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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감정과 가짜 감정을 어떻게 구분하죠?

"봄바람이 부나요?"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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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매번 같은 상황을 경험하고 그 안에서 같은 감정을 경험할까?"


이것은 아주 훌륭한 물음입니다.


이러한 물음이 생겨났을 때는, 반복되는 상황과 그에 수반된 감정이 어쩌면 진짜가 아닐 수 있다는 신성한 의심이 고개를 들고 있는 것입니다.


진짜 감정과 가짜 감정을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중요합니다. 가짜 감정을 반복적으로 소비하는 일은 우리의 인생을 좀먹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남이 만든 연극의 시나리오에 늘 끌려 다니며, 원하지 않는 배역을 떠맡아야 하는 일과 같습니다. 이러한 일들만 우리의 삶에서 반복된다면 우리는 피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핵심은 반복입니다.


차라리 반복되는 것은 다 가짜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그리고 반복되는 모든 것은 다 이야기입니다. 반복은 이야기의 핵심속성입니다.


때문에 반복되는 그 어떤 이야기도 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진짜인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가짜의 이야기들입니다.


그렇다고 진짜인 나의 이야기가 따로 있어서 그것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 단순합니다. 가짜의 이야기들과, 이야기가 아닌 진짜의 내가 있는 것뿐입니다.


결국 가짜 감정이란 가짜의 이야기들이 만들어내는 것이고, 진짜 감정이란 진짜인 내가 느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로미오와 줄리엣의 연극 속에서 로미오 역을 맡은 이가 사랑의 감정을 경험한다고 해서 그것이 그 배우의 진짜 감정은 아닙니다. 이러한 일들은 또한 상담현장에서도 일어납니다. 내담자의 이야기를 듣던 상담자가 내담자에게 사랑의 감정을 경험한다고 해서 그것이 상담자의 역할을 하는 이의 진짜 감정은 아닙니다. 그래서 심리상담자가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은 내담자의 이야기가 유발하는 감정에 휩쓸려 그것을 자기 감정으로 착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야기는 언제나 특수효과를 만들어냅니다. 그 이야기를 소비하는 이들에게 가짜 감정을 생성해냅니다.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소비하는 이유는, 이 특수효과를 반복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으로는 중독의 기제입니다. 이것이 중독이기 때문에 그 결과 우리는 피폐해지는 것입니다.


왜 이러한 중독에 빠지게 될까요?


망각하고 싶어서입니다.


이렇게 기억하면 좋습니다.


"반복은 망각하기 위해서다."


이 말을 기억하면, 진짜 감정과 가짜 감정을 구분하는 일이 보다 수월해집니다. 정확하게는 굳이 힘들게 구분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자연스럽게 진짜 감정을 향해갈 수 있게 됩니다.


어떠한 패턴의 반복이 생겨난 이유는, 다른 어떤 것을 은폐한 뒤 망각하기 위해서입니다. 거미줄 같이 촘촘한 패턴을 만들어서 위장막처럼 덮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있어 반복적으로 경험되는 감정이 있다면, 반드시 그 감정을 만들어내는 패턴의 이야기가 있으며, 그 이야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진짜 감정을 숨기기 위해 작동하는 것이라는 아주 효과적인 작업가설을 우리는 세울 수 있습니다.


가짜 감정은 진짜 감정을 망각하기 위해 만들어진다는 이 맥락 속에서, 가짜 감정은 이제 표층감정이라고, 또한 진짜 감정은 심층감정이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반복되는 이야기는 표층감정의 층을 더욱 두텁게 만듭니다. 그럼으로써 심층감정이 노출되기 어렵게 만듭니다. 이것은 마치 우물 위에 콘크리트가 계속 덮여가는 현실과도 같습니다. 그렇게 수원(水源)으로부터 스스로를 소외시킨 생명은 그 생명활동을 영위하기가 버거워집니다.


