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보아
오늘은 포르투갈 리스보아를 떠나 스페인 마드리드로 가는 날이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갈 날도 채 사흘이 남지 않았다.
오늘 리스보아를 둘러보고 밤차를 타면 내일 21일 새벽 마드리드 도착, 하루 마드리드에 머물고 나면 그다음 날인 22일에는 모스크바행 비행기를 타야 한다.
일찍 마드리드로 갈 수도 있었지만 스페인에서 거의 40여 일을 보냈던 터라 남은 시간을 포르투갈에서 더 보내고 싶어 리스보아에서 하루 더 머물기로 했던 것.
미안하지만 내게 마드리드는 '경유지'정도의 느낌이었다.
어제는 몰랐는데 호스텔에 중국인들이 몇 명 투숙해 있다.
오늘도 아주머니 두 분이서 아침을 준비하셨다. 메뉴는 전과 동.
아침을 잔뜩 먹고 바로 체크아웃을 했다.
키를 반납하니 맡겨두었던 보증금 5유로를 내준다. 왠지 공돈 생긴 기분.
배낭을 맡겨놓았다가 나중에 찾을까 고민했는데..
그냥 돌아다니다가 터미널로 직행할 생각에 배낭을 싸들고 별 다섯 개짜리 특급 호스텔'리빙 라운지'를 나왔다.
호스텔에서 나와 먼저 트램을 타보기로 했다.
일일 권을 구입, 놀이동산의 자유이용권 같다.
오늘 하루 동안 리스보아를 맘껏 둘러볼 수 있겠다.
일단은 종점까지 트램을 타고 가면서 리스보아를 둘러보았다.
대로를 달리기도 하고 골목 같은 왕복 일 차선 정도의 도로를 달리기도 했다.
거리는 평일 오전인지라 출근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도로 위를 자동차들과 한데 섞여 달리는 게 복잡할 것 같았는데 의외로 막힘없이 잘 나간다.
번화가를 벗어나자 트램도 한산해졌다.
어제 '까보 다 로까'행 버스기사도 멋졌었는데.. 코트를 입은 트램 기사가 멋져 보였다.
종점에서 내리니 공동묘지 같기도 하고 정원 같기도 한 공원이 있다.
한산했다.
한 바퀴 '휘-'둘러보고 반대편 종점으로 갈 트램을 기다렸다가 다시 트램에 올랐다.
다른 번호의 트램이 뒤따라왔는데 트램 기사가 여자다.
내가 자꾸 카메라를 들이대니 괜히 딴 곳을 바라본다.
바닥의 레일을 따라가는 트램이다 보니 앞차와의 거리와 끼어드는 사람과 차량만 조심하면 되겠다.
핸들 조작은 거의 필요가 없어 보였다.
반대편 종점은 '알파마'라는 동네.
비탈진 오르막을 트램은 거침없이 쭉쭉 밀고 올라갔다.
무슨 유명한 성당과 성이 있는 듯했는데 나는 그냥 골목길을 돌아다녔다.
전망대에서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쉬면서 평일 오전의 리스보아를 누려보았다.
배낭을 맡기고 나올걸..
알파마 동네를 발바닥이 아플 정도로 돌아다녔더니 배가 고팠다.
뭘 먹을까.. 크게 고민하지 않고 쉽게 결정했다. 바로 케밥.
싼티아고를 떠나면서 먹었던 게 마지막이었으니 열흘 이상 케밥을 굶었다.
그동안 금단현상을 일으키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
대도시이니 분명 케밥집이 있을 거란 확신을 가지고 뒤지기 시작하니 곧 나타났다.
아랍계라고 해야 하나.. 주인 청년이 반기며 좁은 가게의 안쪽 자리를 내어주었다.
대부분이 그냥 서서 먹거나 포장을 해갔는데 나는 좀 쉴 겸 해서 의자를 차지하고 앉았다.
치킨케밥.
전기면도기 같은 기계로 '징~징~' 밀어버리자 대팻밥 같은 고기가 쌓였고, 따뜻한 빵 사이에 넣은 뒤에 감자튀김, 캔콜라와 함께 나왔다.
역시 내 입맛엔 케밥이 딱이다.
한국에 돌아가면 이 맛 그리워서 어쩌냐..
케밥을 맛있게 먹고 나와 조금 걸어 광장을 지나서 걷다 보니 어느새 다시 바이사사이두 중심부.
점심시간을 즐기는 사람들로 거리가 붐볐다.
바이사사이두중심부엔 에펠과 관련 있는 엘리베이터가 있다.
어차피 일일 자유이용권도 끊었겠다.. 마다할 이유가 없지.
역시 철제 구조물로 조금 생뚱맞게 건물들 무리 사이에 우뚝 서 있었다.
여자 승무원이 있고.. 영화에서나 보던 미닫이 철창문을 닫고 철구조물의 꼭대기층까지 올라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다시 나선형 계단을 오르면 옥상전망대.
옥상에서 내려다보는 리스보아 시내의 메인 거리가 인상적이다.
