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스의 선물

싼타 이레네 - 몬테 도 고조

by 외투



"씽꼬 미누또!"

세면실에서 이를 닦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벌컥 열더니 툭하니 내뱉고는 문을 닫는다.

'씽꼬 미누또? 5분? 뭐라는 거야..' 했더니 퇴실 5분 전이란다.

모두들 8시에 알베르게에서 쫓겨나 밖으로 나왔다.

뭐 이런 경우가!

다들 불만으로 투덜거렸다.

여지껏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아침이면 느긋하게 뜸 들이다가 일어나 여유 있는 아침식사를 하고도 밍기적 거리기 일쑤였는데 오늘은 달랐다.

아마도 '비수기라 쉴 수 있는데 너희들 때문에 오늘도 이렇게 아침에 일을 해야 되잖아!'라고 행동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배낭도 싸는 둥 마는 둥 짐을 이고 지고 밖으로 나와 알베르게 앞에서 정리했다.

덕분에 우리는 문 앞에 서서 빵도 나눠먹고 바나나도 나눠먹었다.

'이것도 나쁘지는 않네..' 하는 표정들이다.

요리스는 자기 반만한 빵을 들고 '냠-' 거린다.

바바라가 요리스의 것이라며 작고 앙증맞은 새 신발을 내어 보인다.

'신어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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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타고 가면 조금 돌아가야 하고, 숲길이나 비포장길에선 끌고 가야 하며 아기와 자전거를 모두 받아주는 알베르게를 찾아야 하기에 하루 이동거리가 생각보다 짧다.

그래서 그제 포르토마린에서 같이 출발했는데 여기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오늘은 몬테 도 고조까지 갈 예정이라고 했다.

그곳까지는 채 20km 가 되지 않는다.

나는 어떻게 할까?

몬테 도 고조에서 머물까, 아니면 오늘 싼티아고까지 가버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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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치시아는 반대로 생장을 향해 걷는다.

프랑스식 볼맞춤 인사가 무지 어색했다.

리치시아에게 '부엔 까미노'했더니 '좋은 길-'한다. 헐~

무지개가 떴고.. 요르헨이 요리스를 태운 트레일러를 끌고 먼저 출발, 그 뒤를 바바라가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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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엔 까미노!

나와 발렌틴만 남았다.

우리는 피노까지 함께 걸었다.

발렌틴의 복장은 특이했다.

모직 외투에 나무 지팡이를 들고 텐트와 우쿠렐레까지 메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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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노에서 발렌틴은 PC를 써야 할 일이 있다며 마을로 들어가고 나는 다시 혼자 길을 걸었다.

까미노는 길을 건너 숲길로 이어졌다.

인적 드문 숲길은 조금 무섭기도 했지만 상쾌해서 좋다.

아침의 숲길은 더 싱그럽다.

신선한 내음을 마시며 걷고 있는데 땅에 무언가가 떨어져 있다.

바바라가 자랑하며 신어보라던 요리스의 새 신발.

이런, 신발 한 짝을 흘렸네. 주위로 자전거 바퀴 자국이 선명했다.

이런 숲길을 자전거로 가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자전거를 타는 사람도, 트레일러에 실린 요리스도 피곤하겠다.

조금 더 가니 나머지 신발 한 짝마저 땅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이번에는 줍기 전에 한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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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짝을 띄엄띄엄 흘려놔서 배낭을 두 번이나 들었다 놨다,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해야 했다.

신발을 핑계 삼아 오늘은 몬테 도 고조까지 가기로 했다.

싼티아고는 내일로 미루자.


IMG_1305.jpg 아닌데.. 산미구엘이 공식지정스폰선데..


오늘도 한글이 보인다.

예쁜 숲길을 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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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만 해도 상쾌해지는 길.

그런데 어제 많이 걸어서 그랬는지 오늘은 어째 영 컨디션이 좋지 않다.

