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심리학 #33

"깨달음은 대화다"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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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은 절대적으로 참된 삶과 관련된 것이다. 그리고 마르틴 부버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다."


이.처.럼. 깨.달.음.은. 만.남.이.다.


그런데 만남은 나의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버에게는 이 점이 분명하다. 가령 우리가 상대를 무조건적으로 존중하고 수용하며 그의 온전함을 알아주는 등의 일을 한다고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달마에게도 이 점은 명백했다. 깨닫기 위해 나의 노력으로 한 일들에 대해 달마는 아무 공덕이 없다고 평했다.


만남은 너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너 없이는 애초에 나라는 것조차도 불가능한 것이다.


인간은 너와의 만남을 통해서만 나로 드러날 수 있다. 이것이 부버가 말한 '나-너(I and Thou)' 관계다. 근원적 관계라 관계성(relatedness)이라고도 부른다.


물론 이 관계성은 약한 인간들끼리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는 식의 집단주의의 윤리를 시사하는 표현이 아니다. 이것은 그 범주를 한참 초월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그대(thou)'라고 부를 수 있는 더 거대한 현실, 곧 깨달음의 현실을 묘사하는 표현이다. 그 현실을 살아가는 늠름한 인간이 뿌리내리고 있는 명징한 근거에 대한 묘사다.


우리의 눈앞에 드러나 있는 것을 '그대'라고 부르며 시작되는 것, 그것은 대화다. 부버는 대화의 철학자라고 불린다. 그에게 만남이란 대화를 통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깨.달.음.은. 대.화.다.


'참된 대화'라고 다시 부를 수 있다.


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우리가 거의 '대화 같은 대화'를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실은 '대화 아닌 대화'다. 여기에는 전형적인 증세가 있다.


'대화 아닌 대화'를 하고 있을 때, 우리는 반드시 정답찾기 게임을 한다.


상.대.를. 만.족.시.켜.줄. 대.사.를. 게.임.의. 선.택.지.처.럼. 머.릿.속.에.서. 고.르.고. 있.다.


이것은 마치 AI챗봇이 대화패턴을 분석해 데이터베이스 속에서 가장 적절한 대사를 선별해 제시하는 일과도 같다.


이러한 AI의 일을 더 빨리, 더 유능하게 잘해낼수록, 우리는 '대화 잘하는 인싸'라는 칭찬을 받기까지 한다. 심지어는 가장 성공적인 대화패턴을 자기의 삶에 적용하면 동일한 성공을 이룰 수 있다는 주장까지도 생겨난다.


이 세상에는 정답이라는 것이 있고, 그 정답만 찾아내서 모방하면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는 생각들이다.


이것이 바로 부버가 말한 '나-그것' 관계다. 이 관계양식 속에서는, 나는 그 무엇보다 선량한 의도를 갖고 모든 것보다 앞서있는 주체로 가정되며, 그러한 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너는 온전해질 수 있다.


'그대'가 '그것'으로 몰락한 것이다.


이처럼 '나-그것' 관계는 우리의 눈앞에 드러나있는 것을, 정답찾기 게임을 잘하는 자기의 권위와 영광을 증진시키기 위한 도구로서 사물화시킨다. 현상의 추락이다.


그런데 현상학의 유명한 격언은 이러하다.


"현상 앞에서 겸허해지는 것, 이것이 우리가 현상으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우리의 눈앞에 드러나 있는 것이 현상이다. 그 현상에 대한 최고의 겸허함의 표현이 바로 '그대'라는 호칭이다.


이 표현을 붓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붓다가 보리수에 홀로 앉아 있을 때 일어나던 마음현상들에 대해 붓다는 이렇게 말을 걸었다.


"아, 그대군요. 나의 오랜 친구인 그대가 찾아왔군요."


그리고 대화는 시작되었다.


'나-너' 관계라는 것은 이처럼 대화할 실체가 있어야만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홀로 있을 때도 성립되는 것이다. 이것은 대화적으로 사는 삶의 방식을 총칭하는 것이다.


누군가와 실제로 함께 있을 때나, 홀로 있을 때나, 눈앞에 드러나 있는 그 현상을 향해 겸허하게 가슴을 열고 말을 거는 일에 대한 모든 묘사다.


