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바람

리스보아 - 까보 다 로까

by 외투



'김정일 사망'이라는 기사로 인터넷이 시끌벅쩍했다.

(정확한 사망일은 이틀 전이었는데 북한에서 이날 발표를 한 것)

처음엔 장난으로 여겼는데 사실이었다.

잠이 확 깬다.

혹시라도 북한의 급변 상황이 전쟁으로 이어지기라도 하면 어쩌지?라는 기우도 들었다.

그러면 한국에 돌아갈 수 있을까..

러시아 걸 타냐가 김정일을 '크레이지 가이'라고 했을 때 괜히 같은 민족이 놀림당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는 않았는데..

김정일은 어쩌면 시대가 낳은 불행한 사람 중 하나였을지도 모르겠다.

나라도 그러한 환경에서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랐으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

게다가 무소불위의 권력까지 갖고 있다는 상상을 하면.. 정말 끔찍하다.

그렇게 머나먼 타국 땅에서 김정일 사망 소식과 함께 생일 아침(한국시각으로 따져도 아직 생일)을 맞았다.

내 생일날을 잊는 건 드라마 속 이야기일 뿐이다.


아침으로는 크레페와 빵.

씻고 주방으로 가니 도우미 아주머니 두 분이서 부지런히 크레페를 부쳐내고 있다.

빵과 쨈 등의 일반적인 호스텔의 아침식사였지만 좀 더 풍성하고 알차다고 해야 하나,

주방 유니폼을 갖춰 입고 요리를 하는 두 분 아주머니의 비주얼 때문인지

크레페에 꿀과 초코잼 누텔라를 듬뿍 발라 돌돌만 다음 커피와 함께 먹으니 아주 그만이다.

다 먹고 일어서려는데 브라질 아가씨가 몇 개를 포장해간다.

오케이. 나도 돌아다니며 먹을 량으로 몇 개를 싸서 누룽지와 함께 벨트쌕에 넣었다.


호스텔을 나와 근처의 기차역으로 향했다.

어제 학습해두었던 일일 교통권을 끊고 기차에 올랐다.

기차는 오래지 않아 신트라 역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려 다시 셔틀버스 비슷한 버스를 타면 페나성에 다다른다.

매표소 앞에 관광객들이 조금 있었는데 한국사람도 서넛 보였다.

여기서도 선택을 해야 한다.

외부만 둘러보는 티켓과 성의 내부까지 볼 수 있는 것, 그리고 관람차를 이용할 수 있는 것까지 가지가지다.

성의 내부까지 보기로 하고 표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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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랜듯한 색조의 성은 , 다가가면 미로 같은 구조의 공간과 소품 때문에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

내부는 방마다 용도에 맞게, 조금은 사치스럽게 장식이 되어 있었다.

물론 곳곳에 경비원들이 지키고 서서 '요놈이 사진을 찍나..'하는 눈초리로 경계를 하고 있어서 사진 찍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내부를 요리조리 돌고 나와 성마루에서 바라보니 대서양이 보였다.

그리고 한국사람.

한국인으로 보이는 청년이 혼자서 배낭도 없이 조금 쓸쓸해 보이길래 말을 걸어보았다.

"한국분이세요?"


S는 취업을 앞두고 배낭여행을 왔단다.

표정이 밝지만은 않다 했더니 소지품을 모두 도둑맞았단다.

버스터미널에 앉아있는데 한 사람이 다가오더니 갑자기 트렁크를 열어버리더라는 것.

그래서 급하게 트렁크를 수습하는데 그만 중요한 물건이 들어있는 작은 배낭을 다른 사람이 들고 튀어버렸단다.

졸지에 빈털터리가 되어 영사관에 도움을 요청하고 한국으로부터의 송금을 기다리는 중이라며 내게도 주의하란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에 마음이 짠했다.

"포르투갈 사람들 참 좋은데.. 경제가 어렵다 보니 그런가 봐요.."


내가 마드리드에 갈 것이라고 했더니, 그러면 '똘레도'에 들려보란다.

마드리드는 소매치기가 더 극성이니 가방은 반드시 대각으로 메고 다니라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카메라도 잃어버린 S와는 사진 한 장을 찍어주고 이메일 주소를 받은 뒤 헤어졌다.