당장 컨디션이 좋으니 뒷일은 생각지도 않고 달려버렸더니 후유증이 남았다.

발도 무겁고 배낭도 무거운데 신발한켤레까지 더해졌으니(그것도 핑계라고) 자꾸 몸이 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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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을 지나면 작은 마을이 나온다.

비수기의 유원지처럼 황량하고 쓸쓸한 표정의 마을에서 바르를 찾아 들어갔다.

'보까디오 꼰 또띠야'와 '까페 꼰 레체 그란데' 한잔을 주문하고 앉았다.

유난히 갈리시아 지역의 보까디오는 더 크게 느껴졌다. 아니 더 크다.

천천히 꼭꼭 씹어먹고 커피를 마시고..

결국 거대한 보까디오는 다 먹어치우기를 포기하고 반은 은박지에 싸서 배낭에 넣었다.

바르를 나와 가게를 향해 가는데 반대 방향에서 프란시스코가 걸어왔다.

타냐도 함께다.

내가 또 돌아온 것일까? 앞섰어도 한참을 앞섰어야 했는데..

오늘은 정말 느리게 걸었나 보다.

프란시스코가 반가워하며 '왜 그렇게 빨리 갔느냐?'라고 묻는다.

'내가 풀파워였거든..'

다행스럽게도 프란시스코가 나의 메모를 발견했다면서 아주 좋아했다.

작은 종이쪽지 하나에 그렇게 호들갑을 떨며 좋아하다니.. 베지타는 오바쟁이.

그리고 그 메모를 노리꼬와 까를로스에게 전달해 주겠다며 가져왔단다.

그런데 노리꼬, 까를로스와는 까사노바 이후로는 만나지 못했단다.

어디로 간 거지?


2011-11-30_152838_%28mov-30112011%28018%29%29.jpg 프란시스코의 사진중에서


비가 오락가락하는 길을 이들과 앞서가니 뒤서가니 하며 걸었다.

나약해 보이는 채식주의자 프란시스코와 강인하고 씩씩한 러시아 타냐의 조합이 묘하게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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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테 도 고조 바로 전 마을, 역시나 인적은 없었다.

마을을 지나 언덕 위로 커다란 조형물이 보였다.

나는 이곳 몬테 도 고조에서 묵기로 하고 언덕 위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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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게는 저 조형물 옆으로 조금만 더 가면 있다.

여지껏 본 조형물들 중 가장 마음에 안 들었다.

스페인의 건축물도 그렇고, 작은 마을의 조형물 하나도 아기자기하게 주변의 풍경과 잘 어울렸는데 이건 좀 위압적이면서도 모양도 꽝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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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와 타냐는 오늘 싼티아고까지 간다고 했다.

"아스따 루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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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물은 별로였지만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멋졌다.


이곳의 알베르게는 정말 커다란 현대식 난민 수용소 같은 느낌이다.

현대식 막사 같은 건물이 언덕의 경사를 따라서 수십 동이 늘어서 있다.

여기서 어떻게 요리스를 찾나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한동만 열려있었고..

한여름의 성수기였다면 그야말로 사막에서 바늘 찾기가 될 뻔했다.

바바라가 요리스를 안고 숙소 입구에서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서성이고 있었다.

"하이-"

배낭을 내려놓자마자 바바라 앞에 요리스의 신발을 꺼내 보였다.

정말 반가워한다.. 신발을.

안 그래도 그 근방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신발 보았느냐?' 고 일일이 물어보았단다.


스탬프를 받고 방에 들어서자 안토넬라가 반기며 안아준다.

그녀는 오늘 죠셉과 함께 걸었다고 했다. '알레그리아 델 디아!'죠셉.

죠셉은 오늘 밤을 싼티아고에서 보내겠구나. 조금 아쉽다.

요리스의 신발만 아니었어도 죠셉과 만날 수 있었을 텐데.

한방에 2층 침대가 4개 있었는데 그냥 침대 하나씩을 배정해준다.

