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심리학 #62

"사랑은 내가 사랑하는 것"

by 깨닫는마음씨




사.랑.도. 능.력.이.다.


배워가는 것이며, 발달되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능력인가?


'주는 능력'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의 속성이 반드시 부여된다. 그것은 바로 '무조건성'이다.


결국 사랑은 우리가 무조건적으로 줄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실제적인 용법으로 쉽게 말하면, 사랑은 대상으로부터 받으려는 의도없이 단지 주는 것이다.


사랑은 우리가 어떠한 대상에게 최선을 다해 잘한 결과 얻게 되는 모종의 '보상물'이 아니다. 오히려 행위의 동기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을 행위의 동기로 이해하기보다 행위의 결과 내지 행위의 목적으로 오해하곤 한다.


이것은 당연하다.


사.랑.은. 애.당.초.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장미꽃의 향기는 특정한 대상을 겨냥해서 흘러나오는가? 대상을 성취한 그 보상으로서 자신의 향기를 발하게 되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장미가 장미 그 자신으로 먼저 존재하기에 자연스럽게 향기의 운동이 생겨나는 것이다.


존재하는 일 자체가 사랑이다. 곧, 존재의 자기표현이 사랑인 셈이다.


'무조건성'이라는 표현을 우리는 '이유없이'라고 바꾸어 이해할 수도 있다.


하이데거는 장미꽃에 대해 '왜'를 묻지 말라고 한다. 장미꽃은 그 자신이 장미꽃이라는 사실 외에 그 어떤 이유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장미꽃은 장미꽃의 이유다. 존재는 다른 이유없이 스스로가 그 이유다.


장미꽃이 다만 장미꽃이기에, 그 향기는 퍼져나간다.


우리 자신이 다만 우리 자신으로 존재하기에, 사랑은 펼쳐진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사랑은 내가 사랑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다만 내가 좋아서 그 모든 것을 한다는 '이유없이' '무조건적인' '자기표현'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런데 존재의 자기표현이 사랑이라고 할 때, 이 존재의 자기표현은 언제나 자기증여로 일어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는 것이 좋다.


그래서 사랑하는 이는 자기 자신을 준다.


자기 자신을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다 던진다고 묘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거듭 말하지만 특정한 대상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다는 뜻이 아니다.


사랑은 자신이 사랑하고 있다는 그 감각에 다 던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감각이라는 것은 결국 사랑의 운동을 펼치고 있는 존재 자신의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감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필연적으로 사랑이라는 것은 언제나 사랑하고 있는 그 자신에게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존재의 자기표현이란 더 많은 사람들을 향해 연예인처럼 "제가 이렇게 놀라워요."를 선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있는 현재 자신을 감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의 감각에 자신을 다 주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일이 생겨나겠는가?


자신이 다 준 사랑이 회귀해서 이제 자신이 그 사랑을 다 받게 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미. 보.상.받.았.다.는. 것.이.다.


사랑은 시작한 그 순간 이미 보상되었다


때문에 사랑하는 이는 자신이 사랑하고 있다는 그 사실 외에 다른 보상물을 바라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장 충만한 크기로 얻고 있는 까닭이다.


사랑에 대한 완벽한 착각은 먼저 받아야만 줄 수 있다는 착각이다.


어릴 적에 부모로부터 사랑받지 못해서 사랑을 주는 법을 모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그래서 결국 자신이 사랑을 주지 못하니 사랑받지도 못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매우 지겨운 삼류소설이다. 사실이 아닌데 계속 고집되는 삼류판타지다.


어떤 이는 하나의 공동체에서 일부러 사람들의 일을 망친 뒤에, 사람들로부터 눈초리를 받게 되면 이렇게 절규하곤 한다.


"내가 여기에서 소중하게 대해지는지 모르겠어요. 엉엉."


그는 자신이 일을 망쳐도 무조건적으로 사랑받아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이 사람들의 일을 망치며 사람들을 소중하게 대하지 않아도, 자신만은 사람들에게 먼저 소중하게 대해져야 한다고 억지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에 대해 오해하는 모든 방식이 이와 같다.


