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소, 여우, 장미꽃, 그리고 마음을 길들이는 일에 관하여"
오늘날 심리학의 인기는 우리가 마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우리가 실은 마음을 어렵게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반영합니다.
마음이 어려운 것은 당연합니다. 생소하기 때문입니다. 개인이 자신의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현실은 현대인에게는 이제 막 생겨난 새로운 현실과도 같습니다.
의식연구의 대가인 줄리언 제인스는, 고대에는 마음이 신적인 요소였음을 말합니다. 인간이 감히 가질 수 없는 것이었고, 다만 그 영향을 받을 수 있었을 뿐입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신들이 인간의 삶에 개입하듯이 이루어지는 것이 마음의 활동이었습니다.
중세에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선택받은 소수의 인간들만이 가질 수 있는 것으로 상정되었습니다. 왕, 성직자, 귀족 등과 같은 특권계급들만이 자신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향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마음의 근본속성인 자유 또한 특권계급들에게만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근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소수의 특권계급을 타파하면서 출현한 시민의 개념이 부각되으로써 상대적으로 더욱 많은 이들이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지성적으로 뛰어난 이들만이 더 많이 가질 수 있는 고급재로 취급되었습니다. 나머지 이들에게는 자신의 마음이 아니라 지적 엘리트들이 만들어낸 마음의 대체물인 모범적 이야기를 통해 사는 일이 더 바람직한 것으로 권장되었습니다.
이것이 계몽주의입니다. 계몽주의는 자신의 마음 대신에 훌륭한 이야기를 따라 살도록 만드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도가 지배적으로 확장될 때 생겨나는 것이 전체주의입니다. 전체주의란 곧 모두가 자신의 마음 대신에 동일한 모범적 이야기를 모방해 살라고 강요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제 현대에 들어오면서, 제국주의와 홀로코스트의 형태로 전체주의의 폭력을 지독하게 경험한 인간은 자신의 마음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자신의 마음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밝히고자 한 이 움직임을 실존주의 운동이라고 부릅니다. 실존주의 운동을 통해 '자신의 마음으로 사는 인간' 바로 '개인'의 개념이 출현합니다.
개인(individual)은 나누어질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나누어질 수 없기에 온전한 것입니다.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은 집단의 부품이 아니고, 구조의 부속물이 아니며, 관계의 역할재가 아닙니다. 무슨 합체로보트처럼 집단, 구조, 관계에 편입되어야만 결핍이 없어지고 더 완전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몸은 작지만, 이미 가장 완벽한 우주와 같은 위상을 갖고 있는 존재가 바로 개인입니다.
자신의 마음으로 산다는 것은, 인간 자신이 이처럼 스스로를 우주와 동급의 존재로 알고 산다는 것입니다.
떠올려보면 쉽습니다. 고대에는 신과 같았던 것이 마음입니다. 중세에도, 근대에도, 가장 좋은 고급재로 인식되었던 것이 마음입니다. 바로 이 신적이고 훌륭한 속성이 이제 오롯하게 인간 자신의 것이 된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이전에는 자신과는 무관하게 자신의 외부에만 있던 신을, 또 자신보다 대단한 이들만이 친분을 맺을 수 있다고 믿어졌던 그 신을, 이제는 개인이 자신의 내부로 반가이 영접할 수 있게 된 현실과도 같습니다. 모든 개인이 직접 신과 사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신적인 것과의 내밀한 사적 교우를 소위 영성이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심리학이 영성과 자주 연결되는 이유는, 그 둘이 원래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정말로 자기의 것으로 삼는다.'와 '신을 정말로 자기의 것으로 삼는다.'는 동일한 의미입니다.
이러한 영성과 심리학의 공통적인 전개 과정을 가장 가로막는 것이 바로 이야기입니다. 전술했듯이, 이야기는 근대의 산물입니다. 특히 지성적 능력을 통해 계급적 특권을 얻고자 했던 이들이, 그 특권을 공고하게 만들고자 활용했던 단골소재입니다. 아주 쉽게, 이 근대의 특권층들은 작가(writer)만이 마음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던 셈입니다. 나머지는 작가가 언어로 만들어낸 이야기를 따라 살며 자신들을 이끌어주는 작가를 숭상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오늘날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고,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라고 하는 슬로건은 표면적으로는 아름다워보이지만, 실은 여전히 이 작가와 이야기라고 하는 것을 특권계급이 되는 중요한 소재로 입지화하는 일을 지속하려는 의도 속에 있습니다.