보통 이렇게 자신의 진짜 감정을 숨기고자 할 때는 진짜 감정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착각에 의한 두려움입니다.


상기한 예로 비유를 이어가자면, 콘크리트 아래에는 물이 아니라 마그마가 들끓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더욱더 콘크리트를 들이부어 더 견고한 표층을 이루고자 합니다.


또는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콘크리트 아래에 아무 것도 없을 경우입니다. 아무 것도 없다는 그 사실이 수치스러워 그저 콘크리트로 아주 두껍게 표층을 이루고자 합니다. 그러면 남들이 보며 '저렇게 두껍게 콘크리트층을 만들 정도면, 저 아래에는 정말 어마어마한 게 있나 보다.'라고 생각해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사실 가짜 감정의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소비하려는 이들 중에는 이 두 번째의 경우가 더 많습니다.


첫 번째의 경우라면 만약 누군가가 정말로 콘크리트 아래에 어떤 것이 있는지 같이 확인해보자고 할 때, 이 일은 희망적인 색채를 띠게 됩니다. 호기심도 일어납니다. 혹시라도 물이 있다면, 자신이 황폐한 콘크리트의 사막 위에서 그토록 필요로 하던 물이 있다면, 이것은 더 바랄 것이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의 경우라면 콘크리트 아래로의 탐구의 시선을 아예 원천적으로 봉쇄해버립니다. 그 밑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자신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내러티브를 적용해, 마치 그 아래에는 깊은 상처와, 차가운 분노와, 서러운 눈물 등과 같은 심오한 것들이 있는 척, 또는 고대의 지혜와, 마음의 비밀과, 이야기의 마법 등과 같은 신비한 것들이 있는 척 연기하지만, 실은 텅 비어 있을 뿐입니다. 그 부재의 사실을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습니다. 무엇인가 중요하고 대단한 것이 있는 척하는 쇼를 계속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바로 욕망의 속성입니다.


정신분석가 라캉의 이해는 이러한 면에서 아주 탁월합니다.


그는 욕구(need)와 욕망(desire)을 구분합니다.


욕구란 말 그대로 우리가 생리적인 필요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아의 경우에는 자기 혼자 욕구를 채우기가 어렵기 때문에 결국 자신의 양육자에게 언어적으로 요구(demand)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요구는 정확하게 욕구에 비례할 수가 없게 됩니다. 언어로는 아무리 해도 마음을 온전히 다 표현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언어적 요구로 충분히 채워질 수 없었던 욕구는 결핍이 됩니다. 그리고 그 결핍을 메우기 위해 이제 욕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이해에서 욕망이란 언어의 부산물인 셈입니다. 때문에 언어를 확충할수록 욕망 또한 더욱 막연한 형태로 커져갑니다. 자기의 언어로 세상을 다 설명할 수 있다고 믿던 이가 아무리 언어를 발달시켜도 결코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에 도달했을 때 경험하는 좌절과 그로 인한 결핍은 더욱 클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어가 커지면, 결핍도 커지고, 욕망도 커집니다.


그 커다랗게 세워진 산더미만큼, 그 안에는 거대한 용이 지키고 있는 놀라운 보물이 있을 것이라는 착각 또한 커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크기만 큰 언어적 껍데기일 뿐, 실상 그 안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진짜 감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느낌을 발견하는 방법을 핵심적으로 서술한 젠들린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에 무서운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당신의 내면에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은 뱀으로 가득 차 있는 상자가 아니다. 내면에 있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정작 우리의 내면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느낌은 매순간 새롭게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우리의 내면에는 용도 보물도 없습니다.


그것들은 이야기 속에만 있습니다.


언어가 욕망을 따라잡기 위해 몸집을 부풀리고 그만큼 다시 욕망은 도망가는 식으로 반복되는, 언어와 욕망의 끝없는 술래잡기가 만들어낸 이야기들의 특수효과 속에서만 그것들은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착각될 뿐입니다.