이 방에는 나와 안토넬라, 무릎이 좋지 않은 쟝과 우크렐레 발렌틴 이렇게 넷이다.

안토넬라와 쟝은 까미노 초반에 잠시 함께 걸었던 터라 이미 서로 알고 있었다.

짐은 침대 1층에 늘어놓고 2층에 침낭을 깔았다.

짐을 풀자마자 주방으로 갔다.

이곳엔 조리기구와 그릇이 충분했고 각종 양념류도 있었다.

우선 아까 먹다 남은 은박지로 싼 보까디오를 팬에 데웠다.

안토넬라도 배가 고팠는지 마주 앉아 먹거리를 꺼냈다.

따뜻하게 데운 보까디오에 설탕을 쳐 먹었다. 안토넬라의 치즈도 얻어먹고.

간식을 먹고 개운하게 씻고 - 정말 한국에서는 잘 안 씻는데 - 밖을 내다보니 비바람이 제법 분다.

잠시 후 한국인 셋이 숙소에 들어온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S, 든든해 보이는 K, 꽃미남 J군 이렇게 셋은 까미노에서 만났다는데 며칠째 이곳 몬테도고조에서 싼티아고를 버스로 왕복하고 있다고.

비바람에 홀딱 젖었지만 밝디 밝은 그들이었다.

낮에 산티아고를 즐기다가 저녁이 되면 버스를 타고 이곳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것이다.

호텔의 무료 조식 서비스도 두 번이나 체험했다는 J군은 15살 중학생이다.

참 글로벌하구나. 15살에 유럽을 혼자 돌아다니고..

나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인데 J군도 대단하지만 부모님도 참 대단하시다.

우두머리 S는 직장을 그만두려다가 직장에서 마침 시간을 내줘 까미노를 걷고 있다고 했다.

음 까미노를 마치고도 돌아갈 직장이 있다니, 부럽기도 하고.

참, S가 요한과 베아를 보았다고 했다.

베아는 자기가 요한과 친남매라며 요한의 아빠 환호에게 '아빠'라고 했다고 한다.

뻥을 치다니.. 베아도, 요한도 보고 싶다.

K는 축구 유니폼 차림이다. 조금 껄렁해 보였지만 순수해 보이기도 했다.

나처럼 베드벅에 물려 고생을 했다는데 흉터가 아직 남아있었다.

물려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동병상련의 애틋한 감정이 솟아났다.

이들이 괜찮다면 저녁을 같이 먹자고 했다. 들어올 때 양손을 무겁게 하고 들어온 이들이었다.

'잘됐네 뭐' 하는데 안토넬라가 들어와 이따가 저녁을 같이 먹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쟝과 함께 갈 건데 같이 가자고 했다.

한국사람들과 함께 먹을지도 모른다고 사정을 얘기하자 그럼 나중에 결정하라고.

괜히 쟝과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마음속으로는 이미 결정했다.

한국 친구들과 먹기로.


비바람이 심하게 몰아치는데 몇 명의 순례자가 더 들어왔다.

프랑스 남자를 중심으로 여자 몇 명이 함께였는데 S가 '쟤 냄새나는데..' 한다.

길 잃은 작은 강아지 한 마리도 따라 들어와 입구 한쪽에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이렇게 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떠들썩하게 주방을 차지하고 저녁식사를 했다.

파스타에 닭가슴살 샐러드와 요거트로 한상 차려 먹었다.

옆에서는 프랑스 청년을 중심으로 한 무리가 판을 벌리고 있었다.

듣기로 이 청년은 약간의 왕자병이 있다고 했는데 그러고 보니 조금 거만하고 거들먹 거리는 것 같았다.

프랑스 왕자가 비에 젖은 바게트를 내게 던졌다.

내 옆의 히터에 올려달라는 것이었는데 기분이 나빴다.

이들에게 물건을 던져주고받는 것은 아무렇지 않겠지만 문화가 다른 나는 달랐다.

