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가 몇이게?

라라쏘냐 - 빰쁠로냐

by 외투



알베르게의 침대는 허리와 엉덩이 부분이 많이 꺼져있었다.

안 그래도 낯선 침대인데 자고 나면 허리가 뻐근했다.

8시가 넘어 일어났다.

"아뇽, 상한?"

뤼노는 정확한 발음으로 내 이름을 불러준 거의 유일한 외국인이었다. 이어서

"배드 필그림"

'침대 순례자'는 아닐 테고, 늦게 일어났다고 '불량 순례자' 란다.

"노 아임 낫 배드 필그림. 아임 어 투어리스트, 굿 투어리스트!"


다른 사람들도 막 일어났다. 안나와는 여전히 서먹했다.

아침은 전날 점심에 먹고 남았던 보까디요와 커피로 해결했다.

젖은 신발에 신문지를 넣고 히터 옆에 놓아두고 잤더니 잘 말라 있었다. 뽀송뽀송한 신발에 발을 넣으니 기분이 좋아진다. 뤼노와 함께 출발.

프랑스인은 상당히 개인적이라고 여행 내내 들었지만 뤼노는 예외였다.

항상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노력했고 잘 챙겨주었다.


'오늘은 어디까지 가야지'라는 건 없었다. 그냥 걷다가 점심 무렵에 정하곤 했다.



이날은 뤼노가 앞서 가지 않았다. 내 속도에 맞춰 걸었다.

잠깐 앞서가다가도 '아차, 쟤가 있었지!' 잃어버린 물건 찾듯 뒤돌아보고는 기다려주었다.

뤼노는 스페인어도 잘하고, 영어도 잘했다. 물론 프랑스어도 잘했다.

나는 스페인어도, 영어도 배웠지만 아마도 지금의 초등학생 수준도 못 될 것이다.

'쏘리, 왓?'을 입에 달고 다녔다. 그때마다 뤼노는 천천히, 정확한 발음으로 되풀이 해주곤 했다.

속내를 털어놓지는 않았지만 뭔가 간절한 마음으로 뤼노는 '까미노'에 임하고 있었다.

카메라도 지니지 않았다.

멋진 풍경만 보면 카메라를 들이대는, 투어리스트 성향이 강한 나와는 좀 달랐다.

가끔 위피(와이파이를 위피라고 했다)가 되는 곳이면 내 휴대폰을 빌려가 메일을 확인하곤 했다.

38살이라고 했는데 은행에서 근무하다가 상사의 실적 압박에 시달리다가 그만두었단다.



개고기


다음 마을이 나왔다. 마을이라기에는 조금 커서 소도시 정도는 돼 보였다.



초입의 개울가 벤치에 앉아 잠시 쉬면서 수돗가에서 목을 축이고 물통도 채웠다.

신발을 벗어놓고 풍경을 감상하고 있는데 한 할아버지가 지나가며 뭐라 뭐라 말했다.

뤼노가 말하기를 '개를 먹는 한국인은 가라' 고 했단다. 순간 기분이 나빠졌다.

내가 한국인인 건 어떻게 알았는지.. 그만큼 까미노에 한국사람이 많다는 얘기일까?

나도 역사와 유래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모르면서 무조건 남의 문화를 비판하는 건 잘못이다. 유래와 역사를 모르지만 투우는 얼마나 잔인한가?

'소를 잔인하게 죽이는 스페인 사람은 지구를 떠나거라!' 고 해줄걸..

'아~ 만나는 사람들마다 모두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냐?'

그걸 곧이 곧대로 내게 말해준 뤼노도 조금 못마땅했다.

그냥 몸만 좀 힘들고 좋은 경치와 자연 속에서 마음의 여유와 휴식을 얻을 줄 알았는데, 어제는 안나와의 일로 힘들더니 오늘은 개고기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 초장부터 만만치 않구나. 피레네 산보다 마음의 산이 더 높고 힘들었다.

