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와서
세수를 하면서 수염을 밀어버렸다.
50여 일을 길렀던, 아니 길렀다기보다는 깍지 않은 수염을 밀고 나니 바지를 벗은 것처럼 허전했다.
한국에서는 삭발하는 것만큼 수염을 기르는 것 또한 사회생활에 많은 제약이 되었기 때문에 해보지 못했었는데... 원 없이 해보았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이 참 낯설었다.
별로 신뢰가 가지 않던 스코틀랜드 '라지'가 나를 보더니 웃으며 수염 깎는 시늉을 해 보였다.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기 전에는 머리를 밀더니, 스페인에서는 비행기를 타기 전에 수염을 밀었다.
다음에 비행기를 타게 되면 또 어디를 밀게 될까..
아침식사는 특실이나 싸구려 문칸방이나 모두 1층의 주방에서 똑같은 식사가 제공되었다.
리빙 라운지에 비할바는 못됐지만 그래도 라지와 함께 실컷 먹었다.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배낭을 꾸렸다.
여태껏 매일 아침에 꾸리던 배낭과는 달랐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꾸리는 배낭.
먼저 침낭을 넣고 가벼운 옷가지들을 넣었다.
기념품은 잘 싸서 넣고, 한국은 추운 겨울일 테니까 도착하면 꺼내 입을 생각에 두꺼운 옷들은 마지막에 넣었다.
그런데 정리하다보니 주사기가 나왔다.
뤼노가 선물로 주었던 주사기였는데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마음이 담긴 소중한 주사기였지만 비행기를 타는데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버리기로 했다.
그래도 뭐 또 다른 뤼노의 선물, 올리브나무십자가가 있으니까.
배낭을 다 싸놓고 보니 어딘가 조금 이상했다.
몰라보게 홀쭉해졌고 또 그만큼 가벼워졌던 것.
방수재킷을 도둑맞았지만 대신 타냐의 재킷이 생겼고... 내가 버린 물건이래야 장갑 한 짝, 양말 두 켤레, 그리고 배낭 커버가 전부였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배낭이 눈에 띄게 헐렁했고 가벼워졌다.
생장에서 먹거리도 넣지 않고 쟀을때 12kg였던 게, 이때는 넉넉하게 잡아도 채 10kg이 안 나갔던 것 같았다.
오히려 포르투에서 산 기념품 때문에 무게가 더 나가야 되는 게 정상일텐데... 왜 이러지,이놈의 배낭이 진짜로 미쳤나?
너무 가볍게 느껴졌던 것은 기분 탓이었을지 몰라도 빵빵했던 배낭이 홀쭉해지다니(그동안 매달고 다녔던 샌들까지 넣었건만), 아무래도 배낭이 미친 게 틀림없었다.
미처 모르게 뭘 흘리고 다녔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떠오르지 않았다.
도대체 배낭에서 빠져나간 건 무엇일까.
배낭 가득 담고 다녔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배낭이 미쳤다.
미친 배낭을 메고 공항으로 가는 길, 어깨는 가벼웠지만 마음이 조금씩 무거워졌다.
아, 이제 나의 꽃 시절도 막을 내리는구나.
마드리드 공항은 깨끗했다.
출국 수속을 마치고 면세점에 들렀다.
어차피 동전은 가지고 가봤자 짐만 될 것이기에 모두 사용해버리기 위해서였다.
'뭘 사갈까..' 하다가 내게 장비를 제공해주었던 매제 생각에 열쇠고리를 사고, 남은 돈으로는 진공 포장된 쵸리소하나를 샀다.
나를 실은 아에로플로트는 정시에 모스크바를 향해 날아올랐고 이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음료 서비스와 식사가 나왔다.
뭘 먹을까 하는 고민 없이, 내 의사와 상관없는 식사가 참 편했다.
그런데 메뉴가 뭐였는지 기억이 안 나네.
첫 기내식은 또렷하게 기억이 나는 반면 그보다 더 최근의(그래 봤자 50여 일 정도) 기억인 이날의 기내식은 무엇이었는지 흐릿했다.