모든 계급투쟁은 언제나 자신들만이 마음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특권계급에 대한 그 투쟁입니다. 지위, 신분, 생산수단, 이러한 것들은 그저 표면적인 소재에 불과합니다. 그 핵심은 마음입니다. 인간은 모두가 개인으로서 자신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현실을 향해 언제나 투쟁해왔던 것입니다. 그만큼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임을 눈치채고 있었던 까닭입니다.
그 좋은 마음이 원래 정당한 자기의 것이라는 사실에 조금 더 노골적으로 눈뜬 이들을 통해 투쟁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져왔고, 그 결과 우리는 현대를 맞이했습니다. 이제 출발점이 개인이라는 사실에는 누구나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개인으로 사는 일에 대해서는 우리는 조금 난감함을 경험합니다. 전술했듯이, 너무 오랜 시간을 마음이 자기의 것이 아닌 것처럼 살아와서, 갑자기 찾아온 멋진 현실이 조금은 생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생소함에서 비롯한 혼란으로 말미암아, 여전히 자신의 마음을 이끌어줄 정치적 지도자를 바라게도 되고, 자신의 마음이 가야 할 길을 대신 말해줄 종교인을 바라게도 되며, 자신의 마음을 대체할 이야기의 소비를 바라게도 됩니다.
이처럼 혼란은 언제나 우리에게 퇴행을 야기하곤 합니다. 시대는 현대이지만, 아직도 고대적 믿음과, 중세적 태도와, 근대적 양식을 뒤섞어 마음에 대해 갈팡질팡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시대에 마음에 대해 잘 아는 일은 정말로 중요합니다.
마음의 역사를 이해함으로써, 마음을 향해 우리가 움직여왔던 방향성을 정확하게 자각하고, 이제 마음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알아 사는 일에 대해 더 적극적인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어떠한 방법론을 취해야 하는지가 명확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개인으로서 자신의 마음으로 살기 위해 필요한 것, 그것은 마음을 길들이는 일입니다.
길들인다는 것은 생소하고 낯선 것과 친해지는 과정입니다.
이것은 마음에 대한 매니지먼트를 의미합니다. management는 보통 '관리'라고 번역되지만, '길들임'이라는 번역어가 보다 유효합니다.
manage는 man과 age가 결합된 표현입니다. man은 manus라고 하는 라틴어에서 왔습니다. 이 단어의 뜻은 '손'입니다. 뒤에 붙은 age의 의미는 '숙성됨, 무르익음, 익숙해짐' 등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manage란 결국 '손에 익숙해지다'의 의미로 형상화됩니다. 길들인다는 것은 손에 익게 하는 일입니다. 낯설고 생소한 것에 지속적으로 접촉해서 그것이 익숙해지게 하는 것이 곧 길들임(management)입니다.
manage라는 단어의 어원을 추적해보면, 그것은 보통 말을 길들이는 일과 관계됩니다. 말은 아주 중요한 자원이었습니다. 이동수단이자, 노동력이자, 먹거리가 되기도 했을 뿐더러, 특히 전쟁에 있어 말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한 것이었습니다. 기마로 인해 전쟁사가 완전히 다시 쓰일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중요한 말을 길들이는 활동에 사람들이 얼마나 정성을 들였을지를 짐작하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마음에 대한 우리의 자세가 이와 같아야 합니다.
정성으로 길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말은 생명체입니다. 생명의 특성은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가 생명의 증거인 마음의 근본속성인 것입니다.
자유는 움직임입니다. 언제라도 통제되지 않고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이 자유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정성으로 길들이고자 할 때는, 마음이 야생마처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이 먼저 존중되어야 합니다.
길들임(manage)이 통제(control)와 다른 이유가 이것입니다.
통제는 통제하고자 하는 대상의 움직임을 봉쇄하려고 합니다. 원래 동사였던 것을 끊임없이 명사화하려고 합니다. 이 작업을 이루기 위해 동원하는 것이 문자언어입니다.
control은 대차대조표에 따라 현실을 평가하는 일입니다. 그 어원은, 예전에 목동들이 아침에 목장에 나가 두루마리(rol)에 기록한 양의 숫자와 실제의 숫자를 대조(cont)했던 활동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래서 control은 언어로 만든 가상세계를 우선시여기며, 그 가상세계의 모습에 따라 현실세계를 통제하고자 하는 일입니다.
머릿속에 있는 이상적인 언어적 도식에 따라 자유로운 생명을 임의로 조형하려는 일과 본질적으로 같은 일입니다. 즉, 이야기로 마음을 지배하고자 하는 일이 곧 통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길들임은 다릅니다. 야생마를 길들이려는 이는 말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일을 허용합니다. 그러나 말에게서 손은 떼지 않습니다. 야생마가 움직이는 바로 그 방식을 따라, 그가 접촉하고 있는 손도 자연스럽게 그 형상을 바꿔 이동하며 접촉을 유지합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야생마의 생태와 습관, 현재의 상태를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길들임은 길들이고자 하는 그 상대와 함께 이동하며 상대를 정말로 알아가는 방식입니다.
