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심리학 #21

"깨달으면 멋있어진다"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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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으면 멋있어진다. 사실이다.


한 선사는 "깨달음은 미용에 좋다."라고도 말했다. 억압하던 기운에서 풀려나 세포들이 활성화되어 피부에서 빛이 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어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깨달음은 패션이다."


이것은 워스트드레서로 뽑히는 이들의 전형적인 모습처럼 노란 바지에, 분홍 자켓에, 연두색 모자를 쓰는 일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절제한 색(色)의 남발이다.


실제로는 억압되어 있는데 자유로운 존재처럼 보이고 싶어하는 이들이 색을 남발한다. 정욕을 흩뿌리는 일과 같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은 패션의 대원칙을 묘사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것은 중도(中道)이며, 곧 '조화로움'을 뜻한다.


조화롭지 않을 때 투박하고, 촌스러워지며, 그 결과로 화만 가득하게 된다. 소위 말해, 멋이 없다.


사람들이 깨달음에 대해 갖는 오해 중의 하나는, 깨달으면 칙칙한 도복을 입고 다니거나, 체크남방에 배바지 패션으로 다니거나, 어디 이상한 파키스탄 민속의상에 낙타뼈 목걸이나 치렁치렁 걸고 다니는 무진장 촌스러운 모습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신비체험을 몇 번 했다고 깨달은 척하고 있을 때나 촌스러워질 뿐, 깨달으면 무조건 멋있어진다.


'인간의 정수'를 살고 있는데 멋있지 않을 수가 없다.


인.간.은. 원.래. 멋.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멋이라는 것은 앞서 말했듯이 조화로움에서 비롯한다.


그렇다면 이 조화로움을 야기하는 핵심은 무엇일까?


바로 '감수성'이다.


감수성은 잘 느끼는 성질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하게 '정서'의 문제다.


정서가 잘 발달한 이들은 세련되었다. 멋이 풍긴다. 멋있어 보이는 명배우들이나 모델들, 예술가들을 보면, 그들의 외모보다 더 크게 작용하는 것이 그들의 정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멋.있.는. 이.들.은. 정.서.가. 잘. 발.달.한. 이.들.이.다.


정서가 발달하지 않으면 아무리 명품을 걸쳐도 촌스러워 보이고, 화려한 색의 옷을 입어도 투박해지며, 감정표현이 미숙해서 화의 형태로밖에는 자신의 내면을 잘 드러내지 못한다.


붓다가 "화 좀 그만 내고 살아라."라고 한 것은 "멋있는 인간으로 태어났는데 촌스럽게 좀 살지 말아라."라고 한 것과 같다.


정서가 미발달되어 있는 이가 억지로 멋있게 보이려고 할 때는 늘 그 정서적 표현이 과잉된다. 중딩이 성숙하고 감수성있게 보이려고 자주 쓰는 어디 무협지에 나올 법한 자아도취적 표현들로 자주 드러난다.


이것은 정서적 표현이 아니라, 실은 지성의 표현이다.


지성으로 여러 정서반응들을 수집해서 빅데이터를 구성한 뒤 상황에 따라 그걸 모방해 표현하는 식이다. 사이코패스들이 이처럼 지성으로 정서를 대체한다고 하는데, 이는 지성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생활양식에서 훨씬 일상적으로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이것을 지성의 하위기능으로 살아간다고도 말한다. 하위지성은 언제나 좋아보이는 것을 모방하고 흉내내는 그 일만을 한다. 그래서 촌스럽다.


호.랑.이.가. 멋.있.는. 것.은. 다.른. 무.엇.도. 흉.내.내.지. 않.는 까.닭.이.다.


그리고 인간도 호랑이처럼 멋있게 살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지성 대신에 본능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성의 하위기능 대신에 가장 고차원적인 지성의 상위기능을 써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지성이 가진 최상위의 기능은 "왜?"를 묻는 것이다.