그만큼 무뎌진 것이겠지.
처음의 설렘보다는 이제 돌아가 맞닥뜨릴 또 다른 현실이 더 큰 문제로 다가왔을 테고.
첫 눈은 모스크바에서 맞았다.
실제로 맞은 건 아니었고 모스크바 공항에 도착하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가을이 한창이었던 모스크바가 엊그제 같았는데 어느새 한겨울.
가을에서 가을로, 또 가을에서 가을로, 겨울을 피해 가을을 따라잡던 여행이었는데 반나절도 안돼 겨울로 점프해버렸다.
유리한장을 사이에 두고 밖은 겨울이었지만 나의 체감 계절은 아직 가을이었다.
창밖의 눈 쌓인 모스크바 공항과 상관없이 나의 계절은 아직 가을로 관성 중이었다.
9시 20분 출발 예정이던 아에로플로트는 10시 5분으로 늦춰졌다.
그리고 다시 10시 5분에 출발하려다 멈춰섰다.
'하늘 위의 알베르게'답게 기장호스피탈레로아저씨가 제설작업이라도 하러 갔는지 다시 출발이 늦춰졌다.
눈발이 더 날리기 시작했고.. 잠시 후 비행기 동체에 크레인을 이용해서 무슨 부동액 같은 액체를 뿌려댔다.
기체 전체를 코팅하듯 액체를 흠뻑 뿌린 후에야 드디어 이륙.
조금 불안했지만 비행기는 눈발을 뚫고 잘 날아올랐다.
어두운 비행기 실내였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상영되는 영화도 별로 재미없고 해서 휴대폰에 항상 저장하고 다니는 영화를 꺼냈다.
'정복자 펠레'
펠레가 축구로 세계를 정복한다는 내용의 영화는 아니다.
덴마크로 일자리를 찾아 스웨덴을 떠나온 늙은 아버지와 그의 어린 아들 펠레의 이야기.
아름답지만 혹독한 환경 속에서 꿈을 키워가는 소년의 모습을 그린 영화였다.
언젠가 후배와 영화에 대해 얘기를 하다가 좋아하는 영화를 세편 나열해봤었는데,
스탠 바이 미, 빌리 엘리엇, 그리고 정복자 펠레였었다.
그랬더니 후배가 '선배는 애들 나오는 영화만 좋아하네..'라며 핀잔을 준 적이 있었다.
(게다가 모두 집을 떠나는 영화)
나도 몰랐는데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그중에서도 '정복자 펠레'를 가장 많이 반복해서 보곤 했었다.
그렇게 오락적인 요소가 많지 않은데도 질리지 않는 매력이 있는 영화다.
영화는 거친 겨울바다를 향해 떠나는 펠레를 보여주며 막을 내린다.
비록 깨어진 작은 휴대폰 액정을 통해 다시 본 영화였지만
노쇠한 아버지를 두고 미지의 세계를 향해 거친 겨울바다로 나아가는 펠레의 모습이,
휴식 같았던 여행을 마치고 차가운 겨울 하늘을 날아 집으로 돌아가는 마당에
남 얘기 같지 않아 더 몰입이 되었다.
펠레는 어떻게 되었을까?
창밖으로 희부옇게 동이 터 오르고 있었다.
해를 거슬러 동쪽으로 날다 보니 그만큼 밤이 짧아진다.
좌석이 창가가 아니라 '일출'은 볼 수가 없었다.
뭐 비행기에서 보는 일출은 금테라도 둘렀나...
비행기는 아직 겨울의 시베리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한참을 더 날아서야 바다를 건넜고 한국땅, 서해의 갯벌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바라본 겨울의 한국은 잿빛이었다. 어째 낯설다.
떠날 때 가을의 한국은 갈색이었는데...
무사히 활주로에 착륙, 수화물 칸에 실렸던 미친 배낭도 무사히 도착.
악명 높은 러시아 항공이라 걱정을 했었는데, 약간의 연착 말고는 아무 탈 없이 잘 다녀왔다.
