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밤의 침대를 습격하는 불청객, 이야기"
이야기가 마음을 알려준다고 하는 이야기꾼들의 주장이 있다.
세간에 깔리고 깔려 너무 많이 반복된 마음작용에 대해서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러한 마음은 굳이 특정한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표현 그대로, 너무나 많이 시중에서 반복되고 있기에, 그냥 포털사이트 대문에 걸린 아무 기사나 찾아 들어가더라도 그 마음을 알 수 있다.
"추운 겨울이 되어 모두가 강철의 외피를 두르기라도 한 것처럼 차갑고 인색해진 시기에, 가면을 쓰듯 얼굴을 노출하지 않은 익명의 IT기업가가 고아원에 3000개의 내복을 기부했다고 합니다."
아, 훈훈하다, 참 상냥한 마음이구나, 자칫 냉정하게 생각될 수도 있는 저 첨단기술사업의 운영자가 이렇게 가슴이 따뜻한 마음을 드러내다니 참 아름답구나, 라고 마음을 알려주는 이 이야기가 아이언맨의 이야기와 대체 무엇이 다를까?
이에 따라, 이야기를 통해 마음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는 결국 특정한 이야기의 가치에 대해서는 주장할 수 없게 된다. 그 이야기만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통속적인 모든 소재가 다 통속적인 마음을 알려주는 까닭이다.
차라리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를 읽자고 하는 편이 언어영역 점수도 높일 수 있고 더 유익하다.
사실 마음을 아는 일을 이야기에 귀속시키는 것의 문제점은 이 통속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데에 있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마음을 아는 일에 점점 더 무능해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통해 마음을 더 많이 그리고 더 깊이 알 수 있다는 말은, 이야기가 없으면 우리가 마음을 제대로 알 수 없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말이다. 이렇게도 묘사할 수 있다.
"우리는 스스로의 마음을 알 수 없기에, 이야기라고 하는 제3자의 도움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좋아하는 이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는, 제3자가 대신 그 마음을 알려줘야 한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 결과, 우리가 친해지게 되는 것은 마음이 아니라 이야기다. 우리는 마음과 연인이 되고 싶었던 것인데, 어느새 이야기가 대신 우리의 연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누군가와 사귀고 싶은데 혼자서는 친해지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서 계속 다른 이를 만남의 자리에 데리고 나가다보니, 정작 사귀고 싶었던 그 이가 아니라 자기가 늘 동반을 요청한 이와 사귀게 된, 연애관계에서 제법 빈번한 현상이다.
마음과 연인이 되려면 그 어떤 매개없이 마음과 바로 마주해야 한다. 독대해야 한다. 우리와 마음만의 오붓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 마음과의 만남의 자리에 제3자를 늘 동석시키면 결코 우리는 마음과 연인이 될 수 없다.
그렇게 사랑하고 싶은 소망은 좌절되고, 정말로 연인이 되고 싶었던 이와 연인이 되지 못함으로써, 우리에게는 좌절이 생겨난다. 좌절은 언제나 자기불신으로 연결된다. 스스로가 무능력하게 생각되면서 의존성은 높아진다. 마음을 만나지 못한 그 무능감만큼 이야기에 대한 의존이 더욱 강해지는 것이다.
의존의 심화는 중독이다. 이야기가 없으면 우리가 살 수 없을 것처럼 구는 이야기 중독은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생겨난다. 마음에 대한 좌절이 이야기 중독을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 좌절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마음에게 고백을 거절당한 것이 아니라, 이야기에 자신의 사랑을 위탁하고 있었기에, 고백조차 못한 채 끝나버린 사랑이다.
왜냐하면 이야기는 NTR(netorare: 남의 연인을 가로채는 일)의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랑이 성공해서, 우리와 마음이 온전하게 사랑할 수 있도록 이야기는 순순히 협조하지 않는다. 혹시 협조하는 모양새를 취한다면 그것은 이야기가 더 결정적인 승리를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 이야기는 우리와 마음의 순애보를 어떻게든 저질 치정극으로 뒤바꾸려는 계획을 품는다. 왜? 그래야 자극적이어서다. 그리고 그렇게 더욱 자극적으로 된 자기를 우리가 마음 대신에 선택할 것 같기 때문이다. 마음의 연인인 우리를 마음에게서 강탈하려는 이야기의 야심찬 계획이다.
그래서 혹여 마음을 향한 우리의 고백이 이야기를 통해 아주 희박한 가능성으로 성공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첫날밤만은 결코 성공적이지 못하게 된다.
마음과 우리가 첫날밤의 거사를 치르는 그 순간에도 이야기는 침대 위에까지 따라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이야기는 우리를 코칭한다.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하고, 어떠한 동작을 해야 하며, 어떠한 리듬을 타야 하는지, 이야기는 우리가 마음을 만나는 자리에 동석해있던 제3자로서의 코치의 입장을 첫날밤의 침대 위까지 끌고와 반복함으로써, 끝내 우리의 첫날밤을 망치려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신성한 순간, 우리가 우리의 연인과 동침하는 그 순간을, 이야기는 포르노 감독이 되어 가장 모욕하며 짓밟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마음은 바로 사라진다.
마음은 아주 섬세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폭력적으로 대해질 때 마음은 스스로를 은폐한다.
오늘날의 우리가 자신의 마음을 잘 모르게 된 이유가 이것이다.
아주 내밀한 마음과의 만남이 이야기에 의해 늘 이렇게 폭력적으로 방해받았던 까닭이다. 그 결과 마음이 스스로를 숨김으로써 우리는 마음에 대해 점점 더 모르게 된 것이다.
불청객에게 집주인이 쫓겨난 꼴이다.
그 상황 속에서 우리는 불청객에 의해 우리의 연인이 쫓겨나는 모습을 그저 눈뜨고 바라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이야기가 창궐하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가 무능력감을 경험하는 근본적인 이유다.
사랑하는 연인을 지키지 못한 절망의 정조다.
"자 이제 너의 이야기를 해봐!"
이제는 이렇게 듣자.
"자 이제 너와 마음의 첫날밤에 포르노 감독을 침대 위로 초대해봐!"
그리고 이제는 이렇게 하지 말자.
이야기를 해야 한다면, 마음의 이야기를 하자.
마음이 연인이 된 그 사랑이야기를 하자.
침대 위에서 이야기가 마음을 지배하게 놓아둔 그 질척한 치정극 말고, 질척한 좀비같은 이야기를 샷건으로 날려서 어떻게 마음을 지켜냈는가에 대한 그 무용담을 말해보자.
"나는 이야기를 벗어나 마음을 만났다."
"나는 내 사랑을 지켜냈다."
이 둘은 같은 말이다.
이야기를 벗어났다는 것은, 이야기가 우리를 벗어나게 했다는 것이다. 마음과 우리 자신에게만 함께 눕는 것이 허락된 이 성소(聖所)에서 이야기를 쫓아냈다는 것이다.
우리는 더는 무능력하지 않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증명한 것이다.
이미 마음이 너무 멋진 연인으로서 우리를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로 알아본다.
불 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