그래 나 개고기 먹는다. 일부러 찾아 먹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마다하지는 않는다. 어렸을 적 허약한 편이었는데(지금도 그리 튼튼하지는 못하다) 한약사이셨던 외할아버지가 소고기라 속이고 먹이셨다. 그게 첫 경험이었고 방위소집 해제한 뒤 맹장수술 후 의사가 회복에 좋다며 개고기를 권했었다. 그리고 한동안 개고기를 혐오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해서 먹지 않다가 지금은 있으면 그냥 먹는다.

반려동물에 대한 관심이 날로 커지고 있기에 언젠간 사라질지도 모르는 개고기. 윗세대에게는 귀한 음식이었고 나의 세대는 반반, 아랫세대에게는 점점 혐오음식 또는 야만적으로까지 취급되어지고 있다. 브리짓바르도 때문만은 아니래도 유럽을 비롯한 서양에서는 당연히 보는 시선이 좋을리 없다.

지금은 그냥 우리의 문화라고 생각 중. 보존하고 가꾸어야 할 소중한 문화.... 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연스레 언젠간 사라질지라도 창피해하며 숨겨야 할 건 아니다.


아기자기한 언덕을 오르내리며 시원하고 부드러운 바람을 맞으며 걷는 길은 더없이 상쾌했다. 힘들면 앉아서 쉬고 목이 마르면 간간이 나오는 수도꼭지를 틀어 물을 마시고(아, 우리가 언제부터 물을 사 먹었던가?) 배고프면 빵, 과자, 과일을 꺼내먹고..



가끔 키가 큰 뤼노가 높은 나뭇가지에서 딴 빨갛고 작은 열매를 내밀며 '포 비타민'이라고 했는데 시큼털털한 게 먹을만했다.

구기자 같았다.


시골길을 벗어나 도시로 접어들었다.




도심의 길을 걷다 보면 놀라운 게(어쩌면 당연한 것이지만) 운전자들이 보행자들을 배려한다는 것이었다.

무심코 길을 건너려다 빨간 신호등을 보고 걸음을 멈추면 차를 세우고 먼저 지나가라고 손짓을 해주었다.

처음엔 '아, 순례자에 대한 배려인가?' 했는데 보행자를 우선으로 삼는 교통 문화였다.

횡단보도 앞에서는 더 속력을 내서 걸리지 않으려 하고, 노란불은 '좀 더 빨리 지나가시오'로 알고 있었는데 그들의 보행자 우선의 문화가 참 여유로워 보였다.




'빰쁠로냐' 다.

TV에서 보았던, 도시에 소떼를 풀어놓고 사람들과 질주하는 축제가 열리는 도시.

오며 가며 인사를 하는 사람들. 표정들이 참 밝았다.

간간이 '올라~부엔 까미노' 하며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도 있었다. 처음 보는 이와도 인사를 나누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안녕, 좋은 여행 해-'라고 한국에서도 웃으며 인사를 나눴으면 좋을 텐데..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도 엘리베이터에 함께 타면 스마트폰이나 거울만 멀뚱하게 쳐다보기 일쑤다.



배도 고프고 '점심을 어떻게 할까...' 생각하는데 뤼노가 '가게에 가자'라고 했다.

몇 군데를 기웃거리더니 '아시아계'의 주인이 있는 가게가 싼 것 같다며 들어갔다.

'이런 알뜰한 프랑스인이라니..'

가게에 들어가서도 이것저것 비교하며 골랐다. 가능하면 묶음상품으로 사서 나누자고 했다.

'내가 사과를 살게, 너는 토마토를 사면 좋겠다.' 하면서

그리고 자리를 잡은 곳은 관공서로 보이는 건물 앞이었다.

건물 앞에 앉아 바게뜨의 배를 칼로 가르기 시작했다. 치즈를 넣고 참치도 넣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그리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다. 의외로 참치와 바게뜨가 잘 어울렸다.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먹는 한낮의 길거리 점심이 낯설지만 재밌기도 했다. 그래도 여전히 바게뜨는 질겼다.