누군가에게는 악몽 같은 러시아 항공이지만 내게는 만만해서 편안한 '하늘 위의 알베르게'였다.
입국절차를 마치고 인천공항청사에 들어서자 갑자기 라면이 먹고 싶어졌다.
유럽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한국에 오니 한국음식이 당겼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다녀도 분식집을 찾을 수가 없어서 하는 수 없이 육개장으로 대신했다.
매운 것을 잘 먹지 못하는 편인데도 매콤하면서도 구수한 육개장이 입에 착착 감겼다.
그동안 어떻게 한국음식을 참고 버텼는지 몰라.
육개장을 맛있게 먹고 지하철을 타기 위해 지하로 내려오니 그제서야 분식집이 나타났다.
항상 이런 식이라니까..
공항전철을 타고 서울역으로 향했다.
한국은 스페인보다 많이 추웠지만 따뜻한 방에서 한참을 머물다가 밖으로 나왔을 때처럼 아직은 추위에 무덤덤했다.
나를 둘러싼 날씨도 관성 중.
도착한 시각이 점심 무렵이었으니 직장인들의 퇴근시간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있었다.
그 말인즉슨 보증 갱신이 가능한 시간 또한 많이 남았다는 것.
비행기에서 하루를 보냈으니 12월 23일 금요일, 오늘만 잘 넘기면 내일은 토요일 크리스마스 이브이고 모레가 크리스마스..
그러면 보증의 부담으로부터 해방된다.
집에 일찍 들어간다고 해도 뭐 친구가 지키고 앉아서 나를 기다리지는 않을 테지만 아직까지는 집에 도착하지 않은 걸로 해두고 싶었다.
그리고 왠지 가출했다가 돌아온 것 같아 훤한 대낮에 집에 들어가기가 망설여졌다.
여행의 여운도 좀 더 느끼고 싶었고.
배낭을 둘러매고 향한 곳은 용산.
오랜만에 극장에서 영화나 한편 볼까.
50여 일 만에 보는 서울이 예상보다 썰렁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가라앉은 분위기의 도시와 거리를 볼 때마다 한국의 북적대는 도심의 모습과 많이 비교가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보니 서울도 별로 활기차게 보이지 않았다.
겨울 추위도 추위였지만 세계적인 경기침체 한파를 한국이라고 피해갈 수는 없었나 보다.
꿀꿀한 거리 풍경에 괜히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졌다.
'취업전선에도 한파가 몰아치고 있겠네..'
용산의 한 극장에서는 마침 '미쎤 임파써블'이 상영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코앞에 둔 한낮의 금요일, 극장은 방학을 맞은 학생들로 그리 한산하지는 않았다.
대낮에 집에 들어가기는 망설이면서 대낮에 커다란 배낭을 메고 극장에 가는 건 어찌 그리도 자연스러운지..
조명이 꺼지고 익숙한 주제곡에 마음이 설렜다.
영화는 기대 이상(?)으로 코믹했고 극 중에 유럽의 풍광이 펼쳐질 때면(비록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은 아닐지언정) 많이 반가웠다. (불과 몇 시간 전에 환승했던 모스크바에 있는 크렘린궁도 날려버렸다)
돌아보면 나의 여행에서도 참 임파써블한 일들이 있었지.. 에단 헌트만큼은 아니지만.
영화가 끝나고 퇴근길의 만원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행했다.
그제야 한국의 서울시민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만원 지하철도 반가웠다. 소매치기 염려도 없고.
여행기간 중 가장 고마웠던 것은 식구들 모두 건강했다는 것이다.
정말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더니 여행기간 동안 식구들 모두 건강해서 나 또한 마음 놓고 다닐 수 있었다.
식구들 덕분으로 무사히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다.
엄마는 짧아진 내 머리를 보시고는 '얘가 혹시 무슨 일이 있었나..' 조심조심 내 눈치를 살피시는 듯했고 아빠는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하셨다.
출국 전날 삼계탕을 해주셨던 것처럼 특별식을 해주지는 않으셨지만 오랜만에 먹어보는 엄마표 밥상이 너무나 반가웠다.