빽빽한 건물 사이를 뚫고 강까지 쭉 뻗어있어 마치 협곡 같다.
이색적인 풍광에 연신 사진을 찍어대다 보니.. 으악! 어느새 사진기의 메모리가 꽉 차버렸다.
며칠 전부터 그게 신경이 쓰여 사진 찍기가 조심스러웠는데 이렇게 빨리 가득 차버리다니.
'어쩌지.. 선별해서 지워야 하나..'
찍은 사진 중 별 볼 일 없는 사진을 지워보는데 시간이 너무 걸렸다.
한 장 한 장이 모두 소중한 추억 같아서 지워야 할 사진을 골라내기도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떠오른 아이디어, 바로 휴대폰에 들어있는 외장 메모리카드다.
빼서 카메라에 끼워보니 다행히 맞는다.
작지만 용량이 16기가나 되니 이제 메모리 걱정 없이 마구 셔터를 난사해도 되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다.
어떻게 온 유럽여행인데.. 휴대폰 메모리카드가 없었다면 정말 많이 아쉬울 뻔했다.
올라갈 때는 엘리베이터를 탔지만 나올 때는 맨 위층에서 언덕 위로 연결된 다리를 통해 걸어 나오게 되어있다.
잠깐이지만 아기자기하고 소박한 여유를 실컷 누릴 수 있는 놀이기구를 타고 난 기분.
올라갈 땐 조금 덜컹거리기도 해서 번지점프나 롤러코스터와는 또 다른 스릴도 맛보았다.
트램도 그렇고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잠시나마 느끼게 해주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벨렘을 둘러볼 시간.
벨렘엔 그 유명한 에그타르트와 수도원이 있다고 들었다.
수도원보다는 순전히 에그타르트 때문에 벨렘을 마지막 볼거리로 남겨놓았었다.
가자 벨렘으로, 에그타르트 먹으러.
벨렘으로 가는 트램은 신형이다.
오전에 탔던 트램은 골동품 같았고 벨렘행 트램은 현대적이다.
하늘에 트램용 전선이 거미줄처럼 얽혀있다.
금강산도 식후경.. 이 아니라, 수도원 구경도 에그타르트부터 먹고 나서..
바로 '빠나스 드 나타'라 부르는 에그타르트.
트램에서 내려 조금만 걸어가면 어렵지 않게 에그타르트 집을 찾을 수 있다.
굳이 '원조' 라느니 'VJ특공대 방영 맛집'이니 하는 간판도 없다.
가게가 크고 무엇보다도 사람들로 북적거리며 주변에 다른 유사 에그타르트 집도 없었다.
뭐 하나 히트 치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원조 맛집'을 이곳에서는 볼 수가 없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달콤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고, 주문대에 사람들이 줄을 서있었지만 줄이 여러 개라 오래 걸리지 않았다.
주문대 뒤편으로는 계속해서 갓 구워낸 에그타르트가 쌓였고 또 금세 팔려나갔다.
알에서 갓 부화한 병아리들이 날개를 펴고 파닥파닥 뛰어오르듯..이라면 좀 과장이겠지만.
하여간 주문과 동시에 일사천리로 계산과 포장이 끝난다.
'빠나스 드 나타' 혹은 '에그타르트'라는 말도 필요 없다.
그냥 손가락으로 개수만 펼쳐 보이면 주문 끝.
다섯 개를 주문하니 기다란 종이 상자에 따끈한 에그타르트를 담아주었다.
모양새가 우리나라의 계란빵과는 전혀 다르다.
작은 사발 같은 종이컵에 담긴 윤기 나는 노란색 에그타르트가 먹음직스러웠다.
가게를 나와 한 개 꺼내 맛을 보았다.
가장자리는 바삭하고 가운데는 부들부들.
달달하고 부드러운 게 괜찮기는 한데 생강의 매운맛 같은 게 뒷맛으로 남는다.
H는 한 번에 다섯 개를 먹을 정도로 맛있다고 했었지만 내게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두 개를 먹고 났더니 질리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더니, 벨렘의 에그타르트를 잔뜩 기대했었는데 실망이다.
그래도 커피와는 잘 어울리겠다.
입안에 맴도는 달콤한 에그타르트 맛을 물로 가져가며 가게 건너편의 수도원으로 향했다.
수도원은 카메라에 한 번에 담기 힘들 정도로 거대했다.
그리고 그 거대한 건물의 입구가 조각으로 온통 빼곡했다.
하얀 돌을 깎아 만든 조각은 마치 뼈에 조각을 한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조금은 징그러웠다.
수도원은 무료로 개방되고 있었다.
들어가니 넓은 회랑 같은 공간을 거대한 기둥들이 떠받치고 있다.
천장에도 거미줄 같은 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조각들을 보니 돌을 거의 떡 주무르듯 하다시피 다루었다.
하도 정교해서 이게 과연 하나의 돌덩어리를 깎고 다듬어서 만든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
넓어서 아예 배낭을 눈에 잘 띄는 곳에 내려놓고 둘러보았다.