사랑은 내가 하는 것이라는 말은, 내가 먼저 내 자신에게 소중하게 느껴지는 그것을 소중하게 대하는 감수성으로 살아간다는 뜻이다.


그러면 자기 자신이 그와 똑같이 소중하게 대해진다.


자기가 준 사랑을 자기가 받게 된 것이다.


우리가 사랑받는 방식은 언제나 이와 같다.


이렇게 사랑하며 사는 이는 성숙한 이다.


사랑이 능력이라는 진술은 이 지점에서 더욱 분명한 이해를 전해준다.


아동은 아직 사랑할 능력이 없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아동은 단지 생존기계일 뿐이다. 우리는 아동이 마치 사랑으로 가득찬 디즈니 천사들인 것처럼 묘사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아동은 다만 생존을 위한 자원들을 받기에 유리한 진화론적 특질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포유류의 유체가 어딘지 모르게 어설프면서도 귀여운 외모를 갖고 있는 것은 사랑이 많아서가 아니라 성체의 보호본능을 자극함으로써 더욱 효과적인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서다.


즉, 아동의 모든 것은 받는 일에만 특화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아동인 그는 아직 줄 수 없다. 그 능력이 배양되지 않았다.


때문에 아동이 생존을 위해 받는 일을, 사랑이라는 것에도 똑같이 적용하려고 할 때 문제가 생겨난다.


그는 반드시 사랑을 먼저 받아야 자기도 줄 수 있다고 고집하게 되며, 어떻게든 여러 대상들로부터 사랑을 받기 위한 전략과 술수만을 궁리하게 되기 때문이다.


보편적으로 가장 많이 채택되는 아동의 방식은, 자기가 먼저 주는 척함으로써 상대로부터 받으려는 방식이다. 이것은 도덕원리로 포장되어 집행된다. 자기는 먼저 주었는데 상대는 주지 않았다며 상대에 대한 도덕적 우월감을 경험하려는 일은 빈번하다. 이것은 상대로부터 끝내 받지 못했을 때, 어떻게든 최후로 도덕적 승리라도 '받아내고자' 하는 의도를 실현하려는 방식이다.


자신은 상대에게 진실로 정성을 다했지만, 그 결과 많이 아프기도 했지만, 상대가 안쓰럽게도 그 사랑을 알아보는 눈이 없었다는 식의 얘기도, 또는 그래도 열심히 사랑했으니 자신은 후회하지 않는다는 식의 얘기도, 또는 이제는 아프지 않은 진실한 사랑을 만나러 가겠다는 식의 얘기도, 전부 다 상대로부터 단 하나라도 반드시 받아내겠다는 아동의 악착같은 고집과 의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들이다.


아동은 지금 사랑에 대한 자신의 무능력함을 선한 자신의 정체성으로 위장해 은폐하고 있는 것이다.


아동이 사랑에 대해 무능력해진 이유는 단순하다.


엄마로부터 모유를 받듯이, 사랑도 특정한 대상으로부터 받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리고 자기의 입장은 당연하게 받아야 하는 자로 위치시키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갑'의 입장이다.


아동은 언제나 자기가 사랑받아야만 한다고, 또 자기가 사랑받는 일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지는 일로 증거되어야만 한다고, 한사코 고집을 부린다.


아동은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이렇게 늘 '갑질'을 하려 한다.


자신을 사랑에 대한 정당한 채권자쯤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사.이.에. 사.랑.에. 대.한. 빚.은. 없.다.


사랑은 그저 자기가 좋아서 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럴 수 있는 능력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아무 대가와 보상없이 다만 좋아서 할 수 있는 능력이다.


자신이 주고 싶어서 주는 것이지, 주어야만 하기에 주는 것이 아니다. 또는 받기 위해 주는 것이 아니다.


곧, '주는 능력'이라는 것은 '자유를 실현할 능력'이다.


갑질은 상대로부터 받아야만 자기가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일과도 같다. 이렇게 우리 자신의 자유를 대상들에게 위탁하고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의 자유를 실현할 능력을 잃고 점점 무능력해진다.