배낭을 대강 풀어놓고, 씻고 오랜만에 방바닥에 이불을 펴고 누웠다.
집에 돌아왔구나.
'내가 어디를 다녀왔던가..' 몽롱하게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빈털터리일 줄 알았는데 통장에는 예상보다 많은 돈이 들어있었다.
엄마가 주셨던 비상금이 고스란히 남아있었고, (전)직장의 사장님이 퇴직금을 넉넉하게 입금해 주셨기 때문이었다.
다만 몇 달 간이겠지만 버틸 수 있는 자금이 생긴 것이다.
몸은 불편한 곳이 없었는데 한 군데, 발바닥이 아팠다.
한걸음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바늘로 콕콕 쑤시는 듯한 통증이 발바닥 전체로 번졌다.
여행 중에는 몰랐었는데.. 배낭도 없이 걷는데도 발바닥이 아파서 얼마간은 고생을 해야 했다.
돌아온 지 며칠 지났을 무렵, 보증을 서줬던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제는 안심이 되어 별 부담 없이 전화를 받았는데 친구 녀석은
"한국에 왔냐? 다행히도 담당자가 네가 돌아올 때까지 연장해준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어. 내일 가서 갱신하자." 라며 나를 반겼다.
아, 순간 가슴이 철렁.
나의 도피성 외유 작전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신용보증..'어쩌고 하는 이름의 그 기관은 정말이지 신용이라고는 있는 건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약속한 날짜를 넘기고도 편의대로 고무줄 늘리듯 연장을 해주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수입도, 재산도 없는 사람에게 보증을 세우는 이유가 뭔지 그 저의를 알고 싶었다.
보증 갱신은 친구의 바람대로 무사히 이루어졌고 1년만 기한을 연장하면 그 후로는 보증을 서지 않아도 된다고 했는데, 다시 1년 뒤 담당자가 바뀌었다는 이유로 또다시 연장을 해야 했다.
앞으로는 절대로 보증 같은 건 서지 않을 것이다.
다음에 누가 보증을 서달라고 하면 그땐 아예 보증 없는 나라로 이민을 가버릴까..
퇴직금을 넉넉하게 넣어주신 사장님을 찾아가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렸더니 아직 내 자리를 안 치워놨단다.
잠시 흔들렸지만, 그야말로 도피성 외유와 이직이라는 여행의 명분 모두가 물거품이 될 것 같아 '직장을 이미 구했다'고 말씀드렸다.
새 직업을 구하기 시작했는데, 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운전 관련직종을 찾아보았다.
운전하기를 좋아했고 돌아다니는 것 또한 좋아하면서도 '핸들 잡는 일'에 대한 안 좋은 선입견을 갖고 있었기에 꺼려했었는데 한번 도전해보기로 한 것.
물론 뾰족한 기술도, 능력도, 남들만큼의 스펙도 없었기에 다른 선택의 여지도 많지 않았다.
그렇게 구인구직사이트를 뻔질라게 드나들다가 한 곳을 찾아 면접을 보게 되었고 구정 연휴가 끝나는 대로 출근을 하기로 했다.
한국에 돌아온 지 한 달가량 되었으니 적당히 쉰 것 같았다.
한 달 이상 쉬게 되면 눈치가 장난이 아니다.
친척들이 모두 모이는 구정 연휴를 무사히 통과하고 새직장으로 출근을 했다.
재래시장에는 마이너스가 되고 가정에는 플러스가 된다는 마트의 인터넷 주문 배송업무였는데 며칠 해보니 할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월급제 기사로 일을 하다가 동료기사 한 분이 몸이 안 좋아 자신의 차를 팔겠다며 내게 싸게 주셨고, 그래서 소위 말하는 '지입차'를 사서 일을 하게 되었다.
