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밖에서 온 심리학 #23

"젊은 꼰대로 그만 살고 싶다면"

by 깨닫는마음씨


illustration-patrick-corrigan-18-805x1139.jpg?type=w1600



오늘 자정에 죽는다면 당신은 무엇을 어떻게 하고 싶은가?


그런 것이 있다면, 당신은 왜 하고 싶은가?


'왜'에 대답된 바로 그게 당신의 마음이다.


당신 안에 있는 거울이다.


꼰대는 이 마음이라는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보지 않아서 꼰대가 된다.


젊은 꼰대는 물리적 거울에는 자신을 수시로 비추어본다. 또 가상공간의 거울에는 자기를 굴절시켜 만든 이상적 이미지를 비추며 거울놀이를 적극적으로 즐기기도 한다.


그러나 젊은 꼰대도 마음의 거울에는 자신을 비추어보지 않는다. 다른 거울에는 자기를 다 비추어봐도 마음의 거울에만은 비추어보지 않아 그는 젊은 꼰대다.


허구의 이미지들을 소비하며 행복의 기준이 허구적으로 높아진 이 시대에, 자기객관화는 중요한 문제라고들 말한다. 자기객관화를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서 자기가 자기를 관찰할 수 있는 메타인지의 능력이 중요하다고도 말한다.


아주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본질적인 얘기도 아니다.


자기객관화도 중요하지 않으며, 메타인지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자신의 마음을 사실적으로 잘 아는가의 문제일 뿐이다.


'실존'이라는 개념은 '사실'에 대한 개념이다. '실존심리학'은 마음을 '사실적으로 아는 일'에 대한 것이다.


어떠한 마음이 사실인지가 우리에게 자꾸 헷갈리고 혼란스럽기만 하다면, 우리는 가장 근본적인 사실로 돌아가면 된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죽는다는 이 근본사실에 비추면, 지금의 사실도 분명해진다.


내가 오늘 죽는다면 나는 지금 이 시간을 '이렇게 살 것'이다, 바로 그것이 사실적인 마음이다.


사실적인 마음을 알아간다는 것은, 마음의 사실을 배워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 세상의 어떤 것을 배우든 간에, 우리는 그 소재들로 실은 '자신의 마음'을 배우는 것이다.


배움이라는 것은 언제나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만 가능한 표현이다.


마음의 연쇄적인 흐름을 삶이라고 한다.


그러니 자신의 마음을 배운다는 것은 곧 자신의 삶을 배우는 일이다.


삶을 배우는 자는 자신의 삶을 마스터한 것처럼 굴지 않는다. 생기없이 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삶이 이렇게 쉬워도 돼?"라고 말하는 개그콘서트를 열지 않는다.


그것은 삶을 게임으로 착각하고 있을 때의 전형적인 상태다.


즉, 자신이 죽는다는 근본사실을 망각하고 있을 때의 상태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존재망각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젊은 꼰대를 대표하는 상태다.


젊은 꼰대는 자신이 배우는 자라는 사실을 망각해있다.


그는 유튜브나 나무위키에서 주워본, 또는 가상공간의 인플루언서와 힙스터들에게서 주워들은 정보들을 통해 자기가 인생에 대해 다 배운 것처럼 군다. 자기의 마음도 정확하게 다 안다고 간주한다.


그는 젊은 나이에 벌써 삶이 막힌 것이다.


삶은 삶을 배우고자 하는 이에게만 계속 펼쳐서 열어준다.


다 배웠다고 생각하는 이에게는 그 문을 닫는다.


이것은 사실 중의 사실이다.


삶은 배움을 통해서만 계속 흐르며, 우리는 그 흐름을 타고 이동을 지속할 수 있게 된다.


배움은 항해의 일과도 같은 것이다.


다 배웠다고 생각하는 이는 왕년에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바다의 보물을 보았는지만을 항구의 주점에서 늘상 소란스럽게 떠벌리며, 모두의 민폐만이 되어갈 뿐이다.


그는 왕년의 꿈에 취해있는 주정뱅이다.


산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왕년'을 내세우고 있으며, 이제 '왕년'밖에는 남지 않은, 진실로 젊은 꼰대다.


