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육과잉이 만든 능력주의: 못생겼으면 내 집에서 나가"
한 대중심리학 강사가 강의를 엽니다.
융, 게슈탈트 심리학, 아사지올리의 통합적 접근을 위시한 서구의 심리학전통과, 중관불교와 양명학 그리고 노장사상 등의 동양철학, 그리고 진화심리학과 『물은 알고 있다』의 의식의 비밀 및 끌어당김의 법칙을 전부 아우르며, 그 중심을 관통하는 가장 위대한 인류의 정신문화사의 진리를 쉽게 전하겠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 놀라운 경험을 통해 그 진리를 몸으로 증득했다고 합니다. 가만히 있어도 이제 모든 진리가 다 하나라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그걸 알고 난 뒤엔 세상 사는 게 이렇게 쉬워도 되는지 웃음이 절로 나오고, 일상이 여여하며, 마음의 평화가 지속된다고 합니다. 이걸 몰랐을 때는 왜 그리 무언가에 쫓기며 자신을 채찍질하고 애쓰며 살았는지 그 또한 헛웃음이 나온다고 합니다.
암튼 강의의 구체적인 내용은 각설하고 대체로 이런 류의 이야기의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메타인지를 키워 그 힘으로 자기 안의 마음들이 사이좋게 지낼 수 있도록 지켜주세요. 조금 불편한 마음도 잠깐 그 품에 안고 있으면 편해집니다. 아하, 하고 어떤 마음인지 알게 됩니다. 다른 마음들에게도 그 마음이 실은 착한 아이라는 걸 알려주신 뒤, 서로가 차별없이 새우깡 10개씩 먹을 수 있도록 모든 마음에게 평등하게 나누어주세요."
대체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들이 성격장애가 있거나 발달이 정체된 경우가 많다는 사실도 차치하고, 수강생들의 환호성 속으로 들어가보겠습니다.
"와, 이렇게 동서고금의 모든 사상을 통달하신 엄청난 분은 처음 봐요. 오늘 제가... '진짜'를 보았군요. 정말 인생의 마스터를 뵌 것 같습니다. 정말 똑똑하세요. 아주 훌륭하고 지적인 명강의였습니다."
강사도 수줍은 미소로 겸손하게 화답합니다.
"아닙니다. 별 말씀을요. 일반인들에게는 조금 어려운 얘기일 수 있어서 살짝 염려했는데, 이렇게 지적으로 탁월한 분들이 오셔서 막힘없이 강의내용을 완벽하게 소화하신 것 같아 오히려 제가 기쁩니다. 정말로 똑똑하신 여러분 앞에서 강의를 할 수 있어서 제가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다. 자주 뵈어요."
그리고 강사에게나 수강생에게나 이 강의의 만족도는, 최대치로 잡아도 49%입니다.
왜일까요, 왜일까요?
서로가 서로에게 듣고 싶은 말을 못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들으려고 강의를 열었고, 그 말을 들으려고 강의를 신청했는데, 누구도 상대에게 그 말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말입니다.
"우와, 강사님 존나 간지나고 잘생기셨다!"
"오오, 대박, 존나 귀엽고 섹시한 분들이 강의를 들으러 오셨네요!"
아주 뭐 지적이고 교양있는 표정으로 점잔을 빼며 서로의 지성적 능력을 칭찬하고 있었지만, 실은 이들이 서로에게 원했던 것은 자기의 외모에 대한 칭찬이었던 것입니다.
그 소망을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상대에게 서로 은폐하고 있기에, 이들의 만남은 언제나 49%의 만족밖에는 이루지를 못합니다.
외모주의는 반드시 능력주의로 이어집니다.
잘생기고 예쁘단 말을 듣고 싶은데, 그럴 수 없을 것 같아 지적이거나 경제적인 능력으로 칭찬받으려 하는 식입니다.
또는 반대로 자기의 외모로 성공한 이가, 자기는 외모가 아니라 진정한 힙합정신과 뛰어난 음악실력에 의해 성공했다고 주장하려 하는 식입니다.
이 두 방식 다 외모에 대한 집착을 드러냅니다.
집착의 소재는 늘 거기에 휘둘려야 하는 구질구질함으로 인해 은폐의 소재로 뒤바뀝니다. 그리고 은폐된 것은 변이됩니다. 외모주의가 어떻게 능력주의로 바뀌는지에 대한 그 묘사입니다.