스테인드글라스 또한 화려했다.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데 별도로 입장료를 받는다.
1층으로 충분한 것 같아 2층은 통과.
수도원의 권세가 대단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압도당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다시 배낭을 메고 수도원을 나왔다.
수도원을 나와 거대한 조형물이 우뚝 서있는 강가로 걸었다.
수도원과 에그타르트가 전부인 줄 알았던 벨렘인데 의외로 볼거리가 많다.
조형물은 정면에서 바라보면 십자가 형상인데 측면에서 보면 바다 같은 강으로 나아가는 배의 형상.
가까이 가보니 전망대다. 올라가는데 5유로.
잠시 고민하다가 올라가 보기로 결정.
십자가 기둥 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올라가는 동안은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에펠의 엘리베이터처럼 꼭대기층까지 올라가면 다시 계단을 이용해 옥상으로 올라가야 한다.
넓은 강을 가로진 긴 다리 건너 강의 남쪽, 강남도 보이고..
시골에서 갓 상경한 촌놈이 남산타워에 오른 기분이 이럴까.
아래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생각보다 높다.
전망대 위에서 바라본 수도원
내려다보니 전망대 앞 바닥에는 세계지도가 포르투갈을 중심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고 보니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이 생각보다 가깝다.
항상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한 지도만 봐왔기 때문에 몰랐는데.. 그동안 갖고 있던 선입견이 깨진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지구본 하나 사야겠다.
가까이에 바닷가 성도 보였다.
저기도 가볼까..
5유로어치 본전을 다 뽑을 만큼 충분히 전망을 즐기고 내려왔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세계지도에서 우리나라를 찾아보았는데 독도는커녕 울릉도도 없다.
그나마 제주도는 있네.
전망대에서 봐 두었던 바닷가 성을 향해 걸었다.
바로 바닷가에 인접해 있는 성이 멋스럽지만 성의 내력을 알아보니 조금 섬찟하기도.
죄수들을 가둬두고 조수간만의 차를 이용해 물고문을 했단다.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포르투갈을 떠날 시간이 다가왔다.
살다 보면 소원하는 많은 바람들이 있고 그걸 이루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고 노력한다.
하지만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기에 몇 번의 좌절 끝에 결국 포기하게 되고 그래서 잊고 살아가게 되는데,
어느새 그 바람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어 깜짝 놀라기도 한다.
바로 '대서양의 일몰'이 내게는 또 하나의 그런 경험이었다.
무시아에서 그리고 피스테라, 로까곶에서 놓쳐버렸던 그 일몰.
어느덧 뉘엿뉘엿 기울더니..
태양이 서서히 바다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도 염원하며 보기를 소원하던 '대서양 일몰'.
잡으려 잡으려 해도 빠져나가 인연이 없을 줄로 알았던 일몰은, 전혀 기대하지 않은 장소에서 포르투갈을 떠나는 날 선물처럼 주어졌다.
에그타르트처럼 노란 태양이 서서히 대서양으로 가라앉는 일몰은 뜻밖의 선물이었다.
미처 몰랐었는데 한참 뒤에야 '대서양에서의'일몰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무시아에서 보았더라면, 피스 테라에서 보았다면, 그리고 로까곶에서 보았다면 감흥이 어땠을지 잘 모르겠지만 이 날의 일몰은 내게 더 특별하게 남아있다.
대서양 너머로 사라진 태양.
이곳에서 사라진 태양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떠오를 것이고 이어서 내가 떠나온 한반도를 비출 것이다.
꼭 일몰을 보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은 아니 지었만, 이곳 일몰이 금테를 두르고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날의 일몰은 내게 벨렘의 에그타르트였고 정말 질리지 않을 달콤함이었다.
다섯 개가 아니라 열개라도 앉은자리에서 먹어치울 만큼 가슴속까지 달콤한..
벨렘의 에그타르트는 감동이었다.
일몰의 여운을 안고 발길을 돌렸다.
포르투에서도 그러더니, 리스보아에서도 다리 건너 강남은 결국 둘러보지 못했다.
나는 역시 강북스타일인가.
트램을 타고 바이사사이두 초입에서 내려 강변북로를 걷다가 작은 카페에 들어가 저녁을 먹고 바이사 사이두역에서 전철을 타고 터미널로 향했다.
이제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어 스페인으로 갈 것이다.
'밤의 터미널' 하면 삭막한 풍경을 떠올리기 쉽지만 리스보아의 터미널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도 짐을 몽땅 털렸던 S의 충고대로 경계는 늦추지 않았다.
나를 태우고 국경을 넘을 버스가 들어왔다.
덩치가 커다란 버스가 '국제'버스답다.
비행기를 탈 때처럼 배낭에 꼬리표를 달아 짐칸에 넣고 버스에 올랐다.
내부는 우리의 우등고속버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버스는 천천히 터미널을 빠져나와 어두운 리스보아를 달리기 시작했다.
포르투갈,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