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페라다 - 뻬레헤
잠을 깊게 자서 그런지, 운이 좋았던 건지 여지껏 코골이 때문에 잠을 설친 적은 없었다.
혹시 내가 코를 골지는 않았으려나..
프란시스코도 까미노에 적응이 되었는지 간밤에 더 이상 끙끙거리지 않았다.
순례자용 냉장고에 남아있던 우유를 꺼내 빵과 함께 먹었다.
계란을 삶고 남은 우유를 데워 '레체 꼰 까페'를 만들어 보온병에 담아 출발하려는데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생장에서 받았던 숙소 정보가 적혀있는 안내지가 없다.
호스피딸레라 베로니카에게 얘기했더니 레온 지역 안내지를 준다.
오늘 '비야플랑카' 에 알베르게가 열었는지 물으니 '씨!'.
그럼 오늘은 그곳까지만 가볼까.
배낭을 싸들고 나와 마당에서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었다.
이제 약 200km 남았다.
산티아고까지 8~9일 후면 도착할 것 같다.
12월 2,3일 도착인데, 그러면 20일이 남는다.
피스테라와 무시아를 간다면 15~16일이 남고..
아무래도 포루투갈길은 힘들 것 같다.
나머지 시간을 어떻게 때우지..
비용은 한정되어 있는데 유럽에서 보내야 하는 시간이 늘게 되면 오히려 난감하다.
까미노처럼 돈을 적게 들이면서 머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도시를 가로질러 어제 가보았던 성을 지나 까미노는 이어진다.
안갯속에 모습을 드러내는 성이 정말 '폰페라다'라는 도시 이름의 어감과 왠지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아침의 폰페레다는 안개를 '폰폰' 뱉아냈다.
지형 때문인지, 기온 때문인지 도시를 가로지르는 개천이 온천의 수증기 같은 안개를 피워 올린다.
아침 기온이 1도.
그렇다고 춥지는 않았다.
걷다 보면 몸이 금방 더워진다.
약간 쌀쌀한 게 걷기에 더 좋다.
성을 지나서도 한참을 걸을 만큼 큰 도시이다.
아침 운동하는 사람, 산책하는 사람.. 정말 산책할만하겠다.
나도 산책을 하듯 가벼운 마음으로 가볍게 걸었다.
대학가도 지난 것 같았는데 도시의 외곽은 공사 중이어서 어수선했다.
아담하고 예쁜 교회와 정원을 지나간다.
교회를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공터에 고양이가 떼로 몰려있다.
자그마치 14마리!
고양이 알베르게라도 되는지..
녀석들은 나를 경계하지 않고.. 그냥 구경한다.
검은 놈, 흰 놈, 바둑이, 얼룩이, 홀로 있는 놈, 둘셋 붙어 있는 놈, 창틈으로 내다보는 놈..
생김새도 가지가지, 포즈도 가지가지.
스페인 약국 간판은 기온을 알려준다.
11시쯤 되었을까, 한마을에 도착했는데 영상 4도.
정말 걷기 좋은 날씨야.
마을 쉼터에 앉아 빵과 따뜻한 커피우유로 간식을 먹는데 한 아저씨가 다가와 사진을 찍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안될게 뭐 있어. 내 사진기로도 한 장 찍어달라고 했다.
과일, 빵 등을 사서 식량을 보충했다.
마을을 떠나 1시간쯤 걸으면 도로를 건너 얼마 안 가 쉼터가 나온다.
아침에 분명 내가 먼저 출발했고, 지나치는 것도 못 봤는데 프란시스코, 카를로스, 노리꼬가 먼저 와 쉬고 있다.
'숏컷(지름길)'을 이용했단다.
새치기당한 기분.
배낭을 내려놓고 나도 그 틈에 끼어 함께 쵸코렛과 과일을 나누었다.
마들렌을 꺼내 주니 '한국에도 마들렌이 있느냐?'라고 프란시스코가 물었다.
당연하지, 마들렌이라는 영화도 있는걸. (왜 제목이 '마들렌' 인지는 잘 모르겠다.)
달달한 게 맛도 좋은 데다 저렴했고
어제 아세보에서, 조금 과장하면 거의 아사 일보직전의 위급한 상황을 대비해서 샀다.
개도 마들렌을 먹으려나..
보아하니 프란시스코와 노리꼬가 까를로스를 돕는 것 같았다.
오늘 이들은 비야플랑카까지 간다고 했다.
아침에 출발하기 전 베로니카도 비야플랑카에 무니시팔이 열려 있다고 했었다.
거리도 그렇고.. 내심 나도 그곳에서 머무를 작정이었다.
난 더 쉬었다가 느긋하게 출발했다.
돌을 쌓아 만든 쉼터의 벽이 온통 낙서로 가득했는데, 여기서도 한글을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세 늙은이가 자알 걷고 있습니다.'
'요한, 문규, 강산, 근호, 조시 감사 로드.'
'재입대하는 기분'
'일사병 조심해요.'