변이된 형태를 아무리 추구해봤자 은폐된 것이 실현되지 않는 이상, 불만족은 필연입니다. 능력주의의 추구 속에서 아무리 성과를 내어도 우리가 늘 불만족스러운 이유일 수 있습니다.
불만족의 끝은 누구나 알다시피 화입니다.
요즘의 화는 즐겁고 행복한 척하는 오버스러운 웃음으로 매우 자주 표현됩니다.
자기 능력을 통한 성공을 입에 달고 사는 이들이 짓고 있는 그 웃음입니다.
외모에 가장 중요하게 집착하는 이가, 못생겼는데 성공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내심 생각하고 있기에 화는 쌓여갑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능력주의의 끝만 화가 아니라 그 시작도 화라는 점입니다.
이 지점에서 양육의 문제가 대두됩니다.
양육과잉은 아이를 가장 완벽하게 지키겠다고 하는 의도입니다. 이 의도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아이는 스스로를 지킬 힘이 가장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부모가 가장 지켜줄 수 있는 까닭입니다.
그렇게 아이에게서 무기를 빼앗은 뒤, 부모는 엑스칼리버를 든 히어로인 척합니다. 이것이 양육과잉입니다.
양육과잉 속에서 아이는 스스로를 보호할 힘이 거세당해 무력함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어릴 때는 이것은 감수할 만합니다. 거세된 대신에 귀여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귀여움의 소재는 단연 외모입니다. 포유류의 유생체는 대체로 외모가 귀엽습니다. 자기가 말썽도 부리지 않고, 화도 내지 않으며, 심리적으로 거세당한 착한 아이로 있으면 외모를 통해 오는 복지의 혜택들이 크다고 아이는 경험합니다.
외모가 이미 효과적인 능력이 된 셈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외모주의는 능력주의의 씨앗을 그 안에 품은 채 배양됩니다.
그리고 유치원에 가거나 학교에 가는 사회적 활동에 아이가 참여하기 시작함으로써 균열이 생겨납니다.
엄마는 예쁘다고 했는데, 애들은 못생겼다고 합니다.
누구도 부모만큼 자기의 외모를 칭찬해주지 않습니다.
심지어 나이가 들어갈수록 부모도 예전처럼 마냥 귀여워해주지는 않습니다. 추악한 벌레를 보는 것 같은 시선도 종종 느낍니다.
자신은 외모만 가진 인형으로서의 존재방식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무력하기만 한데, 그런 자기가 얻을 수 있는 자원은 점점 그 양이 축소되는 것처럼 경험됩니다.
특히 인터넷에서 보는 화려한 사회적 자원들은, 사회적으로는 먹히지 않을 것 같은 자신의 외모로 획득하기에 너무나 요원하게만 생각됩니다.
이 지점에서 거세당한 아이들은 화가 납니다.
"예쁘다, 예쁘다."라던 엄마의 그 말이, 영원한 낙원에 대한 약속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커다란 배신감을 느낍니다. 신에게서 버림받은 기분이고, 분노는 필연적으로 신을 향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화를 노골적으로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정말로 누구에게 화가 났는지의 그 사실은 은폐됩니다.
엄마라도 없으면 자기의 외모를 칭찬해줄 이는 현재 이 세상에 아무도 남지 않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화가 난 아이들은 그 화를 연예인이나 정치인 또는 교사 등의 대상에게 교묘하게 돌려 소비함으로써 시간을 번 뒤, 한켠에서는 독립을 준비합니다.
외모를 통해 부모로부터의 이득을 얻고 있다보니 그 거래조건으로 무력해진 자신의 현실을 타파하고자, 이들은 자기의 능력을 키우고자 하게 됩니다.
무력감이 낳은 화에서 시작된 능력주의의 태동인 셈입니다.
양육과잉에 대한 반동으로 생겨난 만큼, 이러한 능력주의 또한 대단히 과잉된 형태를 갖습니다.
무력함에서 벗어나고자 능력주의에 빠진 아이들은 과잉된 능력을 추구합니다. 단기간에 히어로처럼 마법적인 능력을 얻으려 합니다. 영끌을 하고, 코인을 하며, 사기를 칩니다.
