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보아 - 마드리드
리스보아 발 마드리드행 야간 점보 747 국제여객버스는 생각보다 불편했다.
덩치만 컸지.. 승무원도 없었다.
비즈니스석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이코노미석보다도 불편했다.
3열로 된 우등버스와 같은 좌석 배열의 1열에 앉게 돼서 나름 편하게 잘 수 있겠다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뒷좌석의 승객 때문에 등받이를 뒤로 넘기는 것도 신경이 쓰였다.
하루 종일 리스보아 시내를 빨빨거리고 다녔던 터라 피곤한 상태였지만 숙면을 취할 수가 없었다.
아무데서나 잠을 잘 자는 편인데도 불구하고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몸을 뒤척였다.
역시 장거리 버스는 쉽지 않았다.
얼마나 달렸는지.. 선잠이 들었었는데 버스가 정차를 했다.
사람들을 따라 포르투갈인지 스페인인지 모를 장소에서 비몽사몽 한 상태로 내렸다.
휴게소다.
휴게소는 조금 큰 주유소 수준의 규모.
한밤중의 휴게소는 영업을 했던 것 같았고 다른 승객들은 음식을 사 먹기도 했지만
나는 볼일만 보고 바로 탑승, 잠을 청했다.
한시라도 빨리 마드리드에 도착하기만을 바랬다.
힘들게 도착한 마드리드의 터미널은 규모가 꽤 컸다.
새벽인데도 사람들이 많았다.
리스보아의 터미널이 서울의 남부버스타미널수준이라면 마드리드는 강남터미널 정도? 아니 그 이상의 규모였다.
아직 전철이 운행되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으므로 벤치에 앉아 정신을 추슬러보았다.
정신을 차리고 간 곳은 터미널 내에 있는 커다란 바르.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배가 많이 고팠다. 까페 꼰 레체와 빵으로 아침을 먹었다.
얼마 만에 먹어보는 스페인산 까페 꼰 레체인가.
터미널 바르에서 먹는 까페 꼰 레체가 피로를 덜어주었다.
이제 마드리드의 베이스캠프를 찾아 '쏠 광장'으로 가야 했다.
마드리드의 전철은 리스보아보다 훨씬 복잡했다. 사람들도 많았고.
방향을 잃어 반대방향 지하철을 탔다가 중간에 내려서 다시 갈아타야만 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쏠 광장은 많은 사람들로 복잡했지만 이름처럼 햇빛이 가득한 광장이 아니었다.
날씨는 맑았고 크리스마스를 코앞에 두고 있었지만 광장의 분위기는 우중충했다.
광장 가득 '크리스마스 스페셜 로또' 좌판들이 펼쳐져 있었다.
사무엘도 싼티아고에서 로또를 구입했다고 했었는데.. 나도 한 장 사봐?
한국에서도 맞지 않던 로또, 외국이라고 다르겠어. 로또의 달콤한 유혹을 뿌리쳤다.
쏠 광장, 아니 로또 광장 길 건너로는 골목마다 호스텔들이 즐비했다.
수많은 호스텔 중에서 이퀴티 포인트 호스텔을 찾는 게 쉽지 않았다.
한참을 헤맨뒤에 찾은 호스텔은 평범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카운터의 아가씨가 대뜸 '츂..' 어쩌고 저쩌고 했다.
척 봐도 가난하게 생겼나 보다.
가난도 상대적이지만... 아닌 게 아니라 가난했다.
당연히 예쓰!
거의 알베르게 수준의 요금이었다.
대충 시설에 대해 설명을 해주고는 방 번호를 일러준다.
올라가 보니 시트도 제대로 정리가 안된 침대 4개가 놓인 싸구려 방.
아무렴 어때. 하루만 버티면 한국으로 돌아갈 건데.
짐을 풀고 귀중품만 챙겨 밖으로 나왔다.
마드리드에서 내게 주어진 시간은 단 하루.
하루 동안 무얼 할까?
터미널부터 쏠 광장까지, 잠깐 본 마드리드 시내의 풍경은 리스보아나 포르토의 그것 이상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시내 구경은 통과.
S가 추천해준 '똘레도'에 가보기로 했다.
일단 가볼 수 있는 데는 한 군데라도 더 둘러봐야 돼.
여독을 풀며 그동안의 여행을 정리하는 시간도 갖고 그러면 좋으련만 그건 내게 사치였다.
언제 다시 올지도 모르는 유럽인데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는 최대한 구경을 해야 했다.
똘레도에 가는 방법은 두 가지.
하나는 기차를 이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버스를 이용하는 것.