수중에 가진돈이 없었기에 생전 처음으로 대출을 받고(물론 보증을 세우지는 않았다), 남은 퇴직금을 더해 간신히 차량구입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수입도 전에 비하면 적고 국경일이나 휴가도 없으며 사회적 지위도 낮은 직업군('을'도 못 되는 '병'이나'정'정도)에 속하지만 내게는 그런대로 잘 맞는 직업이었다.
또 모르지, 더 맘에 드는 일자리가 생긴다면..
'Good speed is your speed!'
남보다 빠르던, 느리든 간에 나만의 속도를 찾아가는 중이다.
휴가가 따로 없지만 매일매일 쫓기지 않고 일을 하기에 '휴가'를 고르게 쪼개서 하루하루 나눠놓은 것 같았다.
마트 위층에 극장이 있어서 일이 한가한 오후에 가끔 영화를 볼 수 있는 건 보너스.
무엇보다 스트레스가 적으니 생활에 여유가 생겼다.
걱정을 하실까 봐 엄마에게는 운전한다는 말씀을 드리지 않았는데 어떻게 아셨는지 가끔 출근할 때면 "운전 조심해"라고 하셔서 나를 당황케 하셨다.
장마철이면 조수석 문짝에 처박아 놓은 타냐의 재킷을 꺼내 입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까미노를 걷던 기분을 잠시나마 불러낼 수도 있었다.
'세상을 바꾸는 시간'에 나왔던 능글맞은 강사의 말대로 월급을 받으면서부터 아빠에게 용돈을 드리기 시작했다.
이게 처음 드리기가 어려웠는데(혹시라도 받지 않으실까 봐 책상 위에 슬쩍 놓아드렸다),
그러다 점점 주머니에 직접 찔러 넣어드리기도 하고.. (물론 엄마가 아시면 큰일 난다)
그러면서 조금씩 아빠와의 대화는 짧게나마 시작이 되었고 지금은 간혹 가다 출근 전 커피도 얻어마실 수 있게 되었다.(그래도 가끔씩 부딪히는 건 어쩔 수 없다)
커피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아빠표 모닝커피에 우유를 섞으면 까페 꼰 레체.
스페인에서 마시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그래도 마실만하다.
스파게티 역시 종종 그때를 떠올리며 해 먹지만 그 맛은 낼 수가 없다.
그뿐만이 아니라 스페인을 떠나던 날 공항 면세점에서 샀던 쵸리소마저 짜고 질기기만 해서 다 먹지 못하고 버려야 했다.
음식이라는 게 때와 장소, 함께 먹는 사람에 따라 맛이 달라지나 보다.
어쨌든, 나는 아빠와의 관계 회복을 돈 주고 샀다.
전 직장의 거래처 사람들에게서도 다시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운전대 잡기 전에 연락이 왔었다면 모르겠는데.. 이제 직업도 구했겠다, 일자리 제의는 거절했다.
대신 가끔 만나서 막걸리 사발을 기울였는데,
그럴 때면 '내가 프랑스 짠돌이 한놈을 똘마니로 데리고 다녔는데 말이야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여행담을 무용담 수준으로 뻥 튀겨 늘어놓았다.
까미노를 가지 않았더라면 더 좋은 직장을 구하고 가족과의 관계가 더 좋아졌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떠오를 때가 있지만,
까미노는 내 인생에서 몇 안 되는, 오만 번 잘한 선택중 하나다.
까미노에서 맺었던 인연들과는 페이스북을 통해 소식들을 접할 수 있었다.
처음 해보는 페이스북이 재미있어 매일 들락거리며 사람들의 근황을 알아보고, 사진을 정리해서 올리기 시작했다.
자칭 사진작가 홀리안은 약속대로 카우치써핑을 열어 나를 초대했다. 어떻게 내가 가기 힘들다는 걸 알았는지..
말로만 사진작가인 줄 알았는데 홀리안의 앨범에서 멋진 사진을 볼 수 있었다.
요한은 캠핑카를 타고 개 한 마리와 함께 히피 같은 복장으로 스페인 곳곳을 떠돌아다니고 있었고
사무엘도 수염을 깎고 말끔한 얼굴로 나타났다. 여행자를 위한 알베르게는 아직 만들지는 않았다.
