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밖에서 온 심리학 #22

"이원론의 통합은 왜 정신건강에 유해한가"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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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은 언제나 반대되는 것들 사이의 통합이다.


통합을 통해 대립과 갈등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가장 온전해진다고 곧잘 말해지곤 한다.


통합이 마치 인간이 꿈꿀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이상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방법론인 것처럼도 주장된다.


'정치게임'에 빠져있는 이들이 자주 하는 얘기들이다.


통합은 정치게임의 핵심적인 원리다.


여기에서 정치게임이라고 하는 것은 정당들 간에 펼쳐지는 역학관계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다. 학교나 회사, 가정 등 우리의 일상에서 늘 펼쳐지곤 하는 관계의 소비방식을 일컫는 표현이다.


이를테면 '사내정치'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상대가 이면에 감추고 있는 의도를 파악해서 자신의 입지를 더욱 안전하게 확보하고, 또 오히려 역으로 상대를 조종함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는 현실을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다.


즉, 정치게임은 대립되는 세력들 사이에서 자신이 최대치의 이득을 얻어내려고 시도하는 게임의 방식이다. 그리고 그 승패의 조건은 누가 이 대립과 갈등을 통합했는가의 문제에 달려 있다.


이 통합의 주체들은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양극의 대립과 갈등을 자기가 해결하는 일에서 짜릿한 뇌의 보상을 얻는다. 수수께끼를 푸는 일과도 같다. 더 많은 양극들을 통합해갈수록 자기를 대단히 똑똑한 존재라고 생각하게도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통합의 주체들은 정치게임에 중독된다.


이것은 엄연한 중독이지만, 그 결과로 마치 평화와 화해의 이점을 모두에게 가져오는 것처럼 착각되기에, 조금도 나쁜 것으로 인식되지 않게 된다. 중독이라는 사실조차 자각하기에 어려워진다.


그러나 중독은 중독일 뿐이다.


통합을 목표로 하는 정치게임은 우리의 정신건강에 아주 유해한 것이며, 대립과 갈등보다 더욱 나쁜 성질의 것이다.


이원론보다 안좋은 것은, 이원론을 통합하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이원론을 통합하려는 주체는 자기가 이원론의 그 어느 입장보다도 높은 최고의 자리를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정치게임의 원형은 엄마와 아빠 사이에서 고뇌하는 아이의 모습에서 왔다.


아이는 엄마와 아빠 사이의 대립과 갈등을 자기의 똑똑한 머리로 세련되게 중재하고, 그 둘을 화해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이것이 최초의 정치질이다.


회사나 학교 내지 여러 커뮤니티들에서의 정치질의 모습을 한번 떠올려보자.


그 주체는 결코 특정한 편의 입장에서 다른 편의 입장을 공격하려고 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될 수도 있겠지만 이내 주체의 입장은 양쪽을 두루 살피려는 통합의 입장으로 변한다.


이것은 구체적으로는, 특정한 편이 약하다 싶으면 그쪽에 힘을 밀어주고, 또 다른 편이 약해지면 반대로 힘을 밀어주는 방식으로, 양쪽에 동등하게 불씨를 지피려는 움직임으로 일어난다.


그렇게 전체의 불길이 커지게 만든 다음, 대립과 갈등이 심화되어 어떠한 임계치에 도달했다고 판단될 때, 이제 통합의 주체는 최후의 소방관처럼 모두를 구원하는 영웅으로서 등장하곤 한다. 양극에 속한 그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로 판정되기를 기획하는 것이다.


이처럼 엄마와 아빠 양쪽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이가 언제나 이러한 게임을 한다.


그러니 이 게임에는 반드시 분열이 생겨난다.


분열이 없는 곳에서도 정치게임의 주체는 불씨를 일으켜 분열의 구조를 만들어낸다.


그래야만 통합의 주체인 자신이 그 모든 분열을 구원할 수 있는 신적인 입장으로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통합은 이처럼 자신이 신이 되기 위해 추구하는 방식이다.


이원론의 구도에 서게 된 그 모든 것을 남용해서 자기가 최고의 권위를 얻고자 하는 이가 늘 통합을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해님과 바람의 이야기를 우리는 살펴볼 수 있다.


나그네의 옷을 벗기기 위해 해님과 바람은 서로 대립하는 입장에서 게임을 펼친다.


통합의 게임은 이 게임의 양상을 뒤집어 이제 게임의 주체가 나그네가 되는 것이다.


나그네는 이렇게 말한다.


"해님은 참 얼마나 따스하고 그 마음이 강한지요. 그러나 또 얼마나 외롭고 약했으면 이처럼 세상 모든 이에게 상냥하게 말을 걸고 있었을까요. 해님은 참 좋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온전한 것입니다."