기차는 요금도 비싸고 무엇보다 차편도 많지 않아서 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관광용 일일권을 끊을걸 그랬다.
(관광용 일일권은 대중교통뿐만이 아니라 똘레도행 버스도 이용할 수 있다)
마드리드에서 1시간이면 똘레도에 갈 수 있다.
어떤 곳인가 했는데... 옛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는 마을이었다.
도시만 돌아다니다가 이곳 똘레도에 왔다면 아주 색다른 풍경이었을지 몰라도 까미노를 통해 많이 겪어본 이후라 그런지 그냥 평범해 보였다.
잿빛의 로또 광장을 중심으로 한 시내를 피해서 택한 똘레도인데, 이곳도 별 신통치 않았다.
곧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아쉬움과 기대감이 내 머릿속을 흩어 놓고 있는 것 같았다.
'기사의 도시'였는지 갑옷을 비롯해서 칼, 창등의 무기를 작게 만들어 기념품으로 많이 팔고 있었다.
갑옷이 어설프지 않고 실전에 사용해도 될 것처럼 견고하고 단단해 보였다.
이골목 저 골목을 걷다 보니 날은 어두워졌고 크리스마스 장식에 하나둘 불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그나마 마을에 생기가 돌았다.
따뜻한 불빛이 은은한 똘레도의 골목을 걷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잠시 까미노로 돌아간 기분을 맛보았다.
까미노의 여운이 아직 나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쳇, 투어리스트들...'
골목골목 자리 잡은 기념품 가게를 기웃거려보았다.
크리스마스는 한국에서 맞을 것이다.
내게는 그저 여러 공 휴일 중의 하나일 뿐인 크리스마스, 백수가 되어 맞는 크리스마스일 테지만 그래도 공휴일의 백수는 조금이라도 더 떳떳할 수 있다.
나만 쉬는 게 아니니까.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나름 알차게 보내려고 온 똘레도.
그러나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그런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대충 시간을 때운 기분이었다.
똘레도에서 돌아와 숙소로 향하는 지하철에서 한번 소매치기를 '체험'했다.
지하철을 타면, 나는 주로 열리는 쪽 반대편 문가에 기대선다.
가볍게 벨트 쌕만 매고 있었는데 웬 여자 두 명이 다가오더니 나의 앞뒤로 자리를 잡았다.
사람이 많지 않았기에 내 주위로 모이는 게 좀 이상하다고 여겨졌는데, 이어서 코트를 걸친 사내가 다가오더니 나의 옆까지 막아섰다.
완전히 포위되어 버렸다.
그렇다고 무섭다거나 위압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이윽고 그녀들이 말을 걸어오며 수작을 걸기 시작했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내게 말을 거는 와중에 사내가 은근슬쩍 걸쳐 입은 코트자락으로 내 벨트 쌕을 덮었다.
그러더니 손을 꼼지락거렸다.
'뭐지.. 이 어설픈 시추에이션은..?'
하는 짓들이 어찌나 어설프고 어리버리한 지..
내가 벨트 쌕을 손으로 고쳐 잡으니 사내가 당황해하며 손을 빼더니 내게 '내릴 거냐?'라고 묻는 제스처를 해 보였다.
내가 기대고 있는 쪽 문은 열리지도 않을 것인데 왜 묻는 거야..
"노!"
라고 대답하며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더니 다음 역에서 세 사람은 허둥지둥 내렸다.
S의 충고가 아니었더라도 이런 어리바리 3인조에게는 당하지 않았겠다.
지금도 그 3인조를 떠올리면 피식피식 웃음이 나온다.
마드리드에 오면 연락하라고 했던 헤수스에게는 전화를 걸지 않았다.
헤수스와 단둘이 만나는 것도 편치 않을 것 같았고 고작 하루 머물 마드리드였으므로 홀가분하게 마음 내키는 대로 돌아볼 생각에 전화를 하지 않았던 것.
대신 이메일을 보냈었는데 잘못 보내는 바람에 그나마 연락이 닿지 않았다.
차라리 잘 됐지.. 싶었다.
저녁은 마드리드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역시 케밥집으로 들어갔다.
마지막 케밥이라는 생각에 좀 더 비싼 '플라토'로 주문했는데 '빵 케밥'보다 못했다.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오니 엉망이었던 시트의 두 침대의 주인이 들어와 있었다.
스코틀랜드 사람 '라지'와 브라질 사람 '마테우스'.
라지는 좀 능글능글해 보였고 마테우스는 순박해 보였다.
라지와 마테우스 사이의 침대가 내 것이었는데 네그레이라에서의 페드로 같은 느낌의 라지를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