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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연인이 되어보자 #1

"미저리의 그녀, 이야기"

by 깨닫는마음씨



"너의 이야기를 해봐!"의 목소리가 창궐하는 시대에 이야기의 역기능적 실체를 드러내는 글을 계속 쓰게 되는 것은 상담자로서 당연하다.


이야기가 강조될수록 우리는 마음을 정말로 알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개체에서 개인이 되는 실존적 과정에서 마음을 아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 우리가 대체불가능한 행복을 얻게 될 그 중요한 일을 성큼 가로막고 훼방을 놓는 것이 바로 이야기다. 이야기는 마치 영화 <미저리>에 나오는 그녀와 같다.


우선적으로 마음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마음과 먼저 친구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마음의 뜻을 점점 친밀하게 느끼는 만큼, 나아가 우리는 마음과 연인이 될 수 있게 된다.


마음의 연인이 되면, 마음을 정말로 잘 알게 된다. 당연하다. 연인이 된 우리에게 마음이 스스로를 다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음의 연인이 되고자 일단은 친구가 되는 일부터 시작해보려는 우리는 결국 마음을 만나러 가야 한다. 그곳이 카페이든, 공원이든, 음식점이든, 작은 다락방이든, 물레방앗간이든 간에, 우리에게는 마음을 만날 공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가 마음을 만나러 이동할 때, 반드시 우리를 따라오려고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이야기다.


이야기는 눈치도 없이, 마음과 데이트를 하러 가는 우리를 계속 따라붙는다. 그러면서 이야기 자신이 마음을 제일 잘 안다며, 자기를 통해 마음에 대한 모든 정보를 다 알 수 있을 것이라며, 있는 그대로의 마음과 우리가 만나지 못하도록 자꾸 훼방을 놓는다.


왜 그러는 것일까?


이야기는 질투가 많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모두 자기만을 봐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든 이야기의 속성은 더 많은 이들에게 읽히는 것이다. 관심종자 연예인의 속성이다.


인기를 끌어 모아서 이야기는 가장 높은 옥좌에 올라 왕이 되고 싶어한다. 모두가 자기에게만 시선을 고정시키도록 조장하여 다른 데로 눈을 돌리지 못하게끔 한다. 자기가 이 세상에서 제일 독점적인 것이 되어야 만족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야기가 독재하는 방식이다.


이야기가 정말로 이렇게 작동한다는 사실은, 떠올려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무협지나 미국드라마, 유튜브 시리즈물 같은 것을 보기 시작하면 우리는 왠지 모르게 끝까지 보게 된다. 그래야 할 것 같은 압박 내지 조바심을 경험한다. 딱히 그 내용이 재미있어서가 아니다. 그저 이왕 보게 되었으니 그 결말은 알아야 할 것만 같다. 마치 주식에서 손절을 못하는 심리와 같다.


이야기라고 하는 구조가 원래 인간의 욕망을 인위적으로 자극해 계속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방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자극되는 것은, 아직 모르는 중요한 정보를 취득해야 한다는 욕망이다. 그런데 이 욕망이 자극됨으로써 이상한 일이 생겨난다.


실제로는 전혀 중요한 정보가 아닌데도, 이미 짜여진 결말을 그저 의도적으로 보여주지만 않을 뿐인 이야기의 문법 구조 속에서 독자는 지금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의 그 상황을 자기만 모르고 있는 것 같은 혼란감에 빠지게 된다. 그럼으로써 역으로 이야기의 결말에 대단히 중요한 정보가 담겨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을 갖게 되며, 그 결과 이야기의 소비를 맹목적으로 추구하게 된다.


사실 좀 질이 나쁘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자원착취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자원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 바로 인간의 시간을 착취하고자 하는 구조다.


누구에게도 대체불가능하고 회복불가능한 그 하나뿐인 자원을 착취하는 구조다. <모모>에서의 회색사나이들이 작동시키고 있는 구조와 같다.


착취해야 돈이 된다.


디즈니니, 마블이니, 넷플릭스니, 다 돈을 벌기 위해 이야기를 만드는 주체들이지, 그들이 만드는 이야기에 인간에게 정말로 중요한 정보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솔직하게 생존을 위해 이러한 방식으로 돈을 벌어야 한다고 주장하면 그에 대해 달리 할 말은 없다. 생존이라고 하는 것에 엄청 많이 쫄아있구나, 라고 이해할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경우를 떠올려보자.


"아니 이게 뭐가 나빠?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감동과 중요한 정보도 주면서, 그에 대한 교환가치로서 돈을 버는 일인데, 이게 뭐가 나쁜 거야? 내가 사랑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것뿐인데."


말은 다 맞지만, 사실은 아니다.


