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로 대답하는 삶을 향하여"
자신이 정말로 그러한 존재인 것처럼 이야기로 자신을 꾸며낸다. 가짜 스토리로 사람들에게 자신이 진정하게 살고 있는 주인공인 것처럼 자신을 알린다. 모든 것이 다 자신을 성장시켜주는 소재들이기라도 한 것처럼 신화적 내러티브로 자신을 포장한다.
이러한 것이 이야기 도핑이다.
아주 쉽게, 이야기로 금메달과 같은 멋진 삶을 획득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 도핑은 반드시 약탈을 수반한다. 남의 금메달을 빼앗아 자기의 것으로 하려는 의도로 작동한다.
이 과정은 당연하게도 질투가 견인한다. 이를테면 특정한 인물의 삶의 모습을 질투하는 이가, 그의 존재를 언어적으로 환원시켜 이야기처럼 만든 다음, 이제 그 이야기를 자기의 이야기로 삼아 자기가 그 인물인 척하는 것이다.
이처럼 이야기 도핑은 남의 삶을, 그 존재방식을 약탈하려는 의도를 필연적으로 담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 도핑을 시도해보게끔 만드는 전제는 이러하다.
"언어는 존재보다 우위에 있다."
물론 착각의 전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누군가가 언어로 다른 이의 존재를 더 존재하게 하거나, 혹은 덜 존재하게 하는 일이 가능해야 한다. 더 쉽게는 언어로 죽은 자를 살리거나, 산 자를 죽일 수 있어야 한다.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언어라고 하는 문화적 소재를 신격화해서 우상으로 섬기고 있을 때, 이러한 착각이 진리인 것처럼 작동한다. 여기에서 우상이라고 하는 것의 작용을 실제적으로 이해해보자면, 우상은 답이 없는데 답인 척하는 것이며, 곧 진짜 답인 척하는 가짜 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상은 대개 잘 모르면서 아는 척을 한다.
이야기 도핑의 주체들의 보편적인 모습이다.
물론 언어는 중요하다. 우리의 삶이 그 사이에서 펼쳐지는 두 축을 언어와 존재라고도 말할 수 있다. 틸리히는 이를 문화와 종교라는 표현으로 묘사한다. 이 둘은 서로 다른 트랙이다. 예수가 카이사르의 것과 주님의 것을 경계지으라고 했듯이, 문화와 종교 사이에도 정확한 경계가 존중될 필요가 있다.
언어와 존재 사이도 마찬가지다. 언어는 문화적 차원과 관계되고, 존재는 종교적 차원과 관계된다. 그 경계는 분명하다. 그리고 틸리히는 이 경계를 가장 존중하는 방식으로서 둘 사이에 가능할 수 있는 관계성을 묘사한다. 그것은 이러하다.
"문화는 질문이고, 종교는 대답이다."
그러니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 의미의 문제,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문제 등과 같은 종교적 차원의 문제들에 질문을 하지 않는 문화는 이미 그 자체로 퇴락한 문화다. 이와 동시에, 문화에 응답하지 않은 채, 또는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채, 혼자서만 고귀하게 잘났다고 하는 종교 또한 이미 퇴락한 종교다.
문화와 종교는 끊임없이 순환하는 질문과 대답의 방식으로 관계성을 꽃피워나가야 한다.
그런데 문화가 질문을 하지 않는 정도를 넘어, 오히려 문화 자신이 대답인 척할 때, 이것을 우상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모든 문화란 언어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언어라는 것은 언제나 상대적인 기제에 의해서만 성립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아주 단순하다. "작다."라고 말하려면 이미 "크다."라는 상대적 대립항이 설정되어야만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모든 언어는 이 상대성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언어 자체의 핵심속성은 분명하게 상대성이다.
그러니 상대적인 언어에 의해 형성된 문화 또한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상대적인 문화가 절대성을 참칭하여 문화 자신이 대답인 척할 때, 이것이 바로 '상대적인 유한자가 절대적인 무한자인 척하는 현상'이라는 우상의 정의를 정확하게 충족시킨다.
그래서 틸리히는 말한다.
"문화 속에는 원래 답이 없다."
상대적인 것들 속에는 아무리 찾아도 답이 없다. 그 어떤 답을 찾아도 상대적이기에 공허할 뿐, 정확하게 충족시킬 수 있는 절대적인 답이 없다. 당연하다.
상대적인 것은 오직 절대적인 것으로만 구원될 수 있다. 상대적인 문화는 절대성을 말하는 종교로만 답을 얻을 수 있고, 상대적인 언어는 절대적인 존재로만 답을 얻을 수 있다.
이와 같이, 상대적인 것과 절대적인 것 사이에, 문화와 종교 사이에, 언어와 존재 사이에 엄격한 경계가 설정되어야 그 사이의 관계성은 회복되며, 그로 인해 정말로 우리가 답을 찾는 일이 가능해진다.
도핑(doping)이란 불순물을 섞어 그 성질을 변화시키려는 것이다. 즉, 도핑이란 경계를 흐리려는 대표적인 행위다.