우리가 겸허할 때 우리는 정답을 찾고 있지 않다.


우리가 '참된 대화'를 할 때 우리는 언어적 정보처리기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마.음.을. 나.누.고. 있.다.


대화란 이 마음을 나누는 일이다.


이것은 다르게 말하자면, 에너지를 나누는 일이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그가 하는 말의 내용이 담고 있는 정보보다 우리에게 더 먼저 그리고 더 강렬히 체험되는 것은 그가 말하면서 쓰고 있는 그 에너지다.


그의 말속에 담긴 기쁨을 느끼고, 슬픔을 느끼며, 화를 느낄 때, 우리는 에너지를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임무도 분명하다.


그.가. 우.리.에.게. 전.한. 그. 에.너.지.를. 그.에.게. 돌.려.주.면. 된.다.


이 과정 속에서 두 가지가 확인된다.


첫 번째는 지금 이것이 분명하게 가용가능한 멋진 에너지라는 사실이며, 두 번째는 그가 전한 에너지를 우리가 체험함으로써 우리 안에도 그 에너지가 발견되어 이제 에너지는 그와 우리 양쪽에 함께 존재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에너지를 받아 체험하고 돌려주는 이 순환의 과정을 통해, 그와 우리는 함께 힘이 생겨났다.


마.음.을. 나.눈.다.는. 것.은. 곧. 마.음.의. 힘.을. 나.누.는. 일.이.었.던. 셈.이.다.


바로 이러한 것을 대화라고 부른다.


이처럼 대화를 하면 원래 우리는 힘을 얻게 된다.


그렇지 않고 대화를 할수록 힘이 빠진다는 것은, 지금 거기에서 '참된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방증이다.


정답을 찾으려고 할 때 대화는 '대화'가 아니라 '대회'가 된다. 누가 더 정답을 잘 찾는가를 뽐내는 경연대회가 된다.


상담은 대표적으로 '참된 대화'를 통해 내담자가 마음의 힘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활동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담의 의의조차도 정답찾기 게임의 방식으로 자주 굴절되곤 한다.


그렇게 해서 정답이라고 하는 것을 혹여 찾는다고 해도 거기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왜인가?


정직하게 떠올려보면 알 수 있다.


우리가 문제로 경험하던 모든 순간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했.던. 것.은. 정.답.이. 아.니.라. 에.너.지.다.


정답이 없어서 그것을 못했는가? 에너지가 없어서 못했는가?


더 쉽게 비유해보자.


정답이 없어서 실패했는가? 돈이 없어서 실패했는가?


정답 따위 몰라도, 에너지만 계속해서 공급된다면 그의 인생에는 거칠 것이 없다.


대화는 우리의 삶에서 가장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 정답이 아니라 바로 에너지를 얻기 위해 하는 것이다. 그것도 혼자 얻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함께 얻는다. 미래를 살아갈 힘을 함께 얻는다. 이것은 이렇게 말하는 것과도 같다.


"그대와 미래에도 함께하고 싶어요."


아버지의 상을 치르게 된 친구가 있다. 우리는 그의 아버지를 부활시킬 '정답'을 찾기 위해 그와 대화를 시도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에게 힘이 되고 싶다. 힘을 전하고 싶다. 그가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는 대화를 시작한다.


슬픔이 아주 크게 체험된다. 에너지가 아주 크다. 아버지의 크기만큼 크다.


그것은 아버지의 에너지다.


아버지가 그에게 주고 있는 에너지다.


미래를 또 살아가라고, 그에게 전해준 마지막 선물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그를 사랑한 그 크기만큼의 영원한 사랑이다.


'참된 대화'는 우리를 반드시 사랑으로 이끈다.


마음은 에너지며, 그 에너지를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나누는 일이 사랑이다. 정답 따위 없어도, 이 사랑만 있으면 우리에게는 거칠 것이 없다. 참된 삶이 펼쳐진다.


친구가 말한다.


"너가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얼마나 기적과도 같은지."


그래서 '나-너' 관계다.


깨달음은 이 기적의 만남을 낳는 대화다.


결코 그치는 일 없이 미래로 도란도란 이어질, 그대와의 참된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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