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는 심리적 직립보행이 필요하다"
우리는 정말로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개인 안에서 진화의 시간을 가속시키고자 한다.
상당한 시간 동안 '퇴행'은 '유행'이 되었다. 퇴행이야말로 마치 성공을 얻기 위한 새로운 방법론인 것처럼, 또 놀라운 최신의 지혜인 것처럼 완벽하게 착각되어 왔다.
그 결과, 개인들의 내면에서는 진화의 시간이 멎었다. 이 정체된 시간을 우리는 돌이키고자 한다. 막혀있던 흐름이 풀려나 이제 힘차게 흐를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
직립보행은 언제나 최우선이다.
그것만 되면 나머지는 빨리 된다. 직립보행을 하기까지가 어려웠던 것이지, 인류의 시조가 처음 두 발로 일어서 현생인류에 이른 뒤 지금까지 문명을 발전시켜온 속도는 어마어마하다.
직립보행은 내 발로 내가 세상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것이며, 내 눈으로 좋은 것들을 보고, 내 팔로 사랑하는 연인을 그 품에 안을 수 있는 현실을 의미한다.
이것은 부모로부터의, 또 부모를 대신해 작동하는 관계 및 네트워크로부터의 독립이다.
우리는 경제적 독립을 독립이라고 오해한다.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언제나 심리적 독립이며, 심리적 독립만이 인간에게 있어 독립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경제적으로 독립한 것 같아도 이 심리적 독립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인간은 직립보행의 상태가 아니다.
오늘날에는 경제적 독립이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 부모의 시선처럼 기능하는 네트워크에 더 많이 집착하고 의존한다. 즉, 심리적 독립을 저당잡혀 그 대가로 경제적 독립이라는 것을 얻으려 한다.
이러한 것이 대표적인 퇴행의 모습이다.
그러면서 이 퇴행은, 인간은 약한 존재이기에 서로를 도우며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의 유치원 개나리반에 붙어있는 표어 같은 것으로 미화되어 이 시대의 참된 윤리처럼 주장되곤 한다.
그러나 약한 것은 서로를 도울 수 없다.
그리고 서로를 돕지 않는다.
약한 것은 자기만 살아남기에 바쁘다.
심리적 독립이 이루어진 것들만이 서로를 도울 수 있다.
심리적 독립이 되어 있지 않은 이들이 모여 서로의 경제적 독립을 도와주자고 하는 모습은 사이비종교단체나 네트워크마케팅회사 등에서 자주 보이는 모습이다. 유튜브나 SNS에서도 무수한 자기계발강사들이 동일한 얘기를 떠든다.
이와 같이 '집단퇴행'을 조장하는 움직임이 오늘날의 '유행'이 되어 있다.
복고는 패션일 수 있지만, 퇴행도 패션인가?
강남역 대로에서 똥을 싼 뒤 "지나가는 엄마들, 헤헤, 응가 닦아 주세염. 황금색이라 이렇게 건강하고 이뻐염. 다음 주에도 또 쌀거니 즐겨찾기와 구독도 부탁드려염. ㅎㅎ"라며 엉덩이를 내미는 중년의 남성을 떠올려보자. 혹은 광화문 광장에서 단체로 누워 허공으로 두 다리를 든 채 버둥거리며 기저귀를 갈아달라고 하는 얌생이수염을 기른 힙스터들을 떠올려보자.
우리는 더는 이렇게는 살 수 없다.
더는 퇴행되어 정체된 상태에 머무를 수는 없다.
퇴행은 왜 일어나는가?
관심을 끌려고 일어난다.
누군가가 자신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것 같은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퇴행은 시도된다.
유아의 모습으로 퇴행하는 것은 부모로부터 관심을 받은 것 같은 그 순간이 유아기였기 때문이다. 혹자는 대중들 앞에서 강연을 하며 인기를 끌었던 것 같은 그 시점으로 퇴행하기도 한다.
이것은 '나'라는 것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대상이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어야 한다는 믿음에서 비롯한다. 애초에 '나'라고 하는 것은 부모의 도움이나 관계의 도움 또는 네트워크의 도움에 의존해서만이 성립될 수 있다는 그 믿음이다.
이것은 자신에 대한 과대망상이 만들어낸 믿음이다.
자신이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 만큼, 사람들도 당연히 자신에게 관심이 있을 것이라는 전적인 착각의 소산이다.
사실적인 이해는 이러하다.
사람들은 나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
나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나뿐이다.
나를 궁금히 여기고, 나를 필요로 하는 것은 나뿐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나의 필요일 뿐이다. 나에게 관심을 가져달라고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거나, 나에게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도록 획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애초 아니다.
나만 나에게 관심이 있다.
그러니 움직여야 하는 것은 나다.
일어나야 하는 것은 나다.
이처럼 '나만 나에게 관심이 있다.'라는 이 근본적인 사실을 이해할 때, 우리는 '심리적 직립보행'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나만 나에게 관심이 있다.'라는 말은 '나는 나에게만 관심이 있다.'라는 말로 정확하게 바꾸어 쓸 수 있다.
이토록 절대적으로 관심이 지대한 나를 알아가는 일은 분명하게 '심리적 직립보행'의 일이다.
우리의 심리적 독립은 바로 이 일을 통해서만 가능해진다. 퇴행의 상태에 머물며 긴 시간 동안 막혀 왔던 정체감은 이 '나를 향한 배움'의 활력을 얻어 해소되며, 우리 안에서의 진화의 시간은 경쾌한 물살처럼 가속화된다.
스마트폰 안에는, 관계 및 네트워크의 세상 안에는 '나'에 대한 무수한 정보들이 있을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나는 아니다. 정보로 나를 쌓아갈 수는 없다. 이야기로 나를 만든다는 식의 말은 강남역 대로의 응가사건과 같은 일이다. 내가 싼 똥들을 더 많은 이들이 아껴주며 치워줄수록 진정한 내가 되어간다는 얘기와도 같다.
모두에게 관심받는 유아를 진정한 나로 꿈꾸며 키우는 일이 오늘날 드러나 있는 궁극의 퇴행자의 모습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나만 나에게 관심이 있다는 그 사실을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는 것이 나라는 것 역시도 분명하다.
나는 사람들에게 키워지는 유아도 아니고, 사람들을 유아로 보며 키우는 부모도 아니다. 이러한 것들은 심리적 독립과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 당당하게 자기의 주장을 하는 유아가 되거나, 자상하게 유아를 키우는 부모가 되는 것이 심리적 독립이 아니다.
인간은 오직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만 두 발로 일어서 떠났던 것이다.
오직 나를 향한 나로서만 걸어감으로써 스스로 나를 배워가는 일, 이것만이 인간으로 성대하고픈 당신에게 필요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