사진첩에 까미노 사진이 없는 걸로 봐서는 도둑맞은 아이패드는 찾지 못한 것 같았다. 나쁜 페드로..
의외로 사무엘이 꼽은 까미노 친구는 베아였다.
아마 우리를 앞질러 갔을 때 베아 일행과 걸으며 좋은 추억들을 만들었었나보다.
베아는 매년 까미노를 걸었다.
이듬해인 2012년에 포르투갈길을 걸었고, 2013년에는 북쪽 길을 걸었다.
조셉은 직장을 구했는지는 모르겠는데 밝은 모습으로 얼굴을 내비쳤다.
지금도 가끔씩 조셉의 호두까기 비법을 잘 써먹고 있다.
헤수스와의 대화는 주로 축구에 대한 내용으로 채워졌다.
조기축구팀에서 내 포지션이 바르셀로나의 다니엘 알베스와 같다고 하니까 '너는 문신이 없잖아' 라며 트집을 잡았다.
뉴요커 제이미는 내가 올린 사진들을 보고 '상한도 포루투갈길을 걸었는데, 나도 걸어야지. 길이 부르고 있어..' 했는데 아직 걷지는 않았다.
서먹하게 헤어졌던 안나와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서로의 안부를 물었고(안뇽도 잊지 않고 있었다)
까미노 첫걸음을 함께 했던 캥거루 조는 호주의 서쪽 해안길을 따라 펼쳐져 있는 골드코스트 트레일을 걷자며 우리에게(안나, 제이미, 나) 한번 놀러 오라고 했다.
캥거루 조 역시 내가 가기 힘들 줄 알았나 보다.
씨그릿아줌마 역시 독일에 오게 되면 연락을 하라고 했다.
사람들의 초대를 받았지만, 갈 수도 없고 형편이 형편인지라 농담으로라도 '한국에 놀러 오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왕빈대 까를로스는 내가 보낸 사진을 첨부한 메일은 수신했는데 답장은 없었다.
베지터리언 프란시스코는 아이티 컨설턴트답게 잘 편집된 사진을 메일로 보내왔고 나도 약속대로 타냐의 사진을 보내주었다.
노리꼬의 연락처는 끝내 알 수가 없어서 많이 아쉬웠다.
같이 걸었던 프란시스코도 몰랐고.. 페이스북을 아무리 뒤져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베드벅에 물렸을 때 신세를 많이 졌던 D와 H와도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D는 까미노의 추억을 담은 앨범을 책자처럼 만들었는데 좋은 기념이 돼보였다.
올베이로아에서 만났던 B와는 소식을 주고받다가 전 직장에 후임으로 온 길 대리랑 친구라는 사실을 페이스북을 통해 알게 되어서 '정말 세상이 넓고도 좁구나'를 실감할 수 있었다.
뤼노는 레온에서 돌아간 이후 곧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
왜 헤어졌는지 정확한 이유는 설명해주지 않았지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불안한 현재와 불확실한 미래, 경제적인 문제 등..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뤼노는 이별의 아픔을 안고 몸이 불편한 아이들을 위한 시설에서 봉사로 1년여를 보냈다는데, 그러면서 오히려 자기가 많은 위로를 얻었다며 봉사를 더할 생각이라는 소식을 아주 가끔 주고받는 메일을 통해 알려왔다.
과연 복지 선진국이네.. 봉사를 하면서도 생활이 유지된다는 게 부러웠다.
뤼노는 다시 한번 까미노를 걸을 계획이라고 했다.
한번 완주해보는 것도 중요할 것 같다면서 이번에는 싼티아고까지 걷겠다고 했는데 그 후로는 연락이 닿질 않아 완주를 했는지는 모르겠다.
언젠가 한국에 오게 되면 한국의 까미노 '올레길'을 함께 걷자고 했었는데.. 정말로 온다고 해도 걱정이다.
올레길을 같이 걸으려면 직장을 그만둬야 될지도 모르니.
그래도 뤼노라면 어떻게 해서라도 손님 대접을 해줘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다.