애초에 자기가 돈을 버는 것이, 그 모든 말에 앞서는 절대적이며 유일한 목적인 까닭이다. 사람들을 위하는 척하지만, 돈을 벌려고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지,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는, 놀랍게도, 이야기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다.


역으로 물어보자.


평생 돈을 벌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야기를 그렇게 보급할 것인가?


그 정도로, '정말로' 이야기를 사랑하는가?


작가와 장사꾼의 경계는 여기에서 명확하게 나뉜다.


이것은 순수문학과 작가정신에 대한 예찬이 아니며, 대중문학과 통속작가에 대한 폄하가 아니다.


자신에게 있어서, 이야기라고 하는 것이 사랑의 상대인가, 도구적 대상인가에 대한 그 근본적 물음일 뿐이다.


"사랑하면서 도구도 될 수 있는 거 아니야?"


이러한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 발화자가 사랑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다는 반증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사랑은, 사랑해야만 하는 윤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잘못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을 모른다는 것이 하등한 존재로서의 증명도 아니다.


이 논의는 이 지점에서 끝이다.


'사랑을 모르는구나.'가, 미로를 헤매던 이가 막다른 길의 벽 앞에서 알게 되는 진짜로 '중요한 정보'일 따름이다.


그러나 우리는 조금 다르다.


우리는 사랑을 하고 싶다. 사랑하고 싶다는 소망이 있다.


그래서 마음을 만나러 나가고자 한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막다른 길에 도달한, 사랑을 모르는 이야기꾼들은 물귀신이 되기 때문이다. 자기는 사랑을 모르는데, 왠지 사랑은 좋은 것처럼 생각되는데, 자기만 남겨둔 채 사람들이 그 사랑을 얻으러 나가는 일이 불만스럽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야기꾼들은 더 많은 이야기를 펼쳐냄으로써 사람들이 막다른 길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만든다. 더 많은 이야기 속에 우리가 알아야 할 더 많은 중요정보가 있다면서, 이야기를 계속 우리의 눈앞에 흘려넣으려고 한다.


그렇게 이야기는 이야기 자신에게 영원히 우리를 종속시키고자 한다.


질투에 눈이 멀어, 우리의 눈도 멀게 하려는 것이다.


질투는 언제나 사랑에 대한 것이다.


자신은 사랑받지 못하니, 남들도 사랑받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질투의 움직임이다. 그러니 질투는 늘 상대를 망치려고 하게 된다. 더 못난 것으로 만들고, 그 온전성을 훼손하려고 하게 된다.


마음과 데이트를 하러 나가는 우리에게 황산을 끼얹으려는 일과 같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못난 너를 마음은 좋아하지 않을 거야. 나는 달라. 이야기는 이렇게 못난 너도 사랑할 거야. 이야기의 사랑은 네가 만나고자 했던 마음보다 더 크고 넓어. 이야기인 내가 진정한 사랑을 너에게 줄게. 못난 너조차도 따뜻하고 상냥하게 품어줄게."


이처럼 질투의 화신인 이야기는, 이제 마음 대신에 자신이 사랑의 주권자처럼 행세하려고 한다.


다시 말하지만, <미저리>의 그녀다.


여기에 사랑은 없다.


여기는 그냥 미로만이 아니라, 미로의 막다른 길이다. 즉, 지금 무엇인가를 찾아 나아가는 중이 아니라, 이미 끝나버린 여정이다. 바로 여기가 막다른 길이며, 여기에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사랑이 없다는 것 외에는 그 어떤 중요한 정보도 없다.


돌아나가야 하고, 빠져나가야 한다.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일이다.


인생에서 무엇인가가 답답하고 힘들게 경험될 때, 즉 인생이 막다른 길이라고 경험될 때, 넷플릭스를 끄고, 유튜브창을 닫고, 판타지 소설을 덮는 일이 우리에게 그렇게 힘든 일일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


단지 단순한 이 행위만으로 우리는 <미저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비참한 우리의 운명에서 일단은 빠져나오는 것이다.


그러면 이내 마음이 찾아온다.


우리가 사랑하고 싶어 마음을 만나러 나가려고 했던 것만이 아니다. 마음도 우리를 만나러 오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눈앞을 흐리고 있는 <미저리>의 이야기가 사라지니, 이미 우리 앞에 가깝게 다가와 있는 마음의 모습을 비로소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명작 <클로저>에 나오는 대사처럼 인사를 건네봐도 좋을 것이다.


"Hello, stranger."


금방 친구가 될 것이다. 머지않아 연인이 될 것이다.


마음도 우리의 연인이 되고 싶었던 까닭이다.


같이 서로를 꿈꾸어온 바다.


이제, 마음의 연인이 되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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