그에게 비춰보면 나는 정말 운이 좋았다.

1,000유로가 넘는 돈을 한 푼도 잃어버리지 않았고 소지품도 모두 무사했으니..


IMG_1991.jpg 해시계가 조가비문양 같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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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나성 투어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 정원길을 따라 걸었다.

잠시 까미노 숲길이 떠올랐는데.. 높은 바위 위에 동상이 생뚱맞게 서 있는 게 보였다.

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무슨 동상을 세워둔 것일까, 궁금해서 다가가니 'GIGANTES'어쩌구라고 푯말에 적혀있다.

'거인상'이라는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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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목표물을 발견했으니 다가가 봐야지.

관광객도 관리인도 없는 페나성정원 구석 한편에서, 마치 숨겨진 유적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설렜다.

거의 암벽등반 수준으로 바위를 타서 기어이 거인상에까지 올라갔다.

올라가 보니 과연 '거인상'이라고 할 만큼 크기가 컸다.

그렇다고 아주 거대한 것은 아니고 내 키의 두배 정도?

현실적인 크기의 거인상이다.

이런 곳에 왜 거인상을 세워놓았나 하고 보니.... 아! 거인이 창과 방패를 들고 멀리 페나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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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이 되어 바라본 페나성

거인상은 바로 '페나성 지킴이'.

'옛날 옛적 페나성에 아름다운 공주가 살고 있었는데..'로 시작하는 전설이 있다면 그 전설 속 순애보의 주인공쯤 되겠다.

잠시 거인이 되어 페나성을 바라보았다. 간식도 먹고..


올라갈 때도 어려웠지만 내려오는 길은 더 위험했다.

바위를 붙들고 조심조심 내려오는 길은 온통 '도대체 저 거인상을 어떻게 저곳에 세웠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거인에서 다시 보통사람으로 돌아와 이번에는 무어 성으로 향했다.

무어 성은 페나성 바로 옆에 있었는데 이름에서 풍기듯 투박하고 좀 더 고대의 느낌마저 묻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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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채는 없고.. 성곽을 따라 한 바퀴 둘러보게 되어있다.

산책코스로 괜찮겠다.

성곽 아래로는 신트라 마을과 숲 속에 자리 잡은 저택들이 내려다보였다.

가을 신트라 풍경을 보며 성곽 걷기가, 힘든 줄 모를 만큼 운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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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신트라를 만끽하며 천천히 걸어 무어 성을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이 예뻤다.

성들도 보기 좋았지만 산책길 같은 골목이 더 좋았다.

그런데 그만 너무 여유를 부린 탓에 '까보 다 로까'행 버스를 놓쳐버렸다.

이때가 오후 3시쯤 되었나? 다음 버스시간까지는 2시간 정도 더 기다려야 한다.

과연 유럽의 땅끝에서 대서양으로 떨어지는 일몰을 볼 수 있을까?

조금만 서두를걸..

이왕 이렇게 된 거 신트라 역 앞에 중국식당이 있길래 들어갔다.

닭고기가 들어간 볶음밥이 맛있다. 값도 적당하고. 그런데 단무지가 없다.

느끼한 뒷맛을 입에 달고 신트라 거리를 걷다가 '진자', 버찌 술이 생각이 났다.

신트라에서는 버찌 술을 초콜릿 잔에 담아 잔술로 판다고 들었기에 적당히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까페로 들어가 주문해보았다.

"진쟈..? 진져..? 즈인지아..?" 약간의 시행착오 끝에 주문 성공.

그런데 쵸코렛 잔이 아닌 소주잔에 나온다. 약간 실망.

냄새를 맡으니 향긋했다.

한 모금 맛을 보고.. 아 달착지근한 게 괜찮네. 원샷!

오루호만큼은 아니지만 도수가 꽤 되네. 볶음밥의 느끼함이 싹 가셨다.


조금 알딸딸해져 신트라를 배회하다가 버스시간이 가까워 정류장으로.

'까보 다 로까'행 버스에 오르니 한국말이 들렸다.

한국 배낭여행자들이었다.

버스가 출발하는데.. 창밖으로 낯익은 얼굴이 지나갔다.

