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된 악몽을 불확정한 미래로"
이 글의 제목은 '나이트메어 펑크'라는 만화의 아주 멋진 대사에서 따왔다.
악몽이 끔찍한 이유는 닫혀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이상적이고 좋은 것들로 가득해도 닫혀있는 꿈은 악몽이다.
닫.힌. 세.계.는. 악.몽.이.다.
인류의 정신문화사에서 인간의 세계는 확장되어 열려가는 동시에 폐쇄적으로 닫혀왔다. 우리는 추적해볼 수 있다.
정신문화사의 발달은 고통에 대한 이해와 그 궤를 함께한다.
고통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몸에서 체험된다. 그 체험은 불쾌하다. 나쁜 것이다.
그리고 "고통은 나쁜 것이다."라는 이 명제는 선후관계를 뒤집어 "나쁜 것은 고통받는다."라는 명제로 도덕원리를 형성하게 되었다.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났는가?
고.통.에. 이.유.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유가 있어야 고통을 조금이라도 더 잘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를 뒤집어 말하자면, 인류의 어느 시절에는 고통받을 일이 정말 많았기에, 고통의 본질적 이유를 어떻게서라도 확보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쁜 것은 고통받는다."에서 '나쁜 것'은 무엇인가?
몸이다.
그리고 몸에 근거한 개인들이다.
그렇게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본질적으로 나쁜 것이라는 인식이 지배하였고, "인간은 죄인이다."라는 목소리는 널리 퍼져갔다.
당연히도 이 '나쁜 것' 안에 '좋은 것'은 머무를 수 없는 법이었다.
때문에 좋은 것 중의 가장 좋은 것으로 가정된 '신'을 당시의 인간은 자기의 바깥에 두었다.
이로써 인간 안의 것은 악한 것이고, 인간 밖의 것이 선한 것이라는 구조는 세계에 대한 그림이 되었다.
세.계.관.이. 공.고.화.되.면. 그. 세.계.는. 닫.힌. 세.계.가. 된.다.
상기한 세계가 악몽이 된 방식은, 인간에 대한 끝없는 억압과 그로 인한 죄의식이다. 정신문화사의 흐름 속에서 고중세의 시대가 내재하던 악몽의 형태다.
여기에는 "신이 고통을 구원할 거야."라는 약속이 있었고, 이것은 약속된 '억압'의 악몽이었다.
그러다가 인간이성의 활약에 힘입은 문명의 발전과 함께, 과거에 겪었던 많은 고통의 양상들이 극복될 수 있었다. 인간이 고통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해낼 수 있다는 믿음이 자라났다.
그래서 이제 신적인 것의 위치는 인간의 내부로 옮겨졌다.
커다란 역전이 일어난 것이다.
이제 '좋은 것'은 인간의 안에 위치하게 되었으며, '나쁜 것'이 인간의 바깥에 놓이게 되었다.
과거에 '나쁜 것'이라고 인식되었던 것과 '좋은 것'이라고 인식되었던 것이, 곧 선악이 서로 자리를 바꾸었다.
그리고 인간은 무슨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가?
인간 내부에 있는 가장 좋고 선한 것인 '이성'을 바탕으로, 외부의 나쁘고 못난 것들을 계몽해나갈 것을 꿈꾸었다.
여기에서 '나쁘고 못난 것'이란 '이성적이지 못한 것'이다. '앎'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앎의 주체들은 신적인 권능으로 아직 모르는 무식한 것들에게 친절히 시혜를 베풀고자 했다. 자신들의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세계관이 만든 악몽의 형상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독재다.
독재자는 언제나 모두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다양성의 가치를 실현한다는 '선한 의도'로 무장해있다.
그래서 이러한 세계관에서는 언제나 전쟁만이 벌어진다. 모두는 독재자 자신의 방식을 통해서만 자유와 평등, 다양성의 가치를 얻어야만 하는 까닭이다. 그러니 독재자는 자기와 동일하게 '선한 의도'를 가진 다른 독재자와 필연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리고 우리 또한 이 원자폭탄들의 충격에 반드시 휩싸이게 될 운명이다. 이것은 근대라고 하는 시대가 낳은 악몽의 양상이다.
여기에는 "내가 고통을 구원할 거야."라는 약속이 있었고, 이것은 약속된 '오만'의 악몽이었다.
현실에서는 정말로 몇 번 원자폭탄이 터졌고, 사람들은 학살되었으며, 이제 전쟁은 최대한 자제되었다. 기술은 인간을 분열시키기보다는 인간을 연결시키는 방향성을 지향하게 되었다. 네트워크의 탄생이다.
