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운명의 땅 위에 피어난 들장미
"운명과 자유는 서로 굳은 약속을 주고받은 사이다. 그러기에 참으로 자유를 성취한 사람만이 운명을 만날 수 있다. 나를 추구하고 있는 행위를 내가 발견하였을 때, 그때 신비가 비로소 나에게 밝혀진다. 뿐만 아니라 행위가 내 생각대로 실현되지 않았을 때, 즉 ‘그것’의 저항을 받았을 때에도 신비가 나에게 계시된다. 진실로 자유인이란, 심연으로부터 결단하는 자요, 재물도 의상도 다 내어버리고 벌거벗은 채로 ‘너’의 어전으로 가까이 나아가는 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처럼 운명은 인간의 한계가 아니라 인간의 존재의 성취다." - 마르틴 부버 『나와 너』 中
자유는 언어적 앎의 차원에서는 운명의 반대편에 서서 모순관계를 형성한다.
그러나 실존적 삶의 차원에서 자유는 운명의 진실된 동반자다. 인간은 자유를 통해서만이 운명의 견실함을, 운명을 통해서만이 자유의 경쾌함을 체험할 수 있다. 그래서 자유와 운명은,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을 수 있는 상호관계성을 묘사하는 표현인 역설관계라고 불리는 일이 타당하다.
가장 아름다운 동반자 사이에서 흐르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긴장이다. 긴장은 낯선 것이, 즉 타자가 거기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리는 신호다. 결코 내가 함부로 할 수 없는 타자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경외감에서 발로한 그 느낌, 그것이 바로 긴장이다.
그래서 자유와 운명 사이에는 늘 긴장이 흐른다. 찌릿찌릿하다. 실감난다. 사는 맛이 있다. 이 영화가 진실로 그러하다.
영화는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에서 살고 있는 한 여성을 묘사한다. 그녀는 미국의 컨트리 뮤직을 사랑하며, 그 거침없이 정직한 노래의 울림을 그녀의 몸으로 체현한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를 운명에 예속된 존재로 생각한다. 그녀가 미혼모로 10대에 낳은 두 아이들과, 마약운반책으로 형무소에 다녀온 전과기록과, 그녀에게 성실하게 살라고 하는 그녀의 엄마와, 그녀가 살고 있는 이 땅 자체, 곧 컨트리 뮤직의 수혜로부터 비껴서 있는 이 환경 자체가 그녀를 속박하고 있는 운명의 조건들이다.
아이들만 없었더라면, 돈만 있었더라면, 미국에서 태어났더라면, 전과자만 아니었더라면, 그녀의 엄마만 그녀의 편이 었더라면, 그녀에게는 컨트리 뮤지션으로 대성하는 일이, 그녀가 태어난 바 그대로 자유롭게 노래할 수 있는 현실이, 금새라도 가능할 것만 같았다.
이처럼 그녀는 그녀의 자유를 가로막는 것 같은 운명과 늘 대립하며, 어떻게 하면 그 운명의 조건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지만을 꿈꾸고 있었다. 동시에 그 뜨거운 꿈의 열기에 스스로 달아올라 늘 화내고 있었다. 냉소하고, 빈정대고, 자학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래하고 있었다.
전과자가 되어 무대를 잃은 그녀는 어떻게든 그녀의 일상 속에서 그렇게 노래하고 있었고, 그 노래는 다시 한 번 그녀 자신에게 새로운 문들을 개방시켜준다. 그 어떤 침체된 일상 속에서도 노래를 포기할 수 없었던 그녀가 끝내 스스로 열어낸 현실이다.
그리고 그 새로운 현실로의 문은, 갑작스레 그녀의 눈 앞에서 닫히고 만다. 아니, 그녀 자신이 스스로 닫고야 만다. 그녀의 성공만큼 필연적으로 자신들의 엄마를 상실할 것이 예정된 그녀의 아이들의 모습 속에서, 그녀가 희망을 잃은 자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녀는 엄마로서의 자기를 자각하게 되고, 자신의 희망을 향해 나서는 대신에 아이들의 희망이 되고자 하는 길로 나서게 된다.
그리고 이제 성실하고 책임감 가득한 엄마로서, 그녀 자신을 위한 희망의 노래를 버린 채 살고 있는 그녀에게, 모범적인 엄마의 본이 되어 있는 그녀의 엄마가 찾아와 이렇게 말하게 된다.
"네가 책임감을 가지기를 바랐지, 희망을 버리라는 뜻이 아니었단다."