어르신들의 자부심이 느껴지는 낙서도 있고, 친구들의 우정을 확인하는 낙서도,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이의 낙서도,
그리고, 그런 아들을 두었을 것 같은 자상한 어머니(아줌마가 아니라면 죄송)의 마음 같은 낙서도 있다.
모두 같은 길을 걷고 있지만 연령대도, 내용도, 느낌도, 글씨체도 가지가지.
나는.. 낙서할 여유도 없다.
까까벨로스를 지나 화살표 따라 무작정 걸었는데..
어째 낚인 기분이다.
도무지 인적은 찾아볼 수 없는 허름한 마을에 도착해 버렸다.
손님 유치를 위해 마을 사람들이 화살표를 자기네 마을로 그려놓은 것 같았다.
어쩐지 화살표가 유난히 뚜렷해서 새로 그린 것 같더라니..
얼마나 돌아온 거지?
그 거리와 시간과 체력이 아까웠다.
곳곳에 폐가가 보이는 마을에 배낭을 내려놓고 쉬었다.
고양이 한 마리 볼 수 없다.
그렇다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는 싫었고.. 프란시스코 일행을 따라갈 걸..
한참만에 지나가는 사람을 만나 까미노를 물었다.
그제야 다시 화살표가 보인다.
포도밭을 지나 조금 더 가자 오늘의 목적지 비야플랑카가 나왔다.
알베르게 표시를 따라갔더니 입구에 '쎄라도'라고 쓰여있다. 닫혔다고!?
뭐야.. 오늘 아침에 베로니카는 열려있다고 했는데 어떻게 된 거지?
여기가 아닌가? 무니시팔이 또 있나? 하며 마을로 더 들어가 보는데
아이고 반가와라
프란시스코 일행이 보인다.
어제까지만 해도 열려있던 알베르게가 바로 오늘 닫아버렸단다.
이런 망할 놈의 무니씨팔 같으니라고.
맥이 빠졌다.
돌고 돌아 힘들게 왔건만..
노리꼬가 마을에 사립 알베르게가 열려있다고 해서 그리로 향했다.
잠시 기다리자 주인이 도착한다.
하지만 프란시스코와 노리꼬는 주인과 무언가를 얘기하다가 다음 마을인 뻬레헤까지 가기로 했다.
나도 그 알베르게가 썩 내키지 않았다. 뭔가 정이 안가.
뻬레헤까지는 약 5km.
프란시스코가 내게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다. 어떻게 하긴 나도 따라갈래.
5km면 한시 간 이상 걸릴 테지만 더 걷기로 했다.
비야플랑카를 뒤로하고 고개를 올라 뻬레헤로 향했다.
뻬레헤의 철자는 'PEREJE'이지만 'J'를 지우고 'X'로 고쳐 써서 'PEREXE'로 바꿔놓았다.
갈리시아 지역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가도 가도 이놈의 뻬레헨지 뻬레첸지는 나올 생각이 없다.
걷기 시작한 지 한 시간을 훨씬 넘겼는데도 안 보인다.
5km 가 왜 이렇게 먼 거야!
해도 저물어가는데..
도로에서 벗어나 산길로 뻬레헤 푯말이 보였다.
드디어 도착.
아주 작은, 몇 가구 없는 산중마을이다.
이곳은 기부제가 아니라서 까를로스는 캠핑을 해야 하는데 마땅한 장소가 있을지 걱정이다.
알베르게 문은 열려있는데 관리인이 없다.
프란시스코가 전화를 걸자 잠시 후 관리인이 왔다.
관리인은 먼저 알베르게의 이곳저곳을 안내해 주었다.
지하(길에서 보면 지하인데 반대편에서 보면 1층)에 화장실과 샤워실, 세탁실이 있고 마당이 있다.
음 까를로스는 여기에 텐트를 칠까 잠시 고민해보고.
1층이 침실이고 2층이 주방인데 특별히 이곳은 목조 건물이므로 불조심을 하라고 당부했다.
2층 주방은 산장의 옥탑방 같았는데 널찍하고 천장으로 창이 나 있어 운치를 더했다.
온수는 나오지만 난방은 되지 않았고 대신 여분의 모포가 침대마다 놓여 있었다.
안 그래도 산속이고 늦가을이라 기온이 많이 떨어져 다들 '프리오 프리오'한다.
입김도 나오는 것 같았다.
이 날씨에 까를로스는 어쩌지?
알베르게 안내가 끝나고 스탬프를 받고 계산을 하는데..
까를로스도 텐트 치기가 싫었는지 수중의 돈을 모두 털어본다.
이곳저곳에서 꺼낸 동전들을 하나하나 쌓아보는 까를로스.
이것은.. 바로 '동전 쌓기 신공!'
고수나 구사하는 비기인데..
언뜻 빈대 붙기 고수의 향기가 물씬 풍겨왔다.
관리인도 조금 당황해했는데..
동전 쌓는 모습이 측은해 보였는지 노리꼬가 숙박비를 대신 내주었다.