정보가 효율적으로 교류가능해짐으로써 고통의 요인들은 정말로 많이 줄어갔다. 불필요한 고통은 최대한 배제할 수 있게 되었고, 또 발생한 고통에 대해서도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 다양한 솔루션들을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인간은 무(無)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정신문화사의 발달이 고통에 대한 응답으로서 펼쳐져왔다는 것을 다시 기억해보자.
고중세에는 고통의 이유가 인간의 내부에 위치했고, 근대에는 인간의 외부에 위치했다. 이에 상응해, 고중세에는 인간의 내부에 '악'이 있고 인간의 외부에 '선'이 있으며, 근대에는 인간의 내부에 '선'이 있고 인간의 외부에 '악'이 있다는 이해가 생겨났다.
그런데 이제 총체적으로 고통이 감소하게 된 시점에 이르러서는, 고통의 이유를 절실하게 찾아야 할 그 동기 또한 약화되고, 이에 따라 고통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만들어낸 '선악관' 역시 흐려지게 된 것이다.
선악이 사라졌기에 또는 모호해졌기에, 현대라고 불리는 이 시대는 '무(無)의 시대'이다.
인간의 내부에도 신적인 것은 없고 외부에도 신적인 것은 없다. 표현 그대로, 신.은. 죽.었.다.
물론 그나마 가장 신적인 것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은 역시 네트워크다.
네.트.워.크.는. 무.의. 시.대.에. 어.울.리.는. 신.의. 형.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의 내부에도 외부에도 위치하지 않는다. 어디에도 없는 '가상공간'에 위치한다.
그리고 무(無)를 직면하고 싶지 않은 이들이, 그 회피의 의도만큼 대신 자신들의 본질적으로 허무한 욕망들을 이 무의 공간에 가득히 쏟아낸다.
무에 빠져 있으면서 무를 직면하지 않는 것이 허무주의이며, 허무주의의 귀결은 이처럼 곧잘 쾌락주의가 된다.
쾌락주의가 근거하는 것은 과거의 쾌락이다. 쾌락이라는 자극은 과거의 것에 기준해서만이 현재의 쾌락으로 성립되는 까닭이다.
그래서 쾌락주의는 퇴행의 현상이다.
무(無)를 견디지 못하는 이들은 과거의 '좋은 것'을 재소환하고자 한다. 자신의 내부나 자신의 외부에서 '신적인 것'을 다시 만들어내 재경험하고자 한다.
어떤 이는 영화를 보고 쓴 감상글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준 그 '좋은 경험'을 잊지 못해, 계속 영화관과 OTT를 배회하며 동일한 경험을 다시 이루려고 한다. 강박적으로 이 행위를 반복하면서, 이제는 과거만큼 감흥이 없지만, 그러한 만큼 더욱 과잉되게 감동받은 연기를 한다. 부르르 떨며 느끼는 척을 한다.
이런 것을 '중독'이라고 부른다.
모든 중독은 '경험중독'이며, 이것이 바로 현대의 악몽의 형상이다.
여기에는 "연결된 '나들'이 (없는) 고통을 (만들어내) 구원할 거야."라는 약속이 있었고, 이것은 약속된 '불감증'의 악몽이었다.
고통이 거의 제거된 현실 속에서, 고통이 없으니 인간 스스로가 고통을 만들어낸 상황과도 같다.
인.간.은. 고.통.도. 괴.롭.지.만. 고.통.이. 없.는. 것. 또.한. 괴.롭.게. 경.험.하.고. 있.던. 것.이.다.
다시 한 번 이를, 이 모든 것이 시작된 '몸'의 문제로 수렴시켜보자.
인간은 몸이 고통스러운 것도 괴롭지만, 몸이 고통스럽지 않은 것도 괴롭다는 현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몸 자체가 버겁고, 불편하며, 어색하다는 것이다.
무.를. 견.디.지. 못.하.는. 것.은. 곧. 자.기. 몸.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에 들어와 기하급수적으로 진단된 ADHD 같은 증세들로 잘 방증된다.
자극이 없으면 초조해지고 불안감을 느끼며 한 자리에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차라리 고통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무자극은 지옥처럼 가장 견디기 힘들다. 현대인은 다소의 개인차는 있을지라도, 보편적으로 이러한 증세 속에 있다.
'고통없음의 고통'이다.
이러한 성질의 고통이기에 여기에는 이유 또한 없다. 버티기 위한 이유가 필요한 고통이 아니다.
우리가 지금 이 몸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고통인 까닭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유없이 존재하듯이, 이것은 이유없는 고통이다.
때문에 이유 대신에 목적을 만들어내었다. 자기계발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거의 모든 분야에서 향상시킨다는 목적을 내걸고, 그만큼 다양한 자극들을 이 몸에 공급하려는 움직임이 펼쳐졌다.
