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일진의 탄생"
"으아니!? 네 놈... 이런 힘을 숨기고 있었다니...!"
그동안 자기를 무시하던 이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마법과도 같은 '이런 힘'의 소재가 오늘날 심리학입니다.
찐따처럼 스스로를 인식하던 이들이 심리학이라는 언어를 활용해 마법소녀처럼 자기를 변신시킵니다. 이제 인생 좀 알겠다는 듯이, 멍청하게 세간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당당하게 펼쳐가는 동시에, 자기만큼 특별한 동료들과 유대관계를 형성하여 집단 내의 상류계급으로 자리잡음으로써 인생이라는 무대 위에 우뚝 선 진정한 주인공으로 거듭나는 연출이 이루어집니다.
어렸을 때 이 찐따들을 괴롭히던 일진들의 상태이며, 그 일진들에게 얻어 맞으면서도 동경의 눈길로 일진들을 바라보던 찐따들이 나이를 한참 먹은 뒤에 심리학을 통해 일진을 실현하고자 하는 그 상태이기도 합니다.
이게 바로 심리학 일진입니다.
잘생기지도 않고, 돈도 없고, 덩치도 작고, 옷도 못입고, 싸움도 못하고, 그렇다고 공부를 잘하지도 않은 이들이, 자기네 엄마가 해준 얘기처럼 자기가 공부만 안할 뿐 머리는 좋다고 생각하며, 남들이 다 성년이 되어 일진놀이를 관두고 열심히 일할 그 시간에 홀로 심리학 잡지식을 열심히 암기하여 자기도 일진이 되고자 하는 의도가 이러한 상태를 만듭니다.
심리학 일진이 되고자 하는 이들에게 '일진'이라는 것은 매우 특별한 평가 속에 있습니다. 그것은 남들과는 완전히 다른 계급의 왕자와 공주 같은 특별한 존재의 표상입니다.
이 시대에 만연한 일진미화물을 보며 환호하는 무수한 미숙아들처럼, 이 심리학 일진 워너비들 또한 아무리 나이를 먹었어도 일진이라고 하는 것을 늘 가장 멋진 영웅상으로서 그들의 가슴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리학적 언어를 활용할 뿐 이들의 활동 속에 담긴 의도와 실제적인 내용은 일진들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 일진: "돈 얼마 있냐? 뒤져서 나오면 100원당 한 대다?"
- 심리학 일진: "소외된 마음 얼마나 있으시죠? 그 약하고 불쌍한 아이가 지금 울고 있는 게 보이는데요?"
이들은 동일한 활동으로, 공갈 대신에 공감을 할 뿐이며, 삥을 뜯는 대신에 뻥을 칠 뿐입니다.
"살려는 드릴게."라며, 살려는 줄 수 있는 특별한 존재로서의 자기의 권위를 인생 마스터처럼 세우고자 합니다.
"학교 공부 따위에 배울 게 뭐가 있는데? 더 중요한 건 동료들에 대한 상냥함과, 실전의 경험을 통해 체화한 살아있는 지식이라구."라고 말하는 일진들처럼, 심리학 일진들 또한 제도권을 무시하고, 전문성을 조롱하며, 오로지 자기의 생각과 경험만이 유일하게 가치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남들보다 앞서고 우월한 인생을 살았다고 간주하는 만큼, 가장 인간답게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일에 진심인 것이 일진들입니다. 동일하게 심리학 일진들도 자기가 심리학을 통해 진취적인 선구자로서의 인생을 살고 있다고 믿는 만큼 남들에게 인생스승처럼 행세하려는 일에 목숨을 겁니다.
정말 재미있는 점은, 그래서 일진들이 자기를 대단히 윤리적인 존재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사회에서 정한 억압적 율법과는 다르게 자기들은 무엇이 올바른지에 대한 진정한 신념과 자유의 정신으로 움직인다고 믿습니다. 깡패들이 정도(正道)를 사는 협객인 척 구는 모습과 같습니다.
심리학 일진들의 입에서도 늘 윤리, 도덕, 신념과 같은 이야기들이 발화됩니다. 이들은 독재자에게 시달리는 중세판타지세계로 날아가 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초월적 영웅인 것처럼 자기를 곧잘 입지화하곤 합니다. 그 누구도 억압적으로 통제하지 않으면서 백성들 스스로가 자율적으로 자유와 평등을 이루어가도록 돕는 무위의 덕을 통해 통치하는 성군인 척합니다.
모든 마음이 다 평등하고 온전한 마음의 민주주의 따위를 주장하는 것이 심리학 일진들의 대표적인 특징입니다. 그러한 마음의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도록, 누군가가 소외시킨 마음을 자기가 온몸으로 끌어안고 수용함으로써 그 마음의 온전함을 대신 밝혀준다고도 말합니다.
"끄으아아악.....! 그래... 이런 마음이었구나.... 후훗. 그 마음도 괜찮았던 거야. 당신, 괜찮은 사람이에요."
무슨 일진들 패싸움에서 벌어지는 일 같습니다.
"씨발 형규 그 새끼 어디 갔냐? 니가 대신 쳐맞을래?"
"끄으아아악.....! (니들이 닌텐도 스위치 안사주는 나쁜 부모 때문에 고생하며 배달알바하는 형규 마음을 알아?) 후훗. (그래 형규야, 넌 참 괜찮은 녀석이야. 정말 멋지고 풍요로운 마음을 가진 내 친구다. 너와 친구인 게 자랑스럽다.) 더 쳐봐 이새끼들아!"
이처럼 일진들과 심리학 일진들은 그 활동의 의도와 내용이 전적으로 동일합니다. 전적으로 쪽팔리고 촌스럽습니다.