이렇게 가장 무능력해진 상태에서 반드시 펼쳐지게 되는 대표적인 갑질의 예를 살펴볼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이 이제 진짜 사랑을 시작할 것이며, 작고 약한 것을 사랑하는 것이 진짜 사랑이라고 주장하는 일이다. 갑질의 주체는 원래 작고 약한 것만을 골라서 갑질을 시도하곤 한다.


이는 사랑을 '작고 약한 것에 대한 의무'로 만들고자 하는 일이다. 그 의도는 분명하다.


가장 무능력해져서 현재 작고 약하게 드러나 있는 자신이 결국에는 가장 받고자 하기 위함이다. 그는 자신이 사랑받아야 하는 일을 도덕적 의무로서 사람들에게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사랑이 의무로 '몰락'한 자리에서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울 길은 요원해진다.


의무로 주는 것은 행위적으로는 운동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여도 주는 것이 아니다.


주어야 할 아무 이유가 없는데, 자신의 자유로 주어야 그것이 주는 것이다.


그러니 사랑은 굳이 작고 약한 것에 주지 않는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준.다.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미리엘 주교의 모습은 마치 주어야 할 아무 이유가 없는데 장발장에게 준 사랑의 구현자처럼 말해지곤 한다. 물론 그렇지 않다. 장발작이 작고 약하다는 그 이유로 준 것이다. 물론 미리엘 주교에게는 작고 약한 것이 그가 좋아하는 것일지 모른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 또한 그렇지 않다.


좋아하는 이는 좋아하는 것을 닮는다. 사랑이 그를 사랑으로 성숙해지게 한다는 말과도 같다.


작고 약한 것을 좋아하는 이라면 그의 모습은 이미 작고 약한 것으로 드러나 있다.


어려운 시기에 은촛대들이 전시된 성당에서 주교의 신분을 가진 이가 과연 그렇게 작고 약한 것인지에 대해 우리 자신을 설득하는 일은 꽤나 어렵다. 차라리 그의 입장은 한없이 '갑'에 가깝다.


주어야 할 아무 이유가 없다는 말을, 줄 수 있는 아무 자원이 없다는 말로 바꾸어 이해하면 더욱 선명해진다.


작고 약해서 아무 것도 줄 수 없는 이가, 그래서 자기 자신밖에는 줄 것이 없는 이가, 자기보다 더 크고 강한 것에 자신을 다 던져 주었다면, 그것은 붓다다. 톨스토이와 오헨리의 단편들에서도 이와 같은 인물들의 모습은 자주 묘사된다.


이러한 이들이 진짜 사랑의 구현자다.


그렇다면 이들은 '을'인가?


굳이 해당의 표현을 써서 말해야 한다면 '신성한 을'이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사실적으로 이들은 '을'이 전혀 아니다. 이들은 오히려 갑을관계 자체를, 곧 채무관계 자체를 벗어나 있다.


'갑'이 되어 '을'을 보살피는 척하면서 실은 '을'에게 전적으로 받으려고 획책하고 있지도 않고, 또는 '을'로서 자신이 '갑'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일에 비극적으로 도취되어 있지도 않다.


이들은 다만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더욱 크게만 한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더욱 큰 것으로 확인해간다. 이러한 방식으로 사랑에 대해 배워가며 발달되어간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다 주고, 자신의 존재를 다 얻은 것이다.


장미는 오직 장미의 가능성에만 자신을 다 주고 장미로 피어난다.


내가 내 자신이라는 의미는 이러한 것이다.


사.랑.은. 내.가. 내. 자.신.일. 수. 있.는. 능.력.이.다.


사랑하는 것에 내 자신을 다 줌으로써, 사랑으로 피어난 내 자신을 얻을 수 있는 그 능력이다.


정말로 주는 것으로서만 나는 나다.


그렇게 사랑은 내가 사랑하는 것, 아무 이유없이 내가 오직 그 이유일 뿐인 것이다.


장미가 장미이고, 내가 나인 것이 이제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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