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라는 이야기의 노예가 연인을 노예로 대한다"
관계를 만족시키기 위해 살지 말고, 마음이 만족하기 위해 살면 된다.
프로이트라면 리비도를 창조적으로 사용하며 살라고 할 것이고, 니체라면 생명력을 다이너마이트처럼 터뜨리며 살라고 할 것이고, 실존상담이라면 존재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살라고 할 것이다.
이것은, 가지지 않은 것을 이야기로 고생스럽게 끌어와 마치 이제는 가진 것처럼 사는 짝퉁 같은 일을 그만 하고, 자기가 정말로 가지고 있는 보물로 살라고 하는 것이다.
다 노예로 살지 말라고 하는 말들이다.
관계의 노예가 되어있을 때 우리는 자신이 가지지 않은 것을 억지로라도 계속 끌어오게 된다. 유일하고 중대한 주인처럼 되어버린 관계를 어떻게든 만족시키기 위해 갖은 노고를 다하는 것이다.
그러나 관계라는 것은 원래 밑빠진 독이다.
관계를 이루는 대상의 욕망이 끝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관계라고 하는 이야기의 욕망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관계는 분명하게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다. 각본으로 구성된 역할극이다. 여기에는 상연의 목적이 있다. 그 목적은 더 많은 관심을 이 이야기 속으로 유입시키기 위해 설정된 것이다.
그런데 이 설정에 절대값이 없다. 관계라고 하는 것이 대상, 즉 관계를 이루는 상대와의 구조 속에서만 성립된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모든 관계란 곧 상대적 관계라는 것 또한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관계의 목표값은 언제나 상대값이다. 늘 변동되며 딱 들어맞는 수치라는 것이 없다. 그저 막연히 "더 크게, 더 많이, 더 세게."라는 추상적 슬로건만 있을 뿐이다.
그러니 만족될 리가 없다.
아무리 많아도, 심지어 우주를 다 제공한다고 해도, 절대값이 아니기 때문에 뭔가 찝찝한 기색으로 관계는 말한다.
"뭔가, 음, 조금 부족한 듯도 하고, 잘 모르겠네, 물론 너도 최선을 다한 건 아는데, 그래도 내 자신에게 정직하자면, 확실히, 아니 확실하지는 않고, 뭔가 미묘하게 좀 아닌 듯한데, 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근데 이건 좀 아주 딱 맞는 건 아닌 것 같애, 미안,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근데 지금 이대로는 아닌 것 같아, 뭔가 더 새로운 거 없을까, 더 진정한 어떤 걸 찾아야 할 것 같은데, 음......."
대체로 관계란 이런 이야기다.
때문에 관계는 절대로 만족되지 않으며, 관계를 만족시키는 일 또한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를 왜 하고 있는가?
이야기의 소비와 같다. 관계를 소비함으로써 우리는 모종의 특수효과를 얻게 된다. 성취감, 충만감, 자신감, 고양감, 안정감 등, 관계를 잘해나간 결과로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것들이다.
곧, 우리는 관계의 성공적인 보상으로 이러한 마음을 얻고자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분명하다. 관계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이유는 다양한 차원의 보상이 있을 것이라고 가정되기 때문이다. 보상이 없다면 관계도 없다.
그런데 그 보상의 핵심이 결국 마음이라고 한다면, 왜 마음을 바로 얻는 길로는 가지 않을까?
더 빨리 얻을 수 있는데다가, 환원되지 않은 온전한 크기 그대로 얻을 수 있기까지 한다면, 굳이 관계라고 하는 이야기를 경유해 얻을 이유가 없지 않을까?
여기에는 유서깊은 저주의 문제가 있다.
인류사에서 워낙 긴 시간을 대다수의 사람들이, 비유가 아닌 문자 그대로의 노예로 살다보니, 자기가 더 많은 노력을 들여 더 나쁜 것을 얻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는 바로 그 노예의 이야기에 최면되어 있는 까닭이다.
그러니 더 빨리 얻고, 더 쉽게 얻으며, 더 좋은 것을 얻는 길은 차마 자기가 가서는 안 될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자신이 충분히 성공해서 정당한 비용을 지불하고 양반족보를 산 후에야 당당하게 펼칠 수 있는 일이라고 간주한다.
그리고 이러한 노예의 성공의 기준이 바로 관계인 것이다.
주인에게 충성하는 것이 관계의 원형이다. 이 관계의 역할을 성실히 잘 수행하는 만큼 노예는 미래에 자기 또한 주인의 입장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왜? 주인이 그렇게 약속했기 때문이다.
"네가 30년간 머슴일을 열심히 하면, 내 너를 위해 전답도 떼어주고 노비 신분에서도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겠느니라. 껄껄껄."
물론 영원히 지켜지지 않을 약속이다. 원래의 주인이 죽은 뒤 그 주인자리를 이어받은 아들이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허허, 이 사람아, 그건 우리 아버님과의 약조이지, 나와 한 약조가 아니지 않는가. 나는 그 약조에 대해서는 안타깝게도 들은 바가 없네. 그러나 자네가 지금껏 우리을 위해 일한 충정을 보아해서 앞으로 10년간 열심히 일을 해주면 내 자네를 노비 신분에서 풀어줄 것이라고 단단히 약속함세."
그리고 노비도 머지않아, 그 약속이 이행되는 순간을 보지 못한 채 죽게 될 것이다.
