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인드버블: 심리적 버블에 갇힌 시대"
지금은 심리적 버블이 크게 팽창해 있는 시대, 마인드버블의 시대입니다.
더 많은 걸 경험해서 마음의 레벨업을 하고, 그렇게 성장한 자기의 이야기를 더 많이 해야 한다며 심리적 버블만 부풀리고 있습니다.
거품경제가 아닌 이제는 거품심리입니다.
인간이 자기 마음이라는 걸 가진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겨난 일입니다.
그 전에는 왕과 귀족과 상류계급을 위해 살았습니다. 대다수의 인류는 자기 마음이라는 것을 가질 수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최대한 개인적 감정은 느끼지 않고 참으면서, 보편적 진리를 위해 버티며 사는 법을 예찬하는 것이 미덕으로 믿어졌습니다.
마음은 특권계급만이 향유할 수 있는 사치재라고 인식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왕자가 GTA 속에서처럼 사람들을 패고, 아녀자를 희롱하며, 좋아보이는 것은 다 자기의 것으로 취합니다. 누군가가 그에게 묻습니다.
"대체 왜 이러시는 거죠?"
왕자가 대답합니다.
"내 마음이야."
이렇게 '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특권계급이 아니었던 대다수의 인류에게는 양가적인 소재가 되었습니다.
선망의 소재이자, 동시에 비난의 소재입니다.
욕망과 윤리의 이분법은 이렇게 출현합니다.
자기는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으면서, 남이 그 자신의 마음대로 하는 것은 열렬히 비난합니다.
이 분열이 곧 내로남불입니다. 자기의 욕망을 소외시키는 만큼 씹선비화는 가속됩니다. 역으로 윤리를 소외시키면 찐광대들이 생겨납니다. 전자를 위선이라고 부르고, 후자를 위악이라고 부릅니다.
오늘날도 이 분열이 외적으로 가시화된 형태의 갈등이 펼쳐집니다.
욕망에 경도된 찐광대들과 윤리에 경도된 씹선비들이 서로를 혐오하며 아마겟돈을 펼칩니다.
이 둘에게는 세상에 자기들 같은 두 부류의 인간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찐광대들에게 사이비짓 좀 그만 하고 사기 좀 그만치라고 하면, 마치 그 말을 한 이를 씹선비처럼 보며 조롱합니다. 반대로 씹선비들에게 훈장질 좀 그만 하고 꼰대짓 좀 그만하라고 하면, 이제 그 말을 한 이를 민도 낮은 무개념한 우민으로 보며 비난합니다.
두 병신이, 세상 모든 것을 다 병신으로 만들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이 두 병신이 공통적으로 심리적 버블을 만들어내는 주 원인입니다.
버블은 과잉평가된 것입니다.
과대도 과잉이고, 과소도 과잉입니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어서 자기도 돈만 많으면 왕과 같은 특권계급이 되어 '내 마음'이라는 것을 원없이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찐광대들입니다. 이들은 '내 마음'이라는 것을 과대평가합니다.
그러니 자기의 정체성이라는 것도 이에 따라 과대평가됩니다. 자기는 무슨 천재고, 영웅이며, 세상 모든 것을 다 아는 대현자입니다. 어디에서나 제일 귀하게 대접받아야 마땅한 인물이며, 모두가 자기에게 우쭈쭈 해주는 일은 이들에게는 헌법에 써있기라도 한 양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내 마음'이라는 것보다는 '집단의 마음'이 중요하다며 '내 마음'을 과소평가하려는 이들이 씹선비입니다.
이들은 사실 '집단의 마음'이라는 추상적 허구에 위탁하여 '내 마음'을 은근슬쩍 누리고 싶어하는 수줍은 이들입니다. 자기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면, 자기가 남들을 비난했던 그 방식으로 자기도 욕먹을 것 같으니, 이념적 대의를 걸고 그 아래서 안전하게 자기 마음을 실현하려는 조금 꼬인 이들입니다.