그 결과 우리의 몸은 쉴새없는 자극으로 총체적인 불감증의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생기가 없다. 다 뻔하다. 자신은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같지만, 어떤 것에도 헌신할 정서적 동기화가 되지 않는다. 늘 피곤해서 쉬고 싶다고 말은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지도 않다. 다 귀찮고, 여가를 즐기는 것도 여분의 에너지를 들여야 할 것 같아, 그냥 누워서 게슴츠레한 눈으로 유튜브나 본다.
무(無), 총체적인 무다.
우리는 이 실시간적인 '닫힌 세계' 속에 있다.
그럼에도 가능한 희망은,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니체는 아주 멀리 내다본 예언자였다. 그는 허무주의의 극복이 적극적인 무의 수용에 있다고 선포했다. 그러면 몸에 생기가 돌아오고 힘이 난다.
한 번 태어나 사라질 이 몸은 분명 무의 원천으로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몸은 분명한 이 하나뿐인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
유사한 기획으로, 하이데거는 대표적인 무의 형상인 죽음을 현재로 끌어온다. 그렇게 개인이 직접적으로 무를 직면해 본래적인 존재의 면모를 회복하도록 그는 안내한다. 그러한 개인은 더는 허무주의에 빠져있지 않게 된다. 오히려 존재에 빠져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존재가 이끄는 그 길을 향해, 그 미래를 향해 그 자신을 다시금 던지게 된다.
이것은 자신은 아직 알지 못하는 것, 즉 미지(未知)를 향해 자신의 힘을 쓴다는 것이며, 자신을 던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닫힌 세계'는 여기에서 깨어져, 새롭게 열린다.
불확정한 미래가 열린다.
'불확정'이라는 이 말을 크게 점프해 '공(空)'이라고 바꾸어 이해해보자.
우리가 무(無)라고 인식하던 것은 실은 공(空)이다. 공허한 것이 아니라 불확정한 것이다.
과거에 천착해서 보면 그것은 무인 것 같다. 그때의 자극적 영광이 지금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래를 끌고 오면 그것은 공이다. 가만히 있어도 피어오르는 생기어린 설렘이다.
선불교 연구자인 니시타니는 지금 이 글에서의 '무'와 '공'의 변별을, '상대무'와 '절대무'라는 용어로 변별한다. 그리고 이 '절대무'를 다시 '자체'라는 말로 묘사한다.
자체는 지금 바로 이 모든 것이다.
몸이면서, 세계이고, 거대한 자유다.
불확정한 미래란 이 자유의 미래다.
만약 우리의 시대가, 또 인류가 이러한 미래로 진입한다면, 그것은 종교전통들에서 비유해온 지상낙원의 모습일 것이다.
선과 악을 교차해가며 싸우다가, 그 모든 것이 무너지는 무를 직면하고, 그것을 다시 공으로 발견하여 인간이 온전한 '몸'으로 자유를 나누며 사는 현실, 이것은 미래에 대한 가장 긍정적인 청사진이다.
이것은 '약속된 악몽'이 아니라 '약속된 미래'일 수도 있다.
불확정한 미래는 곧 약속된 미래다.
자유는 곧 운명이다.
우.리.의. 운.명.은. 자.유.다.
붓다는 사방에 가득한 고통 속에 갇혀 시름하며 고통을 극복하려다가 결국에는 수행중독에 빠졌다. 총체적으로 허무하기만 했다. 그 몸은 무기력했다.
그러나 붓다는 마침내 그가 할 수 있는, 또 해야 할 바를 정확하게 했다. 그도 죽음을 현재의 자신 앞으로 끌고 왔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그 몸으로 자유로워졌다. 이것이 인류의 운명임을 알았고, 이것이 인류에게 가능한 미래임을 알았다.
붓.다.는. 인.류.의. 정.신.문.화.사.를. 그.의. 몸.으.로. 먼.저. 산. 것.이.다.
그리고 도달한 것이다.
고통의 이유였던 몸을, 그 존재함을, 미지의 근원으로서. 자유의 총체로서.
신비는, 우리가 이 몸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신비다.
우리는 이미 무수한 불확정성의 결실이다.
실은 미래가 우리를 만들었고, 우리가 미래다.
자유가 우리를 만들었고, 우리는 분명하게 그 자유다.
이것이 아마도 이 몸이라는 신비의 암시일 것이다.
정신에 대한 탐구였던 정신문화사는 이로써 몸에서 완성되어 끝난다.
그리고 우리는 시작한다. 완성된 존재로서 자유의 기쁨을 온몸으로 노래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태어난 것에 감동하는 그 자리가 바로 우리의 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