이처럼 이야기와 그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표층감정의 반복을 통해 우리가 망각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내면에 아무 것도 없다는 이 사실입니다.


이것을 존재론적 사실이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결국 표층감정은 존재망각의 결과입니다. 심층에서 드러나있는 존재의 사실을 애써 외면하기 위해 표층의 특수효과에 중독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내면에 근본적으로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은, 아무 일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정말로 아무 일이 없습니다.


우리의 존재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의 존재가 비어 있는 형식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우리의 존재가 아무런 문제가 없이 온전하다는 사실로 이어집니다.


또한 비어 있기에, 거기에서 늘 새로운 것들이 생겨납니다. 젠들린의 말 그대로입니다.


비어 있는 구덩이에서 물이 샘솟듯이, 그렇게 생겨나는 것들은 우리의 필요에 부합하는 것들입니다. 비유하자면, 이는 마치 우리의 곳간이 비어 있을 때, 우리가 필요로 하는 자원들이 그 안에 우리도 모르는 새 채워지고 있는 현실과도 같습니다.


확인하자면 우리는 이 지점에서 이미 한참 전에 라캉과 정신분석을 떠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하이데거와 선(禪)불교에 가깝습니다.


이 존재의 사실에 자신을 내맡길 수 있는가, 즉 마음에 자신을 내맡길 수 있는가, 바로 이 신뢰가 언어에 대한 과도한 중대성의 강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에너지가 낭비되지 않도록 만듭니다. 자유는 언제나 선택과 집중의 효율성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존재론적 면모를, 바로 우리의 내면에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다시 말하면 마음이 공(空)하다는 사실을 저주로 받아들이는가, 축복으로 받아들이는가가 이 모든 것의 질감을 결정합니다. 우리의 삶의 질을 결정합니다.


가장 높은 질적 수준을 갖는 것은 언제나 진짜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가장 질적으로 우수할 때는, 우리가 진짜인 나로 살 때입니다.


진짜인 나란 진짜 감정을 느끼는 나입니다.


선(禪)에서 배고플 땐 밥을 먹고 졸릴 땐 잔다는 식의 표현은, 이 진짜 감정인 심층감정이 무엇인지를 우리로 하여금 유추 가능하게 합니다.


전술했듯이, 표층감정은 욕망(desire)을 알립니다. 반면 심층감정은 욕구(need)를 알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심층감정은 단순하게 우리의 필요에 대한 것입니다. 배고프고, 졸립고, 목마르고, 쉬고 싶은 단순한 필요의 느낌입니다.


그러니까 이 심층감정에 접촉하면 우리가 욕망을 대하는 방식처럼 "그래그래, 우리 애기 해달라는 거 다 해줄게. 이제 그만 울어도 돼. 늘 네 옆에 있을 거야. 다 이해해줄 거야. 무슨 이야기든 다 들어줄 거야. 너를 위해서만 존재할 거야."와 같은 식의 과잉된 양육사업을 펼치지 않게 됩니다.


마음이 무슨 이런 응석쟁이 욕망덩어리인 것처럼 성가시고 번거로운, 때로는 두렵기까지 한 것으로 경험되지 않게 됩니다.


그보다는 마음의 작용이 정확하게 현실적 필요의 문제로 경험됩니다. 조금도 부담되지 않으며, 혼자서도 얼마든지 바로 채울 수 있는 아주 가벼운 감각으로 이해됩니다.


이처럼 심층감정의 핵심특성은 가벼움입니다. 심층감정은 심각하지 않습니다.


많은 심층심리학에서 용과 보물 이야기를 하듯이, 특히 융이 주범입니다, 심층일수록 더 심원하고 대단한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표층감정이 이야기의 특수효과들로 복잡다단하게 극화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더 심각하고 난잡합니다.


오히려 밑으로 내려가면 고요합니다.


바다와도 같습니다.


아무리 표면에 파도가 치더라도, 바다의 심층은 늘 고요합니다.