'You are my guest!'
처음에는 페이스북이 재미있어 뻔질나게 드나들며 안 되는 영어에 번역기까지 돌려가면서 소식을 주고받다가 그나마 귀찮아서 '그냥 너희가 번역기를 돌려라' 하고 한글로 안부를 묻곤 했었는데.. 이제는 가끔 들어가 사람들 근황이나 보다가 '좋아요'나 눌러주고 있다.
지금은 그나마 '좋아요'도 누르지 않고 그냥 휘- 둘러보기나 한다.
그렇게 또 잊혀가고 있다.
까미노에서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특이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사람은 뻬르돈 언덕의 노점상 아저씨다.
아주 잠시 스쳐 지나간 그였지만 '까미노'하면 떠오르는 것은 그 아저씨다.
돌아서서 언덕 아래를 바라보는, 쓸쓸한 듯 덤덤해 보이던 아저씨의 모습이 아련하다.
사진을 정리해 페이스북에 올리다 보니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했고,
돌아온 지 1년이 지난 시점에서 여행기를 쓰게 되었다.
기억을 떠올리며 여행기를 쓰다 보니 당시엔 모르고 지나쳤던 나의 여행에 많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었다.
뤼노와의 만남과 베아에 대한 오해, 베지터리안 프란시스코가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육식을 했던 것이나, 요리를 배웠다는 사무엘의 요리가 대부분 엉망이었다거나.. 등등
첫 해외여행이라 사소한 일 하나도 무심하게 지나치지 않았기에 소중한 추억으로 남겨졌나 보다.
'일상'이라는 단어로 뭉뜽그려버린 지금의 하루하루도 애착을 갖고 들여다보면 까미노에서처럼 많은 이야기들이 들어있을 텐데 그게 쉽지가 않다.
다음에 해외여행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발바닥 통증 때문인지, 베드벅 때문인지, 아니면 더 외롭고 힘들까 봐 그런 건지는 모르겠는데
글쎄.. 그곳이 까미노는 아닐 것 같다.
이번 여행 이상의 까미노는 욕심이라는 생각도 들고..
지금 이 정도의 추억으로도 내게는 과분하다.
'통일이 되면 우리의 땅끝에서 유럽의 땅끝까지 한번 가볼까..' 했던 생각도 임파써블한 것 같다.
체력적인 문제도 걸리고 시간도, 비용도 많이 들것이다.
(크루즈 타고 오성급 호텔에서 룸서비를 받는 럭셔리한 투어리스트도 한번 되어보고 싶은데 그것도 임파써블)
행선지는 모르겠고.. 어디가 됐든지 간에 누군가와 함께하는 여행을 해보고 싶다.
함께 웃고 울고, 다투고 화해하고, 서로 간에 실망했다가 이해하고, 의지하고 정들어가는 그런 여행.
그 여행의 끝에서 함께 인도양에서의 일출이라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소망이 생겼다.
요즘 조금씩 나의 바람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구체화되지는 않았는데 밑그림은 '행복해지기'라는 것이다.
가진 게 적어도, 가진 것 안에서 행복한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물론 가진 게 많고 그걸 잘 쓸 줄 아는 사람으로 행복해도 좋겠는데 그것도 임파써블할것 같고..
내 주위에 주어진 것에서도 충분히 행복을 빼먹고도 남음이 있을 것 같다.
'해피엔딩'을 위해 지금의 행복을 저당 잡히고 싶지는 않다.
소소한 곳에서 행복을 찾아가다 보면, 벨렘에서의 일몰처럼 어느새 행복을 누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어떻게 보면 큰 꿈이나 비전 없는 나 자신을 합리화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반대로 가장 큰 꿈, 또는 무한한 것에 대한 큰 욕심일 수도 있겠다.
몇 년 전 스페인에서 안타까운 열차사고가 있었다.
많은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한 사고였는데 뉴스에서 '싼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라는 지명이 나올 때 참 낯설게 들렸었다.
'정말 내가 까미노를 걸었던가..' 싶은 게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