양육과잉으로 인한 무력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것입니다.
자기의 외모를 통해 부모에게 의존하고자 하는 일과, 자기의 능력을 통해 부모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일, 이 두 방식이 말해주는 것 또한 공통적인 하나의 집착입니다.
바로 부모에 대한 집착입니다.
외모주의와 능력주의는 부모에 대한 집착 때문에 생겨납니다.
외모주의는 대중이라고 하는 외부의 가상부모들을 더 많이 끌어당기는 방식으로, 능력주의는 자기가 대중에 대해 민주주의적 메타인지의 힘을 가진 좋은 부모가 되는 방식으로, 그 집착의 양상을 각기 드러냅니다.
그리고 두 경우 다 똑같이, 또 다른 양육과잉의 현실들을 끝없이 만들어냅니다.
그러니 이 양육과잉이 만연해진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더 많은 무력감을 경험하고, 그 끝에 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화를 조금 더 살펴보면, 그 안에서 우리는 두려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능력이 없으면 인생 밑바닥의 쓰레기가 되어 사회로부터 추방될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 추방에의 두려움과 능력의 관계를 외모로 연결지으면 좋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말을 듣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못생겼으면 내 집에서 당장 나가!"
엄마와 아빠가 각각 대못을 박은 빠따와 빠루를 들고 현관 앞에서 그렇게 소리치는 것 같습니다.
그 앞에서 누군가는 잘못했다고 싹싹 빌며 지금보다 더 열심히 알바를 뛰어 전신성형을 한 뒤 엄마아빠에게 자랑스러운 존재로 거듭나겠다고 사죄합니다. 다른 누군가는 자기보다 더 못난 이들도 연예인이랍시고 네안데르탈인처럼 생겼어도 미남이라고 찬사를 받는데, 그렇게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자기를 이런 식으로 취급하는 것에 대한 모욕감을 느끼며 화를 더 쌓아갑니다.
지금 부모에게 자기 외모의 가치를 증명하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그 증명이 인정되어야 자기 존재의 정당성이 생긴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의 양육에 순응하거나 반항하거나, 그럼으로써 의존하거나 독립하거나, 그 둘은 동일하게 부모에 대한 집착입니다.
부모라고 하는 기준이 없으면 자기는 살 수 없다는 뿌리깊은 믿음이 그 집착의 내용입니다.
양육과잉의 현실에 크게 노출된 이에게 이러한 믿음이 종교적 율법처럼 굳게 자리잡습니다.
능력주의를 논하면 끝이 없을 것 같습니다. 괜히 복잡해집니다. 생존을 위해서라는 허울좋은 합리화도 언제나 가능해집니다. 그러나 능력주의가 실은 외모주의에서 비롯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조금 더 단순해집니다.
외모주의는 양육에 그 뿌리를 둡니다.
외모에 대한 집착은 양육에 대한 집착입니다.
양육과잉의 관계를 지속하고자, 외모를 칭찬받기를 갈구하고, 그 의도를 은폐함으로써 능력에 대한 인정을 갈구하게 됩니다. 이렇게 변주되어갈수록 불만족도는 더욱 높아집니다. 이것이 언제나 양육의 끝입니다.
외모도 반드시 질리고, 능력도 반드시 한계에 부딪히듯이, 양육은 반드시 불만족으로 끝이 납니다.
더는 예쁘게 보이지 않는 것을, 억지로 계속 예쁘게 볼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양육과잉의 관계를 건강하게 청산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르게 보는 법입니다.
'예쁘게 보기'가 아니라 '낯설게 보기'가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낯선 것만이 사랑의 소재가 됩니다.
그래서 사랑은 양육에의 집착이 끝난 뒤에야 비로소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사랑이 능력주의의 반대편에 위치한다는 사실 또한 자명해집니다. 우리가 오늘날 늘 힘들었던 것은 능력주의의 저주에 걸려 언제나 사랑의 반대편을 향해 쫓겨왔던 까닭입니다.
빠따와 빠루를 든 이들 앞에서 이제 이렇게 말하는 일은 어떻겠습니까.
"저는 못생긴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낯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지루한 무력감으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처음으로 사랑을 시동거는 이로 시작하고 있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