그제서야 동전 쌓기를 멈추고 '헤헤..' 웃는 까를로스.
처음 아스토르가에서 '버섯'을 요리하던 까를로스에게 받았던 첫인상이 동전탑과 함께 완전히 무너졌다.
관리인은 키를 놓고 돌아갔다.
내일 아침에 나갈 때 우체통에 넣어두라며.
이제 알베르게는 우리 세상이다!
맘에 드는 침대를 골라 짐을 풀어놓은 뒤, 먹거리를 싸들고 2층 주방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각자의 식재료를 모두 식탁 위에 풀었다.
카를로스에게는 갖가지 푸실리와 스파게티면, 양념과 채소, 올리브유 외에도
소빠가 여러 종류 있었고 양상추까지 있다.
버섯은 다 먹었는지 안보였다.
내게는 참치캔과 햄, 프란시스코에게는 빵과 비스킷과 갖가지 견과류가 있다.
프란시스코의 빵은 보기에도 좋아 보이는 빵이었고 '있는' 사람들이나 먹는다는 '왕자표' 비스킷도 있었다.
'왕자표 비스킷'은 쵸코렛이 듬뿍 발라져 있어 아주 달았는데 비스킷 중 가격이 비싼,
가히 까미노 비스킷계의 '왕자'급이었다.
포장지에도 왕자 그림이..
뤼노와 다니면서 싸고 양 많은 묶음 비스킷만 사 먹던 내게는 그저 동화 속 왕자님 같았던 비스킷.
하지만 싸구려 비스킷에 입맛이 길들여졌는지 '왕자표 비스킷'은 내게 너무 달았다.
베지타 프란시스코에게 참치는 먹는지 물어보니 '에네르기'를 위해 가끔은 괜찮다고 한다.
완벽한 채식주의자는 아닌가 보네.
'오늘의 메뉴(메뉴 델 디아)'는 뽀요 소빠와 참치 샐러드 파스타.
주방장은 까를로스.
노리꼬는 '프리오 프리오'하면서도 옆에서 필요한 것들을 척척 준비해주었다.
나는 설거지.
따뜻한 소빠가 몸을 녹여주었다.
푸실리를 삶고 양상추를 잘게 썰어 참치와 함께 올리브유에 버무리고 소금을 뿌려먹는다.
'시장이 반찬(헝거 이즈 더 베스트 소스)' 때문이 아니라
그저 '귀모자급' 재료로 뚝딱뚝딱 만들어 냈는데도 그 맛이 '왕자급'이다.
고수 까를로스의 손맛 때문일까.
프란시스코의 '아보카도' 도 맛보았는데.. 상한 달걀 같아..
후식으로는 원두커피.
까를로스는 원두커피도 가지고 다녔다.
각설탕 몇 개를 넣어 산장에서 마시는 따뜻한 커피가 구수하면서도 달콤했다.
노리꼬가 자신의 아이폰을 꺼내더니 만지작한다.
그러더니 나더러 '위피'를 검색해보라고..
검색하니 사용 가능한 '와이파이' 가 잡혔다.
패스워드란에 'NORICO'를 넣으란다.
그랬더니.. 인터넷에 접속이 되네!
이메일을 확인해보니 로그로뇨의 알베르게에서 메일을 보내왔다.
미안하지만 일기장은 찾지를 못했다고..
할 수 없지 뭐. 아쉽기도 했지만 홀가분했다.
미적미적거리며 가지고 있던 일기장에 대한 미련은 오늘부로 끝이다!
까를로스도 아이폰으로 노리꼬 기지국을 이용해 유튜브에서 좋아하는 음악을 찾아서 플레이시켰다.
전자기타로 연주되는 귀에 익숙한 멜로디.
파헬벨의 '캐논'이다.
자유분방하고 강렬한 게 까를로스에게 잘 어울린다.
홀쭉한 프란시스코는 감성은 뚱뚱한지 오케스트라 버전이 풍부해서 더 좋다고 했고,
몸도 마음도 호올~쭉한 나는 좀 차갑고 쓸쓸한 조지 윈스턴의 피아노 연주곡이 좋다.
같은 음악을 놓고 좋아하는 취향도 가지가지, 국적도 가지가지.
스마트폰의 배터리가 다되어 뚜껑을 열고 배터리를 갈아 끼웠더니,
까를로스가, 마치 토끼가 간을 넣다 뺐다 하는 걸 보기라도 한 것처럼 놀래서 "오스띠야!" 한다.
헤럴드가 알려줬던 그 '오스띠야' 다.
이럴 때 쓰는 말이구나.
그야말로 실전 '오스띠야'.
조금 춥지만 따뜻한 사람들과 함께 우리만의 공간을 마음껏 누린다는 게 참 편하고 행복했다.
난방이 되지 않아 춥긴 했지만 점퍼를 껴입고 침낭에 들어가 모포를 덮으니 괜찮다.
부에나스 노체스-
꿈같은 시간을 보내고 꿈나라로..
그날 나의 뼤레헤산장은 그 어떤 알베르게보다도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