여기에서 어떤, 대단히 투박하고 무식하고 극성스러운 불도저 같은 기운을 우리가 눈치챈다면, 이는 심리학 일진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가늠하는 데 유용한 이해를 제공합니다.
이 기운은 소위 맘충이라고도 불리는 맹목적 양육자의 기운입니다.
일진들은 그 누구보다도 이 맹목적 양육자의 기운과 가장 연루되어 있는 이들입니다.
자기의 가슴속에 맹목적 양육자를 모시며, 절대적으로 그에 의존해서 사는 이들입니다.
심리학 일진들은 더 노골적입니다. 이들은 심리학이라는 이름으로, 마음의 가장 깊은 자리에 맹목적 양육자를 위한 왕좌가 놓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입니다.
오늘날 가장 인기있는 대중문화의 소재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일진이며, 다른 하나는 양육자입니다.
이 둘이 결합하면 맹목적 양육자입니다.
그리고 맹목적 양육자를 다루는 콘텐츠가 시대적 인기를 구가합니다.
"우리 아이를 지켜야 해요."
이 절대화된 기치하에, 일진과 양육자의 통합은 이루어집니다.
약한 이들을 지켜가는 착한 정의의 일진 히어로들에 대한 이야기라든가, 알고 보았더니 우리의 부모가 자식을 지킬 수 있는 놀라운 초능력을 가진 존재들이었다는 식의 이야기들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일진이면 일진답게 약한 아이들을 지켜주며, 그들도 멋진 일진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공부도 시켜주고 싸움도 가르쳐주는 방식으로 도와야지. 그게 자고로 올바르게 살아가는 진정한 인간의 법도인 것이거늘"
그래서 오늘날 인기있는 콘텐츠들에서는 다 쉰내가 납니다.
조선말에 양반문서를 사서 훈장행세를 하던 할아버지에게 가스라이팅된 엄마가 치맛바람을 일으킬 때 나곤 하는 그 냄새입니다.
그런 엄마 밑에서 양육된 미숙아들이 커서 일진물이나 만들거나, 심리학 일진이 됩니다.
일진 및 심리학 일진의 탄생과정을 살펴보면, 그들은 공통적으로 찐따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이들은 찐따라고 하는 것에 대한 양가감정을 갖고 있습니다. 찐따를 도와주려고 하면서도, 동시에 찐따를 짓밟고 싶어합니다.
자기네 엄마가 자기한테 하던 그 짓과 동일합니다.
원래 어떤 대상을 향한 구원의 욕망과 파괴의 욕망은 정확하게 동일합니다. 가장 아이에 대해 극성인 양육자가 양육을 포기하게 됩니다.
애착이라는 것이 원래 양가적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통제의 의도와 연결됩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이상대로 대상이 통제되지 않으면, 차라리 그 대상을 파괴하고 싶어집니다. 통제되지 않는 것을 계속 통제하려는 일은 너무나 막대한 애너지의 손실을 가져오는 까닭입니다. 흡사 그 대상이 자신을 피말려죽이려는 것처럼 경험됩니다. 거의 지옥입니다.
한 일진이 자기한테 귀엽게 구는 찐따를 멋있게 만들어주기 위해 옷가게에 가서 이런저런 옷들을 입혀보다가 결국 찐따가 우물쭈물하며 자기가 권한 옷을 구매하려 하지 않으면, 바로 밖으로 데려가 패는 일은 자주 일어납니다.
자기가 찐따를 구원하고자 하는 의도가 좌절되었기에 "이 배은망덕한 새끼! 존나 찐따인데도 같이 놀아줬더니 이딴 식으로 사람 엿먹인다 이거지?!"라며 그 구원의 의도가 바로 파괴의 의도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찐따'를 '아이'로 바꾸어보면, 우리는 구원자처럼 행세하려는 맹목적 양육자와 아이 사이에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쉽사리 이해해볼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이를 마치 불쌍하고 약한 피구원자로서의 찐따처럼, 또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자기가 돌봐야 할 아이처럼 보려고 하는 심리학 일진들은, 실은 사람과 마음을 파괴하고자 하는 의도 속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자기 엄마가 자기에게 했던 방식 그대로 다른 사람과 자기 마음에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리학 일진은 이처럼 언제나 자기를 가장 괴롭게 만들었던 인물의 모습이 되어, 그 모습으로 다른 이들에게 상냥하게 미소짓고 있는 이입니다.
맹목적 양육자에게 희생되어 찐따가 되었던 이가, 이제는 맹목적 양육자를 벗어나 자기를 극복했다며 하고 있는 일은 자기가 내사한 그 맹목적 양육자를 외현화하는 일뿐입니다. 이것을 일진이라고 합니다. 일진은 맹목적 양육자의 다른 이름입니다.
언어적으로는 왠지 반대편에 있을 것 같은 일진문화와 양육문화가 실은 동일한 원리로 펼쳐진다는 것을 이해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야 심리학 일진들이 맹목삼천지교(盲目三天之敎)라고 말할 수 있는 자기의 맹목적 양육자의 가르침대로, 이 삼천세계를, 세상 전부를 자기의 나와바리로 삼으려 하는 꿈을 꾸는 찐따들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다시 기억해봅시다.
오늘날의 맹목적 양육은 일진의 활동이며, 일진은 맹목적 양육자의 기운으로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심리학 일진은 심리학의 권위를 빌어 자기들의 슬기로운 일진생활을 꿈꾸는 찐따들입니다.
일진을 동경하고 숭상하는 이 미숙아들에게 심리학이 남용되는 일은 아무래도 조금 많이 속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