점심을 먹고 대성당과 도시 골목을 좀 거닐다가 오늘은 이곳에서 머물기로 하고 알베르게를 찾아 나섰다.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알베르게 앞에 제이미와 안나가 앉아 있었다. 반가움 75%, 서먹함 25%.

대나무 사무엘이 알베르게 안에서 나왔다.

조금 이르지만 들어가도 된단다.

침대를 배정받는데 안나와 같은 칸에 있기가 불편해 옆 칸으로 옮겨달라고 했다.


짐을 풀고는 갑자기 피곤해져서 '씨에스타'를 핑계로 누워버렸다. 아직도 시차의 피로가 덜 풀렸나 보다. 하긴 도착한 날 바로 공항에서 선잠을 잔대다가, 그 다음 날 피레네를 넘고 어제는 꽤 오래 걸었으니 피곤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는 스페인. 그러므로 나는 씨에스타를 누려야만 해.

밖으로 나가자는 뤼노를 무시하고 누워버렸다.

알베르게는 공사를 하고 있었다. 1층에서 뚝딱거렸고 2층은 새롭게 리모델링되어 깨끗했다. 큰 교회를 알베르게로 개조한 것 같아서 천장이 높다. 망치소리를 자장가 삼아 늘어지게 한 잠잤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눈을 떠보니 크리스와 조가 도착해있다. 반가움 138%!

괜히 편한 사람이 있고 괜히 불편한 사람도 있다. 내가 그런 만큼 남들도 그럴 테지만. 그렇다고 어쩔 수 있나. 어차피 같은 길을 가는 길동무들인걸.

크리스와 조는 밝고 편한 에너지를 가진 사람들이다.

나와 안나가 남긴 메세지를 보았냐고 물어보니 보지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대신 안나가 찍어놓았던 사진을 보여주니 너무 좋아하는 두 사람. 비록 하루밖에 되지 않았지만 자신을 기억해주고 또 자신을 위해 누군가 메모를 남겨주었다는 것. 누군들 좋아하지 않을까.

이틀 만에 재회한 기쁨을 나누고, 주방시설이 잘 갖춰져 있고 대형마켓이 있다는 얘기에 저녁을 해 먹기로 합의하고 우르르 몰려나갔다. 뤼노와 나, 코알라 크리스와 캥거루 조, 뉴요커 제이미와 스트롱 안나, 그리고 대나무 사무엘 7명이 각각 국적이 서로 달랐다(크리스와 조를 빼고-그나마 조도 일본계이다).

크리스와 조가 토마토소스와 파스타, 치즈 등을 고르고 있을 때 대나무 사무엘은 와인을, 안나는 맥주를 골랐다. 나와 뤼노는 '와 여기 정말 싼데' 하며 다음날 먹을 빵과 부식들을 샀다.

한 보따리를 샀지만 함께 나누니 얼마 되지 않았다.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뤼노와 밤거리를 구경하러 나가기로 했다. 모두들 저녁식사 준비를 하는데 우리만 빠져나오기가 미안했지만 '괜찮아, 설거지하면 돼' 라며 쿨하게 나서는 뤼노를 따라나섰다.



점심을 먹었던 건물. 저기 오른쪽 귀퉁이가 점심을 먹던 자리


삼삼오오 바르의 와인통 주위에 서서 술 마시며 얘기하는 사람들.

대도시라고는 했지만 오래된 건물들 투성이라 우리나라의 대도시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화려한 네온사인도 보이지 않았고 은은한 조명 속에 오래된 건물들이 묵직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외국의 밤거리가 처음인지라 겁을 먹었는데 뤼노가 유럽의 밤거리는 대부분 안전하다고 안심시켜 주었다.

맨발에 샌들을 신고 나왔더니 발이 조금 시렸다.


알베르게로 돌아오니 식사 준비가 거의 다 되었다.

뤼노와 나는 한쪽 구석으로 가서 팔 굽혀 펴기를 했다.

매일 걷기만 하니 몸의 균형을 위해 상체온동을 하는... 게 아닌, 오로지 밥을 먹기 위한 운동이었다.

'포 디너'



내 나이가 몇이게?


식사 전 크리스가 축사를 했다.