"내가 내 꿈을 포기하고 너를 위해 살았던 것은, 그게 더 쉬웠기 때문이야. 나를 위해 사는 것보다 남을 위해 사는 게 더 쉬웠단다. 나는 나를 위해 살 용기가 없었던 거야."
"너는 가서 네 미래가 어떤지 만나보렴."
다시 또 문이 열린다.
그녀는 이제 가장 그녀의 편이 되어주기를 바랐던 자신의 엄마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그녀가 꿈꾸던 컨트리 뮤직의 고장인 미국의 내쉬빌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연히 노래를 부르다 알게 된다. 그녀가 자유의 낙원이라고 생각했던 이곳에도 운명의 조건들이 있다는 사실을, 운명 속에 참여하지 않고는 그 어떤 자유도 실현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운명을 벗어나 자유를 꿈꾸는 이의 이름, 그것은 바로 소외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소외는 땅으로부터 분리된 것의 이름이다.
땅을 벗어나 피어날 수 있는 꽃은 없다. 니체가 말하듯, 땅을 벗어나서는 희망이 있을 수 없다.
희망은 땅에 속해 있다. 희망은 운명 속에 있다.
하이데거에게도, 마르셀에게도, 리쾨르에게도 희망은 그러한 것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간에, 자신에게 이미 그렇게 던져진[주어진] 과거의 삶을 끌어안고 미래를 향해 기꺼이 다시 자신을 던지는[주는] 것이다. 이 말은, 과거가 없으면 미래를 향해 던질 것이 없다는 의미다. 뿌리가 없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의미다. 운명이 없으면 자유가 없다는 의미다.
이 모든 것을 이해한 그녀는, 그녀 앞에 새롭게 열린 그 문의 의미 또한 이해하게 된다.
그것은 돌아가는 문이었다. 그녀가 속한 땅으로 돌아가는 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아가는 문이었다. 수평으로는 동일한 지점으로 이동하지만, 수직으로는 더 깊은 지평으로 나아가는 문이었다.
그래서 과거를 끌어안고 미래를 향하는 현재의 실존을 묘사하는 해석학의 운동은 언제나 나선운동이다. 더 높아지고, 더 깊어지는, 수직적 차원을 담보한 입체적 운동이다.
변증적인 것들 사이에서의 긴장이 만들어내는 결과는 이처럼 우리 가슴의 깊이다. 더 많은 것들을 가득 담을 수 있는 품의 확장이다. 더 많은 것들을 한 목소리에 담아 노래할 수 있는 가장 거침없이 정직한 컨트리 싱어의 출현이다.
자유의 의미는 거침이 없다는 것이다. 거쳐야 할 장애물이 없다는 것이며, 그 충돌로 인해 거칠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유로운 자는 운명을 그의 편으로 삼은 자이기 때문이다. 운명을 그의 편으로 삼은 자는, 그의 운명을 사랑하기에 운명과 대립하지 않는다. 그의 운명을, 그의 사랑으로 노래할 뿐이다. 목소리에 가득 실어 보낼 뿐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자유다.
자신의 운명에 대한 사랑, 니체가 묘사한 것처럼 바로 이것이 자유다.
운명이란 곧 삶이다. 때문에 삶을 사랑하는 일, 그것이 자유로운 이가 하는 유일한 일이다.
이 영화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을, 곧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을 대단히 명민한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는 영화다. 거침이 없다. 노래처럼 흐른다. 자유롭다.
언제인가 땅이 가장 사랑했던 그 들장미와도 같다.
모든 들장미는 땅의 사랑 속에서 피어난다. 그 운명의 사랑 속에서만 피어날 수 있다. 그래서 가장 사랑하는 이가 가장 자유롭다. 아마도 이 말은 불변의 희망일 것이다.
Jessie Buckley - Country Girl
Jessie Buckley - Glasgow (No Place Like Home)
Jewel - Stronger Woman
This is me packing up my bags
가방을 싸고 있는 이게 바로 나야
This is me headed for the door
문으로 향하는 이게 바로 나야
This is me the best you ever had
네가 가졌던 것 중 최고인 이게 바로 나야
I'm gonna love myself
난 스스로를 사랑할 거야
More than anyone else
다른 누구보다도 더
Believe in me, even if someone can't see
누구도 볼 수 없을지라도 나를 믿어
There's a stronger woman in me
내 안에 더 강한 그녀를
I'm gonna be my own best friend
내 자신에게 최고의 친구가 될 거야
Stick with me till the end
끝까지 함께할 거야
Won't lose myself again
다시는 나를 잃지 않을 거야
Never, no
절대, 결코
Cause there's a stronger woman, stronger woman
더 강한 그녀가 있기 때문에
There's a stronger woman in me
내 안에 더 강한 그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