질문은 질문으로서, 대답은 대답으로서, 각각의 순수성이 담보될 때 질문과 대답은 서로를 찾아 연결될 수 있다. 질문 속에 대답을 섞어버리는 도핑의 행위로는 결코 대답이 찾아질 수 없다. 질문과 대답을 섞어버리는 이러한 일은 그저 답정너라고 불린다. 답은 정해놓고 단지 요식적으로 질문하는 척만 하는 것이다. 그러니 진짜 답은 찾아질 수가 없다.
특정한 문화적 소재를 마치 절대적인 답인 양 정해놓고 답정너의 도핑행위를 하고 있을 때, 이것은 전술한 것처럼 반드시 약탈의 결과를 낳게 된다. 쉽게 말해, 신으로부터 신의 권위를 빼앗아 자신이 신인 척하게 되는 결과를 만든다. 이처럼 모든 우상은 본질적으로 약탈자다.
상대적 문화의 우상으로 작동하는 이 약탈자는 단지 절대적인 영역에 대한 약탈자만이 아니다. 그는 상대적인 영역에 대해서도 동시에 약탈자다.
애초에 질문이기만 할 수 있는 것이 대답의 기능을 하려고 하면 그 대답은 반드시 가짜 대답이 되는 까닭이다.
가짜 대답을 따르면 길을 잃는다. 하나밖에 없는 인생을 낭비하게 된다.
이처럼 가짜 대답을 진짜 대답인 것처럼 기만하는 도핑은 그 자체로 남의 인생을 빼앗는 약탈의 행위다.
이야기 도핑은, 상대적인 이야기 안에 답이 있다고 말하며, 자신이 이야기로 도핑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이야기를 답의 기제로 보급하려는 그 일이다.
이야기에 빠져, 자기만 헤롱거리는 것이 아니라, 남들도 헤롱거리게 만들려는 그 의도다.
이것은 모든 질투가 최종적으로 향하는 방향성이다.
아무리 남의 삶을, 그 존재방식을 이야기처럼 만들어 해당의 이야기로 자신의 삶을 포장해보아도, 실제의 자신이 그렇게 살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삶은 자신의 삶이 될 수 없다. 이야기 도핑은 반드시 이 한계에 봉착한다.
그러니 이룰 수 없는 것 대신에 차라리 같이 몰락하는 길을 택한다.
헤롱헤롱 이야기의 특수효과로 펼치는 마약파티를 주관하여, 모두가 다 같이 몽롱하게 꿈꾸는 속에서 함께 용광로에 떨어지는 편이 이야기 도핑의 주체에게는 차라리 낫다. 함께 죽는 현실을 창출하는 그 일이야말로 상대적인 것이 마지막으로 절대적인 것인 척할 수 있는 최후의 기만인 까닭이다.
이 이야기 도핑의 상태에서 우리는 깨어나야 한다.
우리를 몰락시키는 이야기라고 하는 자동운행의 컨베이어벨트 위에서 눈을 뜨고 벨트 밖으로 내려서야 한다.
이 도핑의 공장 속에는 답이 없다. 눈이 풀린 채 이야기의 특수효과에 중독되어 벨트로 수송되는 그 끝은 진실로 용광로다. 수송된 모든 것을 용해시켜 또 다른 이야기로 만들어낼 용광로다. 우리는 이 공장 안에서는 그저 영원히 이야기의 소재로만 전락할 부품일 뿐이다.
언어 안에는, 문화 안에는, 이야기 안에는 진실로 답이 없다.
나만의 언어를, 나만의 문화를,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고 답이 되는 것이 아니다.
언어가 아닌 내가, 문화가 아닌 내가, 이야기가 아닌 내가 실은 답이다.
그럼으로써 언어와, 문화와, 이야기가 아닌 내가, 언어의 답이 되고, 문화의 답이 되고, 이야기의 답이 될 때, 그것을 삶이라고 부른다.
곧, 그 모든 언어와, 문화와, 이야기가 찾아 경주하던 그 멋진 목표물이 바로 나라는 존재임을 알게 되는 것이 삶이다.
헷갈리지 말아야 할 것은, 그렇다고 언어가 그 자체로 나를 말해주고, 문화가 그 자체로 나를 말해주며, 이야기가 그 자체로 나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들은 그저 질문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어디에 있고, 나는 대체 누구냐고, 질문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언어를 통해 더 똑똑한 나를 얻게 되고, 문화를 통해 더 훌륭한 나를 얻게 되고, 이야기를 통해 더 멋있는 나를 얻게 되는 것이 아니다.
언어, 문화, 이야기, 이것들을 통칭하여 우리는 자아라고 부를 수 있다.
자아는 언어적 구성물이고, 문화적 부산물이며, 이야기의 결과물이다.
이야기 도핑이란 결국 이 자아가 상대적 이야기의 더 많은 소비를 통해 자신이 절대적 나라고 주장하려는 기획과도 같다.
