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게 뭐죠?"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생명의 관점에서는 의외로 분명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유의 증진'입니다.
세대를 거듭하여 더욱 분화되고 확장되는 종적 다양성은 자유의 실천적 결과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이처럼 삶과 자유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가 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렵습니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아, 알았다."라고 해서 완료될 수 있는 답이 아니라, 우리의 구체적인 현실에 적용될 수 있어야 비로소 기능하는 답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우리는 어떻게 자유롭게 살 수 있는가?'라고 묻는 편이 나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자유로운 삶을 상상할 때 매우 당연하게 부속시키는 두 개념이 있습니다. 하나는 '힘'이고 다른 하나는 '독립'입니다.
무력하면 자유로울 수 없다고 우리는 상정합니다. 자유의 증진이란 곧 힘의 증진입니다.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증대된 딱 그만큼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꿈꿉니다.
의존적이면 자유로울 수 없다고 우리는 상정합니다. 자유란 스스로가 당당한 주체로 섰을 때 가능한 일이라고 평가됩니다. 다른 누구의 말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똑같은 인간으로서 자기의 목소리를 내는 일이 곧 자유를 실현하는 일과 관계되는 것 같습니다.
'힘'이 없어 '독립'하지 못한 자, 그 이름은 '노예'입니다.
노예는 무력하기에 늘 남들의 눈치나 보고, 자기보다 강한 자에게 의존해 그의 명령을 받으며 살아가는 수동적 존재로 보입니다.
이러한 노예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많은 이들은 심리학을 배우고, 심리상담을 받으며, 또는 명상을 시작하고, 영성을 추구하곤 합니다. 소위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완벽하게 노예의 상태에서 벗어나 영구한 독립적 힘을 획득하게 되는 개념인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상담이나 수행의 경험을 쌓다보면 곧잘 자유가 증진되는 것 같은 체험들이 일어납니다. 꼭 이러한 활동이 아니라 하더라도, 불현듯 일상에서 자유의 체험들이 종종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개인의 문화적 배경에 따라 그 체험의 내용들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공통적으로는 '인식의 확장' 경험이 일어납니다. 광대하게 열린 인식 속에서 그 전까지 살아왔던 자기 자신의 모습이 아주 작게 보입니다. 이것은 물리적으로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 아니라, 매우 좁은 사고방식 안에 갇혀 아주 작은 모습으로 죄인처럼 위축되어 살아온 자기 정체성을 인식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확장된 인식 속에서는 그러한 자기의 모습뿐만이 아니라 자기를 둘러싼 세계의 모습도 잘 보입니다. '작은 자기'가 그 전까지 거대하게 보았던 여러 대상들이 실은 자기와 별다를 것 없는 존재라는 이해도 생겨납니다. 자신보다 더 잘날 것도 또 더 못날 것도 없는 다양한 삶의 모습들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그동안 자기가 얼마나 자기 생각 속에서 그 모든 대상을 위압적으로 평가해왔는지, 또 그렇게 스스로를 얼마나 초라한 노예처럼 만들어왔는지가 떠오르며 문득 웃음이 나옵니다.
'아, 이게 온전함이란 거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자기는 이제 좁은 생각의 감옥에 갇힌 노에의 상태에서 막 벗어난 것 같습니다. 해방감을 경험합니다. 정신적인 독립을 이룬 것 같습니다. 이제야 자기 삶의 주인으로 당당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쫄 것 없잖아? 너도 사람, 나도 똑같은 사람인데."
그래서 이러한 체험들 이후, 체험의 주체는 공중부양을 하듯 자신이 얻은 상태에 도취됩니다.
자신은 주인공이고 이 삶은 자기를 위해 펼쳐진 무대이기라도 한 양 과잉되게 행동합니다.
굳이 못생긴 얼굴로 셀카를 찍고, 굳이 촌스러운 옷을 자랑하며, 굳이 잘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합니다.
일종의 위악적인 태도가 생겨납니다.
이것은 그 전까지 억눌렸던 자기 자신의 자유를 되찾은 것만 같은 그 반동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매일 공부만 하다가 명문대에 들어간 이가, 노티나는 얼굴에 괜히 머리를 형광색으로 염색해 스케이트 보드를 타며, 자기는 중고등학교 때부터 술담배도 하며 좀 놀았던 자유로운 존재인 양 구는 모습과 유사합니다.
자기의 힘으로 자유를 쟁취하고 독립을 실현했다는 생각이 이러한 현실을 만듭니다.
이들은 일종의 운동권 투사와 비슷한 상태가 되어, 대표적인 두 가지의 특성을 드러냅니다.
첫 번째는, 스승연입니다. 이들은 자유를 증진하는 데 성공한 일종의 입지전적 인물로 자기를 설정하여, 매우 자주 남들에게 스승으로 보이고 싶어합니다. "당당하게 너의 이야기를 해." 등의 표현이 이들의 단골대사입니다.
두 번째는, 불통입니다. 이들은 자기의 자유만큼 타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듯한 정치적으로 공정한 태도를 연출하지만, 실은 타인을 자기 아래로 봅니다. 자기에게는 놀라운 체험이 있고, 그 체험이 남들과 자기의 수준을 구분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타인이 자기 아래에 위치할 때만 이들은 타인에게 자비심과 공감능력이 넘쳐나며, 그렇지 않을 때는 남의 말을 안 듣습니다. "니가 뭔데 나한테 명령하는데?" 등의 대사가 이들의 본질적 태도를 함축합니다.