뭐라고 하는지 못 알아 들었지만, 아마도 '모두 만나게 되어 반갑고, 건강하게 산티아고 길을 걷기를 바란다'라는 내용이겠지. 모두를 위해, 까미노를 위해.. 치어스! 살루트!

음식에 대한 최고의 찬사는 바로 '맛있게 먹는' 것이다.

정말 맛있는 식사였다.

토마토소스에 쵸리소와 햄을 넣은 조의 요리에 모두들 '원더풀' '판타스틱'. 양도 많아 마음껏 먹었다.

조는 날더러 '굿 이터'라고 했고 나는 '원래 많이 먹는 편은 아닌데, 워낙 맛있어서...'라고 했더니 '굿 보이!' 란다. 조가 기뻐하니 나도 좋다. 사실 많이 먹는 편인데.

사무엘은 자기가 만든 바질(이라던가) 소스는 놔두고 조가 만든 소스를 더 먹었다.

사무엘 표 소스는 색깔도 그렇고 맛도 별로였다.


그런데, '굿 보이' 라니?! 내 나이가 몇인데.

말이 나온 김에 나이 맞추기를 했는데, 누군가가 '32살'이라고 했다.

기분 좋으라고 한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기분이 좋아졌다.

아니라니까 이번에는 '44살' 이란다.

아무리 나이 맞추기라지만 기분이 상했다.

몇 번 오르락내리락하더니 결국 제이미가 맞췄다.

'40', 불혹은 모든 것에 미혹되지 않을 나이라는데 나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나의 40은 '불혹'이 아닌 '풀(full) 혹'이다. 쉽게 여기에 혹하고 저기에 혹한다. 줏대가 없다.

후배의 '유럽에 가면 볼게 얼마나 많은데'라는 말에 혹해서 '까미노 가서 괜히 고생하지 말까' 하고 할 필요도 없는 고민도 잠깐 했었다. 길을 걸으며 이런 나를 다시 한번 돌아보고, 이런 나의 모습에 작게나마 변화가 있기를 바랬다.

그런데 요즘 40은 예전의 그 40과는 다르다. 수명이 많이 늘었으니 50 정도는 되어야 당시의 40에 견줄 수 있으려나. 아마 인생의 절반을 훌쩍 넘긴 나이가 40이었을 거야.

나의 불혹은 50으로 미뤄보자. 그때 가서도 아니면 더 미루고...

나무십자가 목걸이 2개를 가지고 갔었는데, 제이미에게 상품으로 하나를 주었다.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제이미가 목걸이를 받고는 좋아했다. 뤼노가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많이 부러워했다.


남은 스파게티를 깨끗한 그릇에 담아 두고 좀 전에 뤼노랑 나갔다가 사온 쵸코 빵으로 후식을 먹었다. '쵸코 쵸코' 쵸코렛을 좋아하는 안나를 크리스가 '쵸코 홀릭' 이라며 놀렸다.

디저트와 와인을 나누며 크리스가 자기 얘기를 늘어놓았다.

호주에서의 생활과 까미노에 오기 전 여행했던 라오스 얘기.. 등등 한참을 재미있게 얘기해주었다. 마치 영화 '굿모닝 베트남'의 로빈 윌리암스처럼 익살스러운 표정과 성대모사로 보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왔다.

캥거루 조가, 남편 크리스의 무용담이 끝나자 '마이 라이프 이즈 서커스!'라고 했다.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 한마디로 분위기는 짐작할 수 있었다.

'서커스 인생'이라.. 아슬아슬하고 손에 땀을 쥐게 하고 때론 배꼽 잡게 만드는, 그런 인생.

내 인생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음.... 모르겠다.


약속대로 설거지는 뤼노와 내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피곤해 보이는 순례자 두 명이 주방으로 들어왔다.

캥고루 조가 남은 스파게티를 보여주며 권하자 잠시 생각하다가 고맙다며 받아갔다.

침낭 속으로 들어가 누웠는데 빗소리가 천장에서 크게 울렸다.

비가 너무 많이 오지 않았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