이것은 '해체의 기능'이다.


그렇다면 해체는 왜 하는 것인가?


자.유.롭.고. 싶.어.서.다.


생명의 본성은 자유다. 인간은 생명현상 중에서 가장 자유를 지향하는 일에 최적화된 존재다. 자유의 증진을 위해 지성이 고도로 발달해있는 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인간은 "왜?"를 묻는다. 자신이 자유롭지 못한 모든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왜?"라는 질문이 생겨난다.


자유롭다는 것을 이렇게 다시 표현할 수 있다.


스.스.로. 삶.과. 독.대.하.는. 것.


가장 하위의 지성을 활용하는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세상사는 일에 쫄지 마. 내가 네 뒤에 서있을 거야. 네가 쫄지 않을 수 있도록 내가 너의 인생철학을 더 좋은 것으로 업데이트해줄게. 네가 쟤들보다 더 똑똑하다구. 이제 세계를 향해 당당하게 네 이야기를 시작해봐."


이것을 근대적 계몽주의라고 부른다.


지성의 힘을 더 강하게 만들면 존재의 힘도 강해져 모두가 평등한 현실이 찾아올 것이라고 믿던 기획이다. 곧, 인간존재의 핵심이 지성에 근거해있다고 간주하던 지성지상주의의 방식이다.


지적 열등감이 강한 이들이 이러한 계몽주의의 주체가 곧잘 되곤 한다.


그럼으로써 자기보다 지적으로 못나보이는 '보편적 다수'를 계몽하려는 활동을 통해 자기의 지적 열등감을 보상받으려고 한다.


과거에는 믿음이라는 기제로 제사장들이 하던 일을, 근대에는 지성이라는 기제로 계몽주의의 주체들이 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이 주체들을 '근대적 제사장'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물론 오늘날 여기에는 근대니 계몽이니 하는 등의 표현은 싹 거세된다. 그보다는 현대적으로 보일 법한 '인플루언서'이니 '언론인'이니 '커뮤니케이터'이니 '작가'이니 하는 등의 표현들이 활용된다.


그러나 그 본질은 제사장이다. 쉽게 말해 무당이다. 주술의 집전자이며, 주술의 전문가이다. 가장 반대편에 있는 것 같은 인간의 이성이라는 소재조차도 이들에게 걸리면 아주 쉬이 주술적 소재로 남용된다.


제사장들은 우리의 뒤편에 서서 우리가 삶 앞에서 당당할 수 있도록 지켜주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은 제사장은 우리의 앞편에 서있다.


자기를 통해서만 삶을 접촉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삶과 연결될 통로를 독점하는 일종의 정신적 동인도회사가 되어 있다.


이처럼 제사장들이 우리가 직접 우리 자신의 삶과 접촉하는 일을 막고 있어서, 우리가 촌스러워진 것이다.


감수성과 정서의 문제로 돌아가보자.


그것들은 지성적 학습으로 발달되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정.서.는. 삶.에. 대.한. 개.방.성.을. 통.해.서.만. 발.달.된.다.


키르케고르를 위시한 실존주의자들은 말한다.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의. 삶.과. 독.대.하.는. 일.이. 필.요.하.다.


자신과, 자신의 삶 사이에는 어떠한 것도 매개자가 되면 안된다. 실제로 매개자라는 것은 가능할 수도 없는 일이다. 자신의 삶은 자신이 직접 살아가야만 삶이 되는 까닭이다.


자신이 직접 공원에 나가 홀로 벤치에 앉아 노을을 바라봐야 비로소 그 삶의 시간은 의미있어진다.


그.럴. 때.야. 정.서.가. 일.어.난.다.


정서는 삶에 대한 이 직접체험의 결과다.


누군가의 정서가 발달했다는 것은 그가 자신의 삶과 독대한 순간이 아주 많다는 것이다. 진짜(real)로 살았다는 것이다.