이러한 이들이 결국 남의 말을 들을 때는, 듣는 일이 직업인 상담사 등의 형태로 돈을 벌어야 할 때나, 또는 자기보다 더 대단해보이는 스승이 있을 때나, 아니면 상대를 잘 구슬려 섹스를 하고 싶을 때뿐입니다.
돈과 권위와 섹스, 이 소재들이 결국 이들이 자유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수렴되는 전부입니다.
매우 작은 자유의 형상입니다.
아주 엄밀한 표현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말하는 것은 유용합니다.
자유도 발달합니다.
자유의 상태도 질적으로 점점 더 그 수준이 심화됩니다.
자신이 무력하고 의존적인 노예라고 생각하던 이가 이제는 힘을 가진 독립적 주체가 되었다고 믿게 된 그 경험은 자유의 발달수준에 있어 아주 미약한 한 걸음일 뿐입니다.
심지어 이러한 상태에의 고착은 이미 자유도 아닙니다.
이를테면, 자신이 이제 정신적으로 자유로운 존재라고 상정하는 이는 늘 자신을 과잉된 능동성의 형태로 드러내려고 합니다. 당당하게 자기의 이야기를 하는 '독립'의 모습을 유지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의존적인 형태로 추락할 것을 늘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이들이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것입니다. 남의 말을 듣고 따르는 일은 아주 의존적인 노예들이나 하는 일입니다. 자기에게는 자기만의 고유한 생각과 감정, 또 고유한 길이 있습니다. 그러한 자기의 독립성이 타인에게 함부로 훼손되지 않도록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싶습니다. 누구에게도 기죽지 않으며 언제라도 자신감있게 자기 자신을 주장하고 싶습니다.
이들은 지금 명령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자유로운 내가 되어라!"라는 내적인 명령에 맹목적으로 복종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외부의 명령이나 내부의 명령이나 똑같은 명령입니다.
외부의 명령을 따를 때만큼이나 그는 노예입니다.
심지어는 지금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착각하기에 더욱 노예입니다.
노예들이 가장 많이 하는 일은 싸움입니다. 자기의 자유와 상대의 자유를 충돌시키는 그 일입니다.
내적인 명령을 따르고 있을 뿐이면서 자기가 자유롭다고 생각할 때 충돌은 필연입니다. 이런 식의 자유는 언제나 '자유의 질적 증진'이 아닌 '자유의 양적 팽창'만을 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자유의 양적 팽창은 언제나 자유들 사이의 충돌이 야기하는 모순의 상태를 만듭니다. 이 모순에 대한 자구책으로 시도되는 것이 통합입니다. 그리고 통합의 결과는 만성적인 욕구불만입니다. 무엇을 해도 만족스럽지 못한 불감증은 통합의 원리로 살아가는 이들의 고질병입니다.
자신이 더 팔을 뻗어야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상대의 몸에 가로막혀 자기의 자유를 실현하지 못할 때, 통합이란 이름으로 시도되는 타협은 다만 서로를 불만족스럽게만 만들 뿐입니다.
"자유로운 내가 되어라!"라는 내적 명령이 마치 진정하게 깨어있는 사람이 되는 길인 것처럼 권장될수록 삶의 불만족은 더욱 커져갑니다.
이것은 연명은 하고 있지만, 살아 있지는 않은 상태입니다.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획득한 작은 자유감을 자유의 완성이라고 착각할 때, 우리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자유의 증진은 양적 차원이 아니라 질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자유를 얼마나 더 큰 것으로 상상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면에서 들려오는 외침을 따라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저 거친 황야를 향해 달려가는 이의 모습이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습니다. 그의 자유란 고작해야 할리데이비슨에 달려 있는 아주 작은 것입니다.
심지어 그는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황야를 달리라는 내적 명령을 받고 있는 상태이기까지 합니다.
사실적인 차원에서, 그는 거의 자유롭지 않습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어준다고 가정된 그 양적 소재가 없어도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이것이 질적 차원의 자유를 향한 진짜 물음입니다.
깨달아야만 자기가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또는 자기는 이미 깨달아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깨달음이 없어져도 자유롭다면 이들의 자유는 성립됩니다.
행인 A로 살아도 자유롭다면 우리의 자유는 성립됩니다.
돈과 권위와 섹스가 없어도 자유롭다면 인간의 자유는 성립됩니다.
인간은 많은 생명체들 중에서도 더 거대한 것으로 자유를 상상할 수 있었던 생명체입니다.
더 거대한 자유는 독립도 아니고 의존도 아닙니다. 무력(武力)도 아니고 무력(無力)도 아닙니다. 당당한 주체도 아니고 위축된 노예도 아닙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중도(中道)라고 묘사합니다.
자유는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의 모습에 집착함으로써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명령을 따라도 자기의 자유가 훼손되지 않는다는 사실 속에서, 오히려 하나의 명령을 자신의 자유가 더욱 거대하게 증진될 기회로 삼는 삶 속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실존적 자유라고 말합니다.
산다는 것은 이 실존적 자유를 연습하고, 실현하며, 그에 감동받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