그래서 이 두 병신은 각기 '노출증'과 '관음증'의 증세를 갖습니다.
성형과 보정과 두 사이즈 작은 속옷이 만들어낸 놀라운 결과물을 노출하며 뽐내고 있는 찐광대의 인스타를 즐겨찾기해놓고 슬그머니 들어간 씹선비들은 세상에 이런 한심한 애가 다 있냐고 위로는 엄숙하게 비난하면서 아래로는 자위하기에 바쁩니다. 이러한 씹선비 열성팬들이 많아 찐광대들은 먹고 삽니다.
이들은 상호기생체입니다.
이들이 표면적인 대립과 심층적인 동업으로 만들어가는 현실이 바로 쇼입니다.
대한민국 쇼 공화국은 이들의 탁월한 작품입니다.
거품쇼입니다.
"젊은 것들 자기만 알지 큰 그림을 볼 줄 몰라. 즉흥적 쾌락에만 몰두할 뿐 성실하게 백년대계를 그리지 않는다구. 피땀흘려 겨우 세운 민주주의, 참 멀었다."
"무슨 말씀? 저희 젊은 사람들도 미래와,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지속가능한 행복에 대해 저희만의 생각이 있다구요. 당신들의 생각과는 다를지 몰라도, 우리도 우리의 삶을 진지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구시대의 중앙집권적 제도권과는 다르게, 우리는 모두가 애씀없이 행복할 수 있는 진정 평등한 탈중앙적 마음의 민주주의를 향해 갑니다."
586 부모와 그들의 20대 자녀 사이에서 이루어질 법한 이 촌스럽고 저질스러운 대화가 실은 거품쇼의 주요 각본입니다.
이 둘은 공통적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왕이다."
그리고 왕을 실현하는 방법론에 대해 이들은 표면적인 의견차를 보일 뿐입니다.
"개인의 욕망을 실현하는 자유가 왕을 이루는 길이라구요!"
"어허 무슨 말씀, 자고로 왕이란 윤리를 실현함으로써 모두를 평등하게 만드는 존재이거늘."
그러다가 이 두 병신을 통합하려는 가장 병신이 나타나 상냥하게 웃으며 말합니다.
"욕망과 윤리, 자유와 평등, 최신의 정보와 고대의 지혜, 왜 이 둘 사이에서 싸우고 계시죠? 이 둘은 인간에게 다 필요하며 둘 다 너무 좋은 것들 아닌가요? 두 개의 가치를 온전하게 인정하고, 그 둘 다를 온전하게 하는 것이 진정한 왕 아닐까요?" (빙긋)
찐광대는 츤데레 같은 표정을 지으며, 씹선비는 수줍게 머리를 긁적이며, 이제 등장한 이 대현자의 말에 숙연하게 고개를 끄덕입니다.
요즘 늘 어디서나 반복되고 있는 지랄쇼의 엔딩입니다.
이 쇼들에 미친듯이 환호하며 내뱉는 관객들의 이산화탄소 가스가 심리적 버블을 가득 부풀립니다.
"우리는 할 수 있다! 왕이 될 수 있어! 내 마음은 반드시 왕의 길을 찾아낼 거야!"
'내 마음'이라는 것을 왕과 같은 특권계급이 되는 소재라고 간주하기에, 이 모든 일이 생깁니다.
그러니까 노예의 신분에서 풀려난지 얼마 안되는 이들이, 비루했던 노예생활에 대한 반동으로 자기들이 그 반대편에서 보아왔던 왕을 향해 열렬하게 달려가고 있는 상태와 유사합니다.
욕망껏 더욱 힘차게 달려가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또는 그러면 구시대의 압제적 왕과 다를 게 뭐가 있겠냐며 이웃들과 함께 가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그 둘은 다 왕에 대한 과잉된 집착을 드러낼 뿐입니다.