삶과 독대한다는 것은, 세계와 독대한다는 것이고, 자기 마음과 독대한다는 것이다.


정서는 이처럼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들과의 '내밀한 데이트'를 통해 발달한다.


우리가 첫키스를 하는 순간을 떠올려보자.


우리의 뒤편에는 제사장이 우리를 코칭하고 있고, 우리의 앞편에는 제사장이 준 키스메뉴얼이 놓여 있다. 그러다가 제사장이 직접 끼어들어 키스는 이렇게 하는 것이라며 우리에게 시범을 보이려고까지 한다.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연인이 지금 막 NTR을 당하려는 참이다.


이러고도 좋다고 살고 있을 때 우리가 이 우주에서 가장 촌스러워진다는 점은 명백하다. 계속 화만 나게 되던 그 이유도 분명하다.


가장 최상위의 지성기능을 발휘해보자.


"왜? 아니 대체 왜?!"


지성은 우리 앞에서 자기를 통해서만 우리가 제대로 살 수 있다고 주장하며 삶을 가로막던 제사장을 해체한다.


그럼으로써 우리와 우리 자신의 삶만을 그 자리에 남긴다.


그러면 삶이 우리에게 그윽하게 전하고자 했던 그 눈빛이 우리의 영혼에 파고든다. 그 향기가 우리의 세포에 진하게 스며들어온다.


이것이 감수성이다.


우리는 지금 막 감수성이 깨어난 것이고, 그 감수성으로 받아들여 체험하게 된 삶의 다채로운 색(色)이 바로 정서다.


이.처.럼. 삶.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는. 색.이. 입.혀.진.다.


색이 있어서 멋이 생겨난다.


우리에게 색을 입힌 우리의 삶은 분명 우리가 멋있어지기를 바란 우리의 편이었던 것이다.


삶을 자신의 편으로 삼아 사는 일, 이것이 바로 멋있게 사는 비결이다.


깨달은 이들이 멋있는 이유는 그들이 삶을 자신의 편으로 삼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 속에는 이미 조화로움이 녹아 있다.


자유의 본능을 따라, 지성이 최고급의 임무를 다했고, 그 결과 정서가 꽃피어났다. 우리 자신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없는 속에서, 그렇게 우리가 우리 자신이기만 한 속에서, 우리 자신이 직접 몸으로 삶을 살아낸 그 결과다.


여기에는 인간의 모든 핵심적 요소가 다 조화롭게 작용하고 있었다.


그러니 멋있을 수밖에 없다.


인간이 '인간의 정수'를 살아간 까닭이다.


인간의 욕망에는 끝이 없다고 말한다. 이 말을 중립적으로 다시 평가해보면 인간에게는 본능이 최대치로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인간은 '최고의 본능'과 '최고의 지성'을 내재하고 있으며, 또한 '최고의 정서'를 감각할 '최고의 감수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생명체 중에서 '최고의 적응력'을 가진 인간의 신체를 통해 실현된다.


이렇게 최고의 것들로만 이루어진 인간이 최고로 멋있게 살고 있지 못해서, 늘 투박하고 촌스럽게 화만 내고 있다면, 이것은 비극이다. 붓다가 충분히 답답해할 만하다.


우리는 어떤 것을 멋있다고 느낄 때 이렇게 말하곤 한다.


"참 잘 어울린다."


깨달아 사는 일은 유연하고, 세련되며, 섬세하기에, 어디에서나 조화롭게 잘 어울린다.


지성이 만든 촌스러운 갑옷을 입고 다니지 않고 삶과 직접 독대하면 우리에게 이 일이 즉각적으로 일어난다. 감수성이 깨어나 유연하고, 세련되며, 섬세한 인간의 본성을 바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 자체가 이처럼 아주 멋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실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이 제법 다 잘 어울리는 존재다. 무엇으로도 멋있을 수 있는 존재다.


자신이 바로 이 조화로운 인간임을 깨달아 사는 이가 멋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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