나고자 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일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최면이나 세뇌 계통에 있는 이들이 하는 말은 이와는 반대다.
"어떤 피험자라도 나는 다 최면을 걸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또한 정신나간 말이다.
자신이 만들어낸 이야기를 주술적 도구로 활용하여 모든 존재에게 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그저 유아적 전능감에 사로잡힌 자아나 할 법한 말이다.
당신이 뭔데 감히 그런 비판을 하냐고 말한다면, 최소한의 권위를 활용해, 사이비심리학에 한 번도 물든 적 없이 심리상담의 외길 인생이었으며, 상담심리학의 교수이자, 국내에 몇 없는 슈퍼비전이 가능한 실존상담의 전문가로서 말한다고 대답할 수 있다.
그리고 만약 이 대답이 유용하다면, 이것이 바로 이야기주술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표본이 된다.
교수, 슈퍼비전, 전문가, 이 얼마나 명품 같은 언어들인가? 그 언어들이 또 얼마나 장구한 개체의 이야기들이 담겨 있을 것 같은 감각을 환기시키는가?
그러나 다 짝퉁들이다.
나라고 하는 존재는 이 언어들과 사실 아무 상관이 없다.
이러한 언어들이 없으면 나는 불안한가?
이에 대해 더 정확한 질문의 방식은 이러하다.
이러한 언어들이 있으면 나는 죽지 않는가?
너무 쉽게 알 수 있다.
나의 삶과 죽음은 이 언어들에 달려 있지 않다. 존재는 언어가 만드는 이야기와 아무 상관이 없다.
물론 하이데거는 잘 알려진 표현으로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의미하는 언어는 이야기주술의 용법을 가진 도구적 언어가 아니다. 시적 언어다. 이러한 언어의 활용법을 하이데거는 "존재의 참말을 하는 것."이라고 묘사한다.
이것은 존재를 상기하고, 자각하고, 증언하는 말을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야기에 갇혀 자신의 존재를 망각한 인간이 결국 자기소외에 빠져있을 때, 그 소외를 회복하는 존재의 말을 하는 것이다. 존재를 부르는 말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을 담은 말을 하는 것'
존재명품인 인간이 명품으로 자신을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결국 명품인 마음을 회복하는 일이다. 마음이 있기에 인간은 존재명품이 될 수 있는 까닭이다.
마음이 감지하는 정직한 사실을 담아 말하면 마음은 바로 명품으로 회복된다. 사실은 이야기 밖에 있는 것이며, 사실을 말하는 마음도 그 즉시 바로 이야기 밖에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야기라는 마음의 짝퉁화를 기획하는 짝퉁공장에서 마음이 탈주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행선지가 대체 어디일지 모르겠다고, 편집작가가 불안해한다.
그러나 우리는 설렌다.
마음이 이제 우리 자신에게 돌아오고 있는 바로 그 순간이기 때문이다.
짭을 벗고, 맨발로 달려오는 그 모습이 선하다.
빨리 보고 싶어서.
그저 자유로워서.
존재명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