그 '왕년'이라는 것이, 그가 코인을 통해 번 돈으로 5성급 호텔에서 섹시한 이성과 호캉스를 즐겼던 일인지, 아우디를 몰며 당당한 월세집의 자존심을 지켰던 일인지, 혹은 어디 이상한 자기계발방송에 나가 삼류소설을 낭독하며 사람들의 갈채를 받았던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젊은 꼰대가 대단히 소박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는 이 모든 하찮은 것들을 자기 인생의 '완성점'이라고 보며, 또 그것을 '왕년'으로 만들어, 마치 원피스를 얻은 루피처럼 굴고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삶에 대해, 또 마음에 대해 다 마스터한 것처럼 행세하는 이들은 이처럼 하찮은 것들을 자기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이들이다. 즉, 자기 자신을 대단히 하찮게 여기고 있는 이들이다.


이것이 젊은 꼰대가 갖는 내적인 모순이다.


젊은 꼰대는 실은 자기 자신을 매우 하찮게 느끼면서, 동시에 누구보다도 대단한 존재처럼 보이고 싶어한다.


하찮은 것이 대단해지게끔 성립시키려면 결국 사기밖에는 없다.


모순의 통합은 원래 사기로만 의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젊은 꼰대들은 자기를 속이고, 남들을 속이며, 세상을 속이려는 사기의 의도 속에 표류한다.


각종의 수많은 거울들에 자기 자신을 비추어가는 거울나라의 앨리스처럼.


그러나 포류는 혼란만을 낳는다.


자신을 속이려 할수록,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더 혼란스러워진다. 모순은 통합되는 것이 아니라 더 간극을 넓힌다. 분열만이 심화된다.


자기도 자기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멈춰서는 안될 것만 같다. 멈추면 지금껏 해온 그 모든 것이 백지가 되고, 자기의 인생은 총체적으로 무화된다. 시간만 버린 것 같다. 이것만은 피하고 싶다. 자기의 젊음이 전적으로 아무 것도 아닌, 다만 낭비된 시간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은 가장 고통스럽다.


젊은 꼰대는 지금 오해하고 있다.


그의 젊음은 아직 한 번도 시작된 적이 없다. 그러니 그는 젊음을 잃은 적도 없다.


그는 출발점부터 젊은 꼰대로 시작했을 뿐이다. 가장 늙고 정체된 막장의 것으로 시작해 이제 그것이 끝나진 것뿐이다.


정보를 얻은 만큼 자신이 그것을 살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늘날의 대표적인 착각이다.


남들이 대단하다고 하는 미슐랭 맛집의 정보를 얻고, 자신이 거기에 가서 '직접경험'을 한다고 자신이 그것을 삶으로 산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정보를 먹었던 것이고, 정보를 살았던 것에 불과하다.


'직접경험'은 '삶'과의 동의어가 아니다.


내가 직접 했다는 것이, 내가 내 삶을 살았다는 의미는 결코 될 수 없다.


이 지점을 분명하게 이해하면, 젊은 꼰대에게는 희망이 있다.


내가 내 삶을 살았다는 것은 오직 내가 삶에서 배웠다는 그 의미일 뿐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내 삶' 그리고 '내 마음'은 배움과만 연결되어서 그것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정말로 자신의 삶을 살아서 배우게 되는 그 내용은 무엇인가?


자신이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단 한 번뿐인 것을 단 하나뿐인 것으로 이토록 사랑하고 있다는 그 사실이다.


오늘 자정에 죽는다면 당신은 무엇을 어떻게 하고 싶은가? 왜 하고 싶은가?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에는 반드시 당신의 사랑이 담겨 있다.


삶은 '정보'나 '직접경험'으로 당신에게 자극을 공급하기 위해 소비되어야 할 소재가 아니라, 당신이 사랑하고 있던 것이다.


마음이라고 하는 거울에는 언제나 사랑하고 있는 당신의 모습만이 사실적으로 비친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는 언제라도 젊다.


사랑이 젊음의 특권인 것이 아니라, 사랑의 특권이 젊음이다.


삶을 게임으로 소비하려 했던, 그렇게 소비자의 왕이 되어 삶을 마스터한 것처럼 굴었고, 이제 자기가 배울 것은 없다고 착각하고 있던 젊은 꼰대는 그러니 아직 젊음의 시간을 가져본 적도 없는 것이다.


그의 시간은 이제 시작이다.


'젊은 꼰대'가 잠깨어 '젊은 그대'로 올 시간은 아직도 충분하다. 인생의 자정까지는 1분 1초가 매순간의 기회다.


그의 자정이 찾아와도 '젊은 그대'는 '젊은 그대로' 사랑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영원이라고 부른다.


마음의 거울에는 바로 그러한 당신의 모습이 언제까지고 비치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스마트폰 밖에서 온 심리학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