아무런 이야기가 없기에 고요합니다.


이것이 진짜입니다.


필요한 것들만이 일어나고, 일어나는 것들은 자연스럽습니다. 자연스럽게 즐겁고, 자연스럽게 슬프고, 자연스럽게 화나고, 자연스럽게 기쁩니다.


그 온도가 아주 따스합니다.


진짜 감정의 온도는 그 어떤 형상으로 일어나더라도 언제나 따스합니다.


진짜 감정이 터하고 있는 그 아무 것도 없는 내면이 잘 비어 있어서 보온이 잘 되기 때문입니다.


표면이 원래 보온이 잘 안됩니다. 당연합니다. 그러니 표층감정은 늘 마찰열을 일으키기 위한 부싯돌의 작용으로 늘 오버스럽습니다. 오버스럽게 비장하고, 오버스럽게 친절하고, 오버스럽게 진중합니다. 금방 열기가 사라지는 이 와중에도 끊임없이 불씨를 지피는 일을 거듭해야 하니, 사람이 피폐해지는 일 또한 당연합니다.


이를 이렇게도 비유해볼 수 있습니다.


아주 추운 겨울날, 누군가는 온기의 필요를 느끼며 동굴 안으로 들어가 몸을 따듯하게 덥히며 스스로를 행복하게 합니다. 그런데 다른 누군가는 그 동굴의 입구를 자신이 모아온 언 나뭇가지들로 가리고는 밖에서 불을 붙이기 위해 나뭇가지들을 서로 비벼댑니다. 손에서 피가 나도 계속 비벼댑니다.


"나는 나를 구원하고 있는 중이다! 덤벼봐라 이 세상아, 네가 감히 인간을 굴복시킬 수 있을지 어디 한번 해봐라!"


커다란 노성을 내지르면서, 그러다가 또 통곡하기도 하면서, 뭔가 연기가 일어난 것 같으면 광소하기도 하면서, 과잉된 마찰의 작업을 반복합니다.


그러다가 끝내 나뭇가지들이 다 부러져 쓸 수 없게 되면, 그는 이제야 인생을 알았다는듯이 허리를 낮춥니다. 바닥에 머리를 대고 가장 겸허한 자세로 호소합니다.


"도와주세요. 여기에 사람이 있습니다. 오만했던 저를 인정합니다. 이제 새 사람이 되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왜 동굴 안으로는 들어가려 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는 엄마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만들어낸 무수한 특수효과들을 멀리서도 알아보고 엄마가 자기를 구하러 와줄 날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가짜 감정이 하는 일입니다. 이야기에 빠져 하는 일이며, 욕망이 반복적으로 하는 일입니다.


실제 그의 노모는 거동이 어려운 몸으로 요양병원에서 찾아오는 이 없이 홀로 계실지도 모릅니다. 그 사실 또한 그는 알고 있습니다. 모를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끝내 외칩니다.


"어머니!!! 당신의 아들이 지금 차갑게 홀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어머니!!! 어디에 계십니까!!!"


다시 말하지만, 가짜 감정이 하는 일입니다. 이야기에 빠져 하는 일이며, 욕망이 반복적으로 하는 일입니다.


이제 그만 하는 것이 좋은 일입니다.


스스로의 발로 동굴 안에 들어와 있는 이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엄마도 먼 곳에서 혼자이시지만 따듯하게 계셨으면 좋겠다.'


그 마음이 따듯합니다.


이런 것이 진짜 감정입니다.


필요의 문제는 언제나 인간의 필요의 문제를 지시합니다.


필요를 통해, 그리고 필요를 알리는 심층감정을 통해 우리는 인간을 배웁니다.


필요에 대해 이루는 스스로의 배려가, 자연스럽게 인간에 대한 배려를 형성합니다.


내가 따듯하면 좋듯이, 엄마도 따듯하면 좋습니다.