나도 따라 해 본다고 헤럴드에게 던져 보았었는데 어찌나 어색하던지..

생각 같아서는 젖은 바게뜨로 한대 때려주고 싶었지만 내 손은 벌써 바게뜨를 히터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이 놈의 손모가지를 그냥..

한쪽에서는 프랑스 왕자 무리가 시끌벅적 식사를 했고, 다른 쪽에서 우리는 프랑스 왕자의 험담을 하며 왁자지껄 식사를 하고 있는데 그 사이에 쟝이 앉았다.

어라? 안토넬라가 쟝과 함께 저녁 먹으러 간다고 했었는데..

알고 보니 쟝은 무릎이 좋지 않아 함께 가지 못했다고 한다.

한국인 무리와 프랑스 왕자 무리 사이에 낀 쟝이 좀 외로웠겠다.

그렇다고 잘 모르는 쟝을 우리 쪽에 내 맘대로 데려다 앉힐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잠시 후 판초에서 빗물을 뚝뚝 흘리며 들어온 안토넬라가 포장해온 저녁식사를 쟝앞에 내려놓았다.

안토넬라는 저녁식사가 아주 좋았다고, 순례자라 할인도 받았다며 자랑했다.

혼자 식사했을 안토넬라에게 미안했고, 룸메이트 쟝을 혼자 저녁을 먹게 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식사 후 숙소 출입구 앞에 서서 밖을 바라보았다.

비바람이 아까보다 더 거세게 몰아쳤다.

K가 작은 그릇에 먹을 걸 담아 강아지에게 준다.

허기진 강아지가 맛있게 먹어치운다.

비스킷 몇 조각을 주니 냉큼 받아먹는다.

훈련을 받았는지 처음에 정해준 자기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 K와 얘기를 나누었다.

그는 까미노에서 큰돈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샤워를 하며 옷걸이에 걸어두었던 지갑을 깜빡하고 놔두고 잠자리에 들었다는 것.

돌아가 보았을 때는 이미 지갑은 사라진 뒤였단다.

불행 중 다행으로 돈을 나눠 보관했기에 일부가 남았지만 그래도 모자란 경비를 까미노 친구들 덕분으로 계속 걸을 수 있었다고 했다.

아마도 내가 그 상황에 처했다면 공황상태에 빠져 헤어나지 못했을 텐데..

처음 봤을 때 그저 밝아 보이기만 했던 그가 그런 어려움을 겪었다니..

그런 내색 없이 밝고 당당하게 행동하는 K가 참..


방으로 돌아와 쉬고 있는데 '똑똑' 누군가 노크를 했다.

바바라가 요리스의 손을 잡고 우리 방에 들어왔다.

그리고 요리스의 손에 쥐어진 작은 종이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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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스의 그림(?)에 바바라가 글을 적었다.

'고마워요. 신발을 찾게 되어 행복해요'

삐뚤빼뚤 그어진 선과 바바라의 글이 적힌 구겨진 종이, 참 소박하고 따뜻한 선물이다.

아까 프란시스코가 고작 메모 한 장에 그렇게 호들갑을 떤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바바라가 요리스의 손에 볼펜을 쥐어주고 '그려봐 그려봐!' 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절로 미소가 그려진다.


안토넬라에게 '내일 아침식사는 호텔 무료 조식 서비스를 이용해볼까?' 했더니

역시나 도도하게 '상한, 그거 홀에서 정식으로 먹는 것도 아니고 주방한켠에서 종업원들이랑 먹는 거야.' 라며 먹지 말란다.

얇은 귀를 가진 나는 금세 '아, 그렇구나' 하고 호텔 무료 조식 서비스를 포기하기로 했다.

J군 말로는 괜찮은 것 같았는데..


비바람이 창밖을 때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내일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비바람이 조금은 가라앉았으면 좋겠다.

오늘 많이 걷지 않아 혹시 노리꼬와 까를로스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이곳에 오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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