양반문서를 산 노비들이 더욱 과잉되게 양반스러움에 대한 훈육을 하는 일과도 같습니다. 대체로 한국의 유교가 몰락한 것은 양반인 척하려는 전직 노비들의 열등감에서 비롯한 과잉된 신분세탁의 의지에 기인한 바가 큽니다.
이처럼 찐광대나 씹선비나 실은 똑같은 애들입니다. 실제적인 차원에서, 돈과 인기를 통해 대중적 성공을 얻은 찐광대들이 바로 씹선비가 되어 사람들에게 인생을 가르치려는 모습을 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이 둘뿐만이 아니라, 둘의 쇼에 갈채를 보내는 관객도 똑같습니다. 이 셋은 버블트리오입니다. 신성을 구성하는 삼위일체의 개념처럼, 이 셋은 왕의 삼위일체론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 시대의 기초이념입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열렬하게 왕에 집착하며 왕을 추구하고 있는 이는 왕인가요?
그건 노예입니다.
여전히 노예입니다.
왕이 되어야 한다고 소리높여 외치고 있는 한, 당당하게 왕으로서 자기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한, 그는 더욱더 노예입니다.
이것은 그저 왕이라는 꿈의 거품만 부풀리는 방식입니다.
침대에 누워 꾸는 백일몽과 동일합니다.
그리고 거품경제만큼이나 거품심리는 반드시 터집니다. 타격은 더욱 큽니다. 가장 부풀어오른 풍선이 터질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점점 커지는 그 형상에 공포스럽고, 긴장되며, 숨이 막힙니다. 뻥 하는 굉음과 함께 익숙했던 세상이 날아갑니다. 쌓아왔던, 그리고 쌓아졌다고 믿었던 그 모든 것이 허공으로 흩어집니다.
사실 마음은 가장 되어야 할 바대로 된 것이기도 합니다.
이게 이제 중요한 이해입니다.
오늘날 심리적 버블이 생겨나는 과정을 잘 살펴보면, 거기에는 반드시 남의 시선이 있습니다.
남의 시선에 입각해 우리는 자기 마음을 부풀립니다.
이것은 과거의 노예일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현실입니다.
과거에는 남을 위해 살았다면, 이제는 남에 의해 삽니다. 그 기준은 언제나 남입니다. 실은 같은 것입니다.
노예의 신분에서 해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노예의 행동양식을 지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왕족인 재네만 자기 마음대로 사냐, 나도 자기 마음대로 살아야지."라고 우리가 말할 때, 여기서 '내 마음'이라는 것은 '왕의 마음'인 것처럼 정확하게 착각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왕의 눈에 비추어 그 기준으로 자기를 평가하는 노예의 태도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노예는 계속해서 왕이라고 하는 것에 속박됩니다. 평생 왕의 노예로 남습니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 추구하는 '내 마음'이라는 것은 환상에 불과합니다.
허구의 것, 정말로 거품과도 같은 소재입니다.
그렇다면 커지고 있는 버블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우리에게는 분명해집니다.
'노예의 정체성'이 바로 버블입니다.
정체성은 얇은 막과 같습니다. 정체성은 마음을 가두는 막입니다. 자기 안에 어떠한 마음을 가두면 그 마음을 소유할 수 있고, 결국에는 그 마음과 같은 자기가 될 수 있다고 믿기에 만들어지는 것이 정체성입니다.
곧, 정체성은 마음에 대한 소유의 논리가 만든 마음의 감옥입니다.
노예의 정체성은 이 세상에서 남들이 칭찬하는 모든 것을 왕의 조건이라고 보며, 그것들을 다 자기 안에 소유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노예의 정체성 안에 가스가 가득 차게 됩니다. 점점 부풀어오릅니다. 소화될 수 없는 것을 가득 먹어 배가 터질 것처럼 차오른 상태와도 같습니다.