자기가 이 세상에서 제일 높다며 시상대 위에 올라가 "엄마 나 짱먹었어!"의 쇼를 펼치고 싶어하는 자아의 망상이다.
남을 약탈하는 도핑을 통해, 자아는 그 일을 하려고 한다.
나라고 하는 답을 모르는 자아는, 심지어는 자기가 그저 질문일 뿐이라는 사실조차 망각한 채 오히려 자기가 나인 척하는 자아는, 언제나 이 꿈에 취한 몽롱한 마약파티의 일만을 그것도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형태로 하게 된다.
그러니 자아를 단지 질문으로 돌리는 일, 자아에게 정확한 경계를 세워주는 일, 이것이 우리가 명징하게 깨어나는 방법이다.
자아에게는 이질적 불순물과도 같은 나를 자아가 자기 안에 멋대로 섞지 않도록, 자아가 무엇을 하든 그것은 내가 아니라는 명확한 경계에 대한 이해를 갖는 일은 아주 유익한 일이다.
그 어떤 언어도 내가 아니다. 그 어떤 문화도 내가 아니다. 그 어떤 이야기도 내가 아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는 그 모든 것보다 우위에 있다. 그 모든 것의 답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내가 추구해야 할 답이 아니라, 내가 답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그것들이다.
나는 언어와, 문화와, 이야기에 대답하는 존재이고, 종교이고,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존재이고, 종교이고, 사실이다."라는 자아의 이야기 안에 또 편입되게 되면, 나는 또 그것들이 아니다. 이야기들에 '대답하는 자'의 실체적 포지션을 취한다고 그것이 나인 것은 아니다. 그것이 바로 자아다. 스승이라는 금메달을 따고자 도핑하고 있는 그 자아다.
나는 다만 그 모든 이야기가 최고의 정점을 찍은 뒤에 눈물을 뿌리며 감동의 도가니탕을 휘젓고 다닐 때,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는 아무리 도핑을 해도 내가 될 수 없었습니다."라며 최후의 방점을 찍어주는 자다. 그 모든 최고를 무산시키는 유일한 최후의 것이며, 그 모든 최고의 망상을 해체시키는 유일한 최후의 건강한 것이다.
이야기 도핑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자기가 말한 것이 자기인 줄 알며, 자기가 말한 대로 자기가 살고 있는 줄 안다. 그럴 듯한 말로 자신을 대체하고, 자신의 삶을 대체한다. 그 결과, 정말로 그렇게는 살지 못하게 된다. 단순하다. 자신은 이미 그렇게 살고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착각에서 깨어나야, 우리는 건강해지며, 우리가 원하는 온전한 삶을 정말로 살 수 있게 된다.
삶이란 언어와 존재 사이의, 문화와 종교 사이의, 이야기와 사실 사이의 상호작용이다. 질문과 대답 사이의 상호작용이며, 스즈키 선사가 말하듯이, 상대적인 것과 절대적인 것 사이의 그 경계가 명확한 상호작용이다.
언어로 삶을 대체하는 것은 이 상호작용을 붕괴시키는 일이다. 애초에 대답의 입장이 될 수 없는 언어가 존재를 무시한 채 자기 혼자 묻고 대답하기까지 하는 일이다. 그러니 이 상호작용이 붕괴된 삶은 불건강한 삶이 된다. 이러한 것은 우리가 원하는 삶이 아니다.
삶은 두 가지 양태로 일어난다. 언어적 물음으로 다가오는 삶, 그리고 우리의 존재로 대답되는 삶이 그것이다.
그래서 실존상담자인 빅터 프랭클은 "삶에게 묻지 말고, 삶이 던지는 물음에 대답하라."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미 언어적 물음으로 다가운 삶의 한 양태에 대해,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언어가 아닌 우리의 존재로 대답하는 그 일뿐이다. 그래야 상호작용이 완성된다. 이렇게 상호작용을 회복한 삶이 바로 우리가 원하는 건강한 삶이다.
이야기로 묻고 또 다른 이야기를 그 대답으로 취함으로써 이야기 자체만을 더욱 크게 만들려고 하는 이야기 도핑에서 깨어나, 그 자아팽창의 기획에서 깨어나, 이제 우리는 대답해야 한다. 위대한 말이 아니라 자신으로 사는 존재로서, 우리가 대체 누구인지를, 이야기 밖에 서있는 그 존재의 면모를 대답으로 알게 해야 한다.
그러한 삶은 이야기 도핑이 꿈꾸던 금메달과 같은 멋진 삶이 아니다.
금메달보다 멋진 삶이다.
그 모든 상대적 기준의 최상위보다 더 멋진 것, 그것은 바로 자유다.
존재는 언제나 자유로 대답한다.
자신의 자유를 밝힌다.
자유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밝히는 것이며, 자유란 언제나 그렇게 자신을 거짓으로 지어내지 않을 그 자유다.
존재로 참되어서 자유로운 이 삶이 가장 건강한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