바로 삐엘!

수염이 좀 더 자라 덥수룩했지만 온따나스가는 길에 만났던 캐나다인 삐엘이 틀림없었다.

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웃음 가득한 얼굴로 성큼성큼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잠시 스쳐 지나갔지만, 또 나를 보지는 못했지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포르투갈에서 아는 사람을 보았다는 게 색다른 기분을 느끼게 해줬다.

스페인에서 만나 같이 걷던 사람을 포르투갈에서 다시 보다니..


'버스야 달려라, 일몰을 놓치기 전에..'

그러나 내 조급함과는 상관없이 버스는 신트라를 돌고 돌아 느긋하게 '까보 다 로까'로 향했다.

일몰이 달아날까 마음을 졸이며 한참을 어둠이 밀려오는 창밖을 내다보는데..

버스기사 아저씨가 멋들어진 발음으로 '까보 다 ㄹㄹㄹ로까!'라고 외쳤다.

까보 다 로까, 로까곶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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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가 보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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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열심히 뛰었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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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유럽의 땅끝에서도 일몰은 나를 외면했다.

무시아에서 한번, 피스테라에서 또 한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로까곶에서 한번.

도합 세 번을 끈질기게 구애했지만 대서양의 일몰은 끝내 나를 외면했다.

됐어! 치사하게.. 지금은 세 번 이상 귀찮게 하면 법에도 걸린다지 아마.. 내 더러워서..

내가 뭐 그깟 일몰 보러 유럽에 온 것도 아니고.. 일몰이 다 똑같지 뭐.. 여기 일몰은 뭐 금테 둘렀나..

대서양의 일몰은 그렇게 내게 신포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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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황혼이 아름다웠다.

샛별도 반짝였다.

.

.

.

로까곶의 분위기는 정말 땅끝의 느낌을 물씬 풍겼다.

해남 땅끝의 느낌보다는 마라도의 절벽 끝에 선 느낌에 더 가깝다.

피스테라가 땅이 조금씩 바다로 잠겨 들어가는 느낌이었다면 로까곶은 갑자기 땅이 뚝하고 잘려나간 느낌을 갖게 만들었다.


해는 떨어져 어두워지는데 제법 찬 기온 속 유럽의 땅끝 한편에서 웨딩촬영이 한창이다.

중국사람 같았는데 신랑도 그렇고 특히 신부는 추위에 힘들어하는 기색이었지만 카메라 플래시가 터질 때마다 웃음을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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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보던 한국인중 누군가가 농담 삼아 그랬다.

"돈만 있어봐. 뭘 못해.."

내게도 돈만 좀 있다면.. 그래도 저건 못하겠다 싶었다.

어디 돈만 가지고 저게 가능할까.


IMG_2087.jpg 유럽의 땅끝임을 알리는 표지석



'돈만 있어봐..' 일행은 다른 호스텔에 묵고 있었는데 마드리드를 먼저 들렸었다고..

그래서 호스텔 정보를 얻었다.

'이퀴티포인트(EQUITYPOINT)'라는 프랜차이즈 호스텔인데 값도 저렴하고 괜찮다고 했다.


호스텔로 돌아오니 오늘은 주방에서 누군가 요리를 하고 있다.

출장요리사.

안내문에 적혀있던 그날이 오늘이다.

미리 예약을 하면 저녁에 요리사를 불러 식사를 하는 것이었는데 우유부단하고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머뭇거리다 말았는데 신청할 걸 그랬다.

하긴 같은 길을 걷지도 않은 생판 모르는 외국인들과 어울리기도 싫었다.

보기에도 훌륭한 코스요리가 단돈 8유로.

이것저것 다 먹어도 정말 8유로다.

참가 신청하고 맛난 음식이라도 실컷 먹을걸 그랬나..

출장요리 타임이 끝나기를 기다려 한켠에서 스파게티를 해 먹었다.

요리사가 후식으로 남은 파이 하나를 주었지만 먹지 않고 살짝 한쪽 구석으로 치웠다.

생일도 다 지나가는 마당에..

로까곶에서의 일몰도 놓친 데다 저녁까지 혼자서 외롭게 먹고 나니 풀이 약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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