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징역살이"
자기가 만든 환상에 갇혀 그 환상에 욕도 못내는 우리다. 화도 못내는 우리다.
명령문 같은 언어가 빼곡히 적힌 종이로 자기가 접은 환상의 노리개 앞에 조아리며 우리는 아양을 떤다. 그 앞에서 착한 아이인 척 연기를 한다.
우리가 보는 것은 다 이 환상이다.
우리가 경험한 엄마는 실제의 엄마가 아니다. 우리는 실제의 엄마가 정말로 어떤 존재인지 모른다. 우리는 다만 우리의 환상만을 보고 있었을 뿐이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만들어낸 환상이다.
때문에 그 환상에 욕을 한다고 실제의 어떤 사람에게 나쁜 일이 생기지 않는다.
언어에는 그런 힘이 없다.
초자연적이고 마법적인 힘이 언어에 깃들어 있어서, 그런 말을 하면 그 대상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 것은 영유아의 상태다.
어렸을 때 "엄마 맘마!"라고 언어를 발화했더니 엄마가 즉각 일어나 밥을 갖다주길래, 마치 자기의 언어에 모든 것을 조종할 수 있는 마법적 힘이 있다고 착각하게 된 인지적 오류다.
이 언어의 착각이 낳은 오류는 사실적으로 확인되지 않는 한, 계속 되먹임되어 커다란 환상으로 자라난다.
그 거대하고 신성해진 면모에 눌려 환상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된다. 환상은 신성화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만든 환상이, 우리 위에 군림하게 되는 것이다.
신성화되어 있는 어떤 환상을 욕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환상에 진짜와 같은 권위를 부여하고 그걸 섬기고 있는 게 문제다.
자기가 만든 환상들에 쫄아서 그 환상들을 자상한 표정으로 달래고 있는 이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또는 환상들 앞에서 혼나지 않으려고 열심히 엉덩이춤을 추며 재롱을 부리고 있는 모습을 떠올려보자.
이런 것이 비루한 징역살이의 모습이다.
마음을 사는 것이 아니라 감옥을 사는 것이다.
마음이 마치 감옥이고, 고통의 소재가 된 것이다.
감옥이 아닌 자취방에서는 이와는 다르게 환상을 막 다룬다. 친구들끼리 모여 자기가 마음에 드는 이성 얘기를 원색적으로 하고, 꼴보기 싫은 직장동료 얘기를 내키는 대로 한다. 그렇게 서로의 환상을 나누며 시간은 깊어간다.
이 일은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다. 실제의 그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자기 환상일 뿐이다. 그리고 그 환상이 재미있게 나누어질 시공간이 있을 뿐이다.
마음살림의 장이란 이런 것이다.
환상의 형상으로 마음이 변질되어 우리가 징역을 살지 않도록, 환상의 감옥으로부터 마음을 해방하는 것이다. 감옥 밖으로 자유롭게 흐르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만든 것을, 우리 자신을 위해 향유하는 일, 이것은 자연스럽고 또 당연하다.
마음살림은 또 하나의 초자연적이고 마법적인 환상의 일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 당연해지는 자연스러움을 회복하는 일이다.
이것을 자유라고 말한다. 징역살이는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