당연히 그 안에 든 것은 '내 마음'이 아닙니다.
그게 정말로 내 것이었으면 이미 소화되었을 겁니다. 나의 양분이 되었을 겁니다. 필요한 양분 이상의 것은 한참 전에 똥이 되어 나왔을 겁니다. 거품처럼 팽창할 이유가 없습니다.
한 개인이 '노예의 정체성' 안에 '왕의 마음'이라는 것을 담고,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자기가 왕이 될 수 있다고 믿으며 지속하고 있는 것이 이 심리적 버블의 현실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왕이 되는 일이 아니라, 노예의 정체성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노예의 정체성에서 벗어나는 일과 왕이 되는 일은 동의어가 절대 아닙니다.
그렇게 보고 있는 것이 바로 노예입니다.
노예의 세상에는 노예와 왕밖에는 없습니다. 여기에서 이분법은 출발합니다. 욕망과 윤리니, 자유와 평등이니, 그리고 그 대립들의 통합이니 등과 같은 온갖 쇼를 위한 장치를 마련한 뒤, 노예는 계속해서 노예쇼를 펼칩니다. 무대 위에서 엉덩이를 흔들며 춤을 추고 있으면 언젠가는 자기가 왕이 될 거라 믿으면서, 또는 놀이터에서 아이들에게 홈런볼을 평등하게 나눠주며 여여한 미소를 짓고 있으면 그렇게 될 거라 믿으면서.
사람은 다만 자유인입니다.
자유인은 노예도 왕도 아닌 것입니다. 그 둘 다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건 곧 심리적 버블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으로 산다는 말의 의미는 '마음이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거품막에 갇힌 가스가 빠져나올 때 가스는 자유로워집니다.
허공으로 흩어지는 일, 그것이 마음이 바라는 바입니다. 가장 되어야 할 바대로 되는 일입니다.
마음은 자유롭기만을 바랍니다.
심리적 버블은 마음이 지금 정체성 안에 갇혀 있다는 방증입니다.
찐광대나 씹선비나, 그들에게 환호하는 관객이나, 다 마음을 가두고 있는 삼위일체의 간수들입니다.
노예는 자기가 가장 가두어져 있었기에, 가두는 일밖에는 모릅니다. 또한 자기가 가장 소유되어 있었기에, 소유하는 일밖에는 못합니다.
계속 해봤자, 노예일 뿐입니다.
'내 마음'으로 사는 일은 영영 멀어집니다.
자기의 정체성 안에 갇힌 마음의 형상을 지칭하는 표현이 바로 마인드입니다. 그래서 이 심리적 버블의 현상을 마인드버블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마음은 마인드라는 감옥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마인드는 '소유된 마음'입니다. 그리고 '내 마음'으로 산다는 것은 '마음을 소유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 왕의 기준을 따르거나 혹은 자기만의 기준을 가진 또 다른 왕이 되는 일을 거부하는 삶을 뜻합니다.
개념없는 왕자도 자기 마음으로 살고 있던 것이 아닙니다. 그도 왕이라는 마인드에 치여 자기 마음을 잃은 이입니다. 이 시대의 모든 찐광대와 씹선비가 이 개념없는 왕자의 상태입니다.
심지어는 왕조차도, 과거의 그 어떤 특권계급조차도, '내 마음'이라는 것을 온전하게 가졌던 적이 없습니다. 다들 특권계급의 마인드에 종속되어 살았던 이들입니다.
애초에 우리는 가장 물이 없는 곳을 물이라고 보며 그 허구를 쫓고 있던 것과 같습니다.
허구는 깨집니다. 버블은 꺼집니다.
더 빠르게, 상처없이도 할 수 있습니다.
필요한 양분은 살이 되고, 나머지는 흩어지는 일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면 이 살의 몸은 언제나 자유의 공기 속에 위치하게 됩니다.
이게 우리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바라왔던 그 현실입니다.
사람이 자유로운 현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