이것이 관계를 통한 성공을 꿈꾸는 그 모든 신화의 실체다. 관계에 대한 배신과 복수로 점철된 조폭영화들은 이러한 관계의 허상성을 잘 보여주는 한 단상이다.
모든 관계는 이야기이며, 모든 이야기는 주인과 노예의 이야기다. 주인과 주인 또는 노예와 노예의 이야기란 없다. 그것은 이야기로 성립되지 않는다. 이야기는 언제나 상하의 차이, 좌우의 차이, 계급의 차이, 연령의 차이, 성별의 차이 등과 같은 그 모든 대립요소들이 있어야 성립될 수 있다.
이야기의 핵심이 바로 갈등인 까닭이다. 갈등이 없으면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처럼 갈등에 근거해서만 이야기로 성립될 수 있는 그 모든 이야기는, 결국 앞서 말한 것처럼 주인과 노예의 이야기라고 상징적으로 말할 수 있다.
주인과 노예의 이야기는 대체 어떻게 하면 만족이 될 수 있을까?
현 상태면? 노예가 불만족스럽다.
주인과 노예의 입장이 바뀌거나 둘 다 주인이 되면? 원래 주인이었던 이가 불만족스럽다.
둘 다 노예가 되면? 둘 다 불만족스럽다.
그러니 이 주인과 노예의 이야기를 그 핵심으로 갖고 있는 관계라는 것이 결코 만족되지 않는 성질을 갖는 것이다.
이야기에 충실하고, 관계에 충실함으로써, 언젠가는 만족스러운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이 오래된 착각을 그만 포기해야 한다.
바로 가야 한다.
마음을 향해 바로 가야 한다.
그것은 이런저런 자격을 갖춘 뒤에야, 연인을 향해 고백하러 갈 수 있다는 착각을 버리는 일이다. 그래야 연인이 한석봉네 어머니처럼 "그래 네가 이제는 올바른 자격을 갖추어 돌아왔구나, 장하다."라며 자기를 받아줄 것이라는 착각을 버리는 일이다.
김중배의 이야기 속에서야 그럴지 모르겠지만, 이야기 밖에 있는 마음이라고 하는 연인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
물론 마음에게도 조건은 있다. 그 조건은 단 하나다.
'관계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을 만나줄 것'
조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당연한 일일 뿐이다.
마음을 얻고 싶은데, 왜 다른 것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있는가? 또한 노예가 주인을 사랑해 헌신한 그 보상으로 마음을 얻게 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마음을 노예 이하의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기가 가장 얻고 싶은 것을 그렇게 하대하면서 얻으려 하니 얻어질 리가 만무하다.
하대도 상대하는 것이다. 상대값이다.
그러나 가장 얻고 싶은 것의 의미는 그것이 절대값이라는 것이다.
마음이 우리에게는 절대값이다.
그것만을 빠르게, 직접적으로, 정확하게 향하면 된다.
우리는 관계를 만족시키기 위해 정욕을 흩뿌리고, 관계를 만족시키기 위해 살며, 관계를 만족시키기 위해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마음이 만족하기 위해 정성을 다하고, 마음이 만족하기 위해 살며, 마음이 만족하기 위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다 연인을 위해 우리가 자연스럽게 하고 있는 일들 아닌가.
우리의 연인이 관계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만 이해하면, 다 마음을 향해 정확한 방향성을 갖게 되는 일들이다. 어렵게 새로운 것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향성만이 필요할 뿐이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방향성 속에 "마음이 만족하기 위한 방법으로 나는 관계의 이야기를 채택하고 있다."라는 말이 포함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시 말해서 "마숙이를 사랑하기 위한 방법으로 나는 관순이를 사랑하고 있다."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마음이 마숙이가 되어 관순이와 동급의 저울에 올라있기 때문이다. 즉, 마음이 관계라는 이야기의 상대적 차원으로 똑같이 환원되었기 때문이다.
마음의 절대값이 상실되면, 연인도 상실된다.
마음은 관계의 이야기에 종속된 노예의 또 다른 노예가 될 뿐이다.
이러한 노예의 특성은 마음을 자기 밑의 소재로 놓음으로써 자기를 주인처럼 행세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계급은 상층부부터 관계의 이야기, 이야기의 노예이자 마음의 주인, 마음으로 서열화된다.
"허허, 자네 이제야 사람 되었구먼." 이야기를 만들어낸 주인이 기특하다고 웃고 있을 일이다. 자발적 노예화는 모든 주인이 꿈꾸는 이상적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음은 가장 슬퍼할 현실이다.
관계의 이야기는 오래된 저주라 세력이 강하다. 벗어난 듯 싶어도 도돌이표도 자주 찍는다.
그러니 마음이라고 하는 연인이 괜히 슬프지 않도록만 우선 해보자.
슬플 때, 슬픈 영화를 보고, 슬픈 노래를 들으며, 슬픈 이야기의 소비로 레몬즙을 짜내는 기구처럼 슬픔을 쥐어 짜내려고 그러지 말고, 그렇게 무엇인가를 쥐어 짜는 분주한 노예의 활동 속에서 마음을 노예처럼 쥐어 짜지 말고, 가만히 좀 있어보자.
그러면 사실 슬프지 않다. 괜히 슬프지 않다.
마음이 자기를 괜히 슬프지 않게 하려고 옆에 있는 우리를 이미 알아봤기 때문이다.
주인도 노예도 아닌, 바로 마음의 연인을 알아봤기 때문이다.
나오는 눈물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재회의 눈물이다.
마음이 다시 만난 것만으로 벌써 만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