또 이렇게 말한다.


"바람은 참 얼마나 강력하고 그 위세가 늠름한지요. 그러나 또 얼마나 쓸쓸하고 약했으면 그렇게 냉철한 모습으로 강력한 그 힘을 과시하려 했을까요. 사실은 지친 나그네에게 상냥하게 불어와 위로가 되어주고 싶었을텐데. 그런 바람의 소망은 참 온전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선하고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나그네는 이제 제안한다.


"한번 해님과 바람이 이제 서로의 온전함을 알았으니 함께 악수를 해볼까요. 사실은 해님이 있어서 바람이 있을 수 있는 것이고, 또 바람이 있어서 해님이 있을 수 있는 것이지요. 제가 이처럼 여러분의 온전함을 목격하는 영광의 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참 좋은 마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통합의 정치게임이 펼쳐지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나그네는 이제 해님과 바람 위에 서서 그들을 알아주고 챙겨주는 신으로 군림한다.


나그네가 없었으면 해님과 바람은 바보들이라 자기들이 온전한지도 모르고 늘 대립과 갈등 속에 고통받았을 것이라고, 나그네는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이원론은 바보같고 유치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이원론에 의존해서만이 자기를 가장 높은 천재처럼 만들 수 있는 이가 있다.


그러한 그야말로 실은 가장 바보같고 유치한 것이다.


엄마와 아빠의 갈등구도를 상정해서만이 자기가 그 둘을 통합해내는 가장 위대한 주체인 척할 수 있는 이가 있다.


그의 정체는 엄마아빠로부터 영원히 심리적으로 독립할 수 없는 의존적 아이다.


자기가 통합의 권능을 행사하는 신이 되려면 엄마아빠와 같은 이원론의 대립구도가 늘 필요하기에, 이러한 통합의 주체는 언제나 미발달의 상태다.


동시에 이 미발달의 주체는 자기가 통합의 권능을 가진 신이라고 믿고 있는 까닭에, 그에게는 망상의 정체성이 자리잡게 된다. 이와 같은 망상의 크기만큼 채워지지 않는 현실은 그에게는 불만족이 되며, 이는 만성적인 화로 내재된다.


그렇다면 이제 그 화는 어디로 가겠는가?


외부의 어떤 현실을 또 대립과 갈등의 장으로 만들기 위한 불씨로 쓰인다.


이것은 영원한 반복이다.


자기가 언제나 싸움을 만들고 또 그 싸움의 통합자가 됨으로써, 모두가 그 위상을 높게 보며 필요로 하게 되는 신과 같은 인물로 자기 자신을 형상화하려는 이 게임은 영원한 시간의 낭비를 만들며, 그렇기에 우리의 정신건강에 가장 유해한 것이다.


통합하지 않는 일은 건강하다.


통합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타자가 타자로서 자신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타자는 우리가 감히 그 온전함을 알아주어야 할 대상이 아니다.


통합의 반대편에서 정확하게 작동하는 것을 우리는 경외감이라고 부른다.


경외감은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감각이다. 그래서 경외감에는 반드시 두려움이 동반한다.


우리를 타자를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쉽게 말해, 우리는 사람 무서운 줄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사람을 자기 게임의 공식에 맞춰 조리돌림하는 일을 그만할 수 있게 된다.


해님 무서운 것을 알고, 바람 무서운 것을 알듯이, 엄마 무서운 것을 알고, 아빠 무서운 것을 알면, 우리는 그 '타자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된다.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으로 경외된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정신건강에 가장 좋은 것이다.


실은 두려운데 두렵지 않은 척하려는 이들이 똘똘이스머프처럼 통합을 궁리한다. 통합이라는 이름으로 자기가 지배하려 하며, 그렇게 타자의 타자성을 무시하게 된다.


무시된 타자성은 더 거대한 두려움으로 그에게 돌아올 운명이다.


해님과 바람이 서로 싸우고 있던 것이 아니다.


가장 두려워하는 이가 해님과 바람을 가장 두려운 악마들로 만들어, 자신이 그 모두와 싸우고 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 악마들도 실은 착한 아이였다는 것을 자기가 알아주겠다고 망상하고 있던 것이다.


해님과 바람을 더는 괴롭히지 않으면, 해님과 바람도 우리를 괴롭히지 않는다. 아니 처음부터 우리를 괴롭혔던 적이 없다. 해님은 해님이고 바람은 바람일 뿐이었다.


통합되어야 할 것들이 아니라, 그것 자체다.


'타자성'의 경외는 반드시 이 '자체성'의 발견으로 이어진다.


그와 같이, 우리도 다만 우리 자신일 뿐이며, 이것은 우리의 정신건강에 가장 좋은 발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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