동양에서는 말 대신에 소로 이 앎의 과정을 비유하곤 했습니다.
불가에서 자주 쓰는 십우도(尋牛圖)라는 10장의 그림에서는 동자가 잃어버린 소를 찾아 산속으로 들어가 그 소를 길들인 뒤 다시 산 아래로 내려오는 과정을 묘사합니다. 여기에서 소는 당연히 마음을 상징합니다. 동자가 아무리 소를 임의대로 이끌어가려고 해도 소는 말을 듣지 않습니다. 소와 정말로 친해졌을 때, 그때서야 소는 동자를 등 위에 태웁니다. 소가 가는 길이 곧 동자가 가는 길이 됩니다. 그렇게 둘은 하나가 됩니다.
이것은 길들임의 아주 핵심적인 속성을 시사합니다.
그것은 바로 '길들이는 일은 동시에 길들여지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어린왕자』에서는 더욱더 직접적으로 묘사됩니다.
___
"'길들인다'는 게 무슨 뜻이지?"
"그건 '친구가 된다'는 뜻이야."
"우린 우리가 길들이는 것만을 알 수 있는 거란다." 여우가 말했다.
"사람들은 이제 아무것도 알 시간이 없어졌어. 그들은 가게에서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들을 사거든. 그런데 친구를 파는 가게는 없어. 그러니까 사람들은 이제 친구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지. 친구를 가지고 싶다면 나를 길들이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어린 왕자가 물었다.
"참을성이 있어야 해." 여우가 대답했다.
"먼저 내게서 좀 떨어져서 이렇게 풀숲에 앉아 있는 거야. 난 너를 힐끔힐끔 곁눈질로 쳐다볼 거야. 넌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말은 오해의 근원이 될 수도 있으니까. 하루하루 날짜가 지나감에 따라, 너는 조금씩 나와 가까운 곳에 다가앉을 수 있게 될 거야."
___
길들이면서 동시에 길들여지는 일, 이것이 친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과 친구가 되어야만, 마음을 알 수 있고, 마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언어가 아니라 접촉입니다. 언어는 지성이 하는 일이고, 접촉은 존재가 하는 일입니다. 매우 흥미롭게도, 언어는 접촉되면 멈춥니다. 정신없이 이야기를 내뱉고 있는 이에게 슬며시 다가가, 그의 어깨에 부드럽게 손을 접촉하면, 즉시 그의 이야기는 멎습니다. 이제야 자신을 접촉해주는 존재를 만난 까닭입니다.
이 시대의 문제는 이처럼 이야기들만 인터넷이라는 허공 위에 공허하게 난무하지, 존재로 접촉하는 움직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존재로 접촉하기 위해서는 존재가 드러나야 하고, 존재가 드러나기 위해서는 공간이 있어야 합니다. 공간을 동사화하면 그것이 시간입니다. 즉, 우리가 어떤 것과 성공적인 존재의 접촉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것에 시간을 써야 합니다. 그것에게로 다가가는 시간을 적극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마음과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마음에 시간을 써야 합니다. 빨리빨리 통제하려고 하는 의지만 내고 있는 한, 우리는 영영 마음과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마음을 길들일 수 없습니다.
다시 기억하자면, manage는 무르익어가는 손길입니다.
우리의 손길만이 어린왕자에게 무르익어가는 것만이 아니라, 어린왕자도 우리의 손길에 무르익어갑니다.
함께 손을 맞잡은 그 시간이 무르익어갑니다. 숙성된 향기를 그윽하게 풍깁니다.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그 하나의 향기 속에 영원처럼 머물 때, 둘은 이미 연인입니다. 가장 친밀해진 이들의 이름입니다.
개인으로 산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으로 산다는 것이며, 자신의 마음으로 산다는 것은 신적인 것과 하나된 연인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이여도 외로운 혼자로서의 1이 아닙니다. 온전한 하나로서의 1입니다.
이것이 개인의 의미입니다. 자기 안의 마음으로 사는 개인은 반드시 자기 밖의 사랑으로 사는 개인입니다. 마음이 자기 안에 들어올 때, 자기 또한 사랑 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바로 이 사랑의 현실을 알리기 위해, 마음의 역사는 쓰여왔습니다.
마음을 길들이는 일은, 우리가 사랑에 길들여지는 일입니다.
어려운 일이 아니라 아직은 조금 생소한 일입니다. 사랑받아 본 적이 없어 아직은 조금 사랑이 낯선 일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가능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