자연스럽게 그 따듯한 마음이 넘쳐 흐릅니다. 비어 있는 구덩이에서 물이 샘솟아, 그 물이 넘쳐 흐릅니다. 물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까지 흘러갑니다.


"엄마, 따듯하게 잘 있지?"


"엄마도 지금 니 생각하고 있었지. 그 생각만으로 따듯하더라."


이런 것이 진짜 감정입니다.


나의 필요가 스스로 채워져 자연스럽게 다른 이들의 필요도 함께 채워지게 되는 이 근사한 일이 진짜 감정으로 인해 가능해집니다.


이 근사한 존재의 사업을 굳이 망각하고, 언제나 동일한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동일한 가짜 감정만을 소비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동일성을 반복한다고, 동일하게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엄마는 늙고 약해질 자유가 있습니다.


신처럼 유아의 요구를 최대한 충족시켜주던 그 엄마는 없습니다. 아직 충분히 다 채워지지 않았는데 벌써 없어지면 안 된다고 말해봤자, 그 결핍은 언어의 문제이지 엄마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이 언어로 세상을, 즉 세상 그 자체였던 엄마를 전적으로 통제하려 하고 있었기에 생겨난 재귀적 결핍을 엄마가 채워줘야 할 의무는 더욱이 없습니다.


반복은 망각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야기의 반복은 사실을 망각하기 위해서입니다.


엄마를 계속해서 신적인 대상물로 삼아 이야기를 반복하면, 엄마가 늙고 약해져 언젠가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실이 알려주는 진짜 감정을 망각하기 위해서 가짜 감정을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엄마 죽지 마세요."


이를 은폐하기 위해서, 엄마에게 늘 화를 내고, 원망을 하고, 엄마를 오히려 불쌍하게 보는 식으로 가짜 감정들을 반복적으로 소비합니다. 표층의 껍데기 위에서만 뱅글뱅글 돕니다.


껍데기를 벗기고, 모든 것이 다 비어 있듯이, 엄마도 없어진 그 심층의 자리를 조우하면, 마치 이 세상이 춥고 매서운 겨울처럼 얼어붙을 것 같다는 착각 때문에 이 가짜 감정의 일들을 합니다.


그러나 얼지 않습니다. 무섭지도 않습니다.


그러한 것은 우리의 내면에 없습니다.


만나보면 그저 따스합니다.


그 따스함은 실제로 춥고 매서운 겨울이 왔을 때도 우리를 덥혀줄 그 따스함입니다.


엄마가 실제로 돌아가신 후에도, 영원히 우리에게 남아 있을 엄마의 품입니다.


진짜 감정은 이러한 존재의 신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떠나간 것이 우리의 옆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더 옆에 있게 되는 신비로운 역설을 현실로 이루어냅니다.


그래서 진짜 감정이 다시 한 번, 우리의 필요(need)를 알리는 메신저인 것입니다.


우리의 필요 중의 필요, 그것은 영원성입니다.


진짜 감정은 언제나 가장 심층에서 이 영원성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작동합니다.


영원성은 우리가 이야기로 만들어낸 욕망이 아닙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우리의 필요입니다.


사랑하는 이들과 영원히 함께하고 싶다는 이 필요는, 인간에게 너무나 당연한 필요입니다. 이 필요를 느낀다는 것이 인간이 인간인 이유입니다.


그래서 진짜 감정이 그 어떤 형상으로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따스함이란 곧 영원의 동산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입니다. 우리는 그 꽃향기를 맡으며 영원성이 우리에게 당연한 필요라는 사실을 직관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모르는 새 반드시 채워지게 될 곳간의 진짜 보물입니다. 우리가 그 필요를 느끼는 당연한 우리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영원성이라고 하는 존재의 신비를 상기하게 해주는, 그 영원의 동산에 다리를 놓을 수 있게 해주는 바로 이 봄바람의 작용이, 진짜 감정의 작용입니다.


일부러 망각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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