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무래기들의 협력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모든 측정값은 관찰자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값이다.
관찰자에 따라 달라지는 측정값이라는 개념이 빈 틈 없는 과학의 얼굴에 인간미를 더해주는 요소 같이 친근해진다.
어디 내놓아도 길치 티가 나는 내가 상대성 이론의 측면에서 남들만큼의 길 찾기 능력은 되는 줄 알고 살아온 것도 설명해 주고 말이다.
물리학을 아는 분들이 보면
‘이 무슨 바이올린 활로 등 긁는 소리인가?’
싶을 것이다.
하지만 가끔 이렇게 현상을 내 수준으로 끌어내리면 이해가 쉬울 때도 있다.
그간 나의 ‘길 안내 능력’은 주변 길치들에게 꽤 매력적인 기능이었다.
필요할 때 손에 닿는 요긴함은 실제 능력 이상의 아우라를 풍기기 마련이니까.
물리학과 전혀 관계없는 길치끼리의 소소한 연대가 이렇게 느닷없이 상대성 이론으로 설명이 된다.
아인슈타인이 이런 데 쓰라고 이론을 세운 것이 아니겠지만, 불변의 진리는 장르를 넘어도 불변의 진리다.
다시 길치의 상대성 이론으로 돌아가서, 내 주변에는 성골(신라의 골품제도 중 가장 높은 신분) 길치가 있다.
그 친구 덕에, 평균보다 조금 아래인 나의 길 찾기 능력은, 상대적으로 꽤 탁월하게 보였다.
실제 나의 길 찾기 점수가 45점임에도 70점 정도는 되는 줄 알고 살아올 만큼!
그리고 이 정도 괴리를 모른 채 살아온 데에는 신비한 친구의 기여가 컸다.
태어나 20여 년을 살아온 동네에서도 길을 잃는 거짓말 같은 능력을 가진, '절대능력자'였다.
직접 데리고 다니지 않으면, 집과 학교를 오가는 길 외의 모든 곳에서 분실되는 귀여운 친구는, 우정의 동행 과정에서 나에게 의외의 재능을 강화시켰다.
컴퓨터 언어인 C언어의 존재도, 코딩의 개념도 모르는 나로 하여금 코딩을 하도록 한 것이다.
그때도 지금도 코딩의 원리를 배울 기회도, 의지도 없지만 시나브로 코딩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모르는 새에.
대신 나에게 함수그래프의 원리를 설명하는 것을 시작으로, 이미 명망 높은 수학포기자(이하, 수포자)였던 내가 수학의 손을 놓지 않도록 애써주었다.
그때의 고된 훈련의 선물일까? 그 친구는 현직 고등학교 수학선생님이다.
조무래기들끼리 돕고 살았다는 전제가, 어째 타산에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명망 높은 수포자를 입시 문턱까지 동행하는 수고를 감당할 만한 길치는 어느 수준이면 격이 맞을까?
낯선 길에서 먼저 도착한 지인에게 길을 물을 때 “ㅇㅇ은행 모퉁이 앞에 있어.”라고 당신의 위치를 설명할 수 있다면 애석하게도 당신은 길치계의 6두품이다.
“방금 흰 차가 지나갔어.”라는 대답을 출력해 주어야 성골의 자격이 있다.
방금 ‘나도 길을 엄청 못 찾는 편인데?’라는 생각을 갖고 계셨던 많은 분들은, 이 대목에서 스스로 성골이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성골께서 힌트를 ‘방금 옆으로 지나간 흰 차’만 던져주었으니 6두품은 메타인지를 동원한다.
물론 속으로 투덜거릴 자유는 누리면서
‘흰 차는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만 여섯 대야!’
6두품 : 편의점을 제외하고, 현재 시야에 어떤 간판이 보이는가?
성골 : <xx제과점>
6두품: 제과점 앞으로 가서 등을 지고 서시오.
성골 : <Y>
6두품: XX제과점에 등을 지고 섰는가?
성골 : <Y>
6두품: 오른손을 번쩍 들으시오. 오른손 들었는가?
성골 : <Y>
6두품: 오른손 방향으로 걷다가 블록이 끝나는 곳에 있는 간판을 읽으시오. XX제과를 오른팔 방향에 둔 채 걷고 있는 것이 맞는가?
성골 : <Y>
뼛속까지 문과인이 어려운 과정 끝에 얻게 되는 것은, 길만 좀 못 찾지 평소에는 아주 똑똑하고 유쾌한 친구와의 햄버거를 곁들인 한 때이다. 이 정도의 코딩은 충분히 감당할 만한 번거로움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도.
의외의 모험 끝에 만난 친구는 두 배로 반갑다.
그리고 나도 가벼운 길치로서 길 위의 모든 것이 낯설게 보이는 지점에 혼자 선 친구의 막막함을 이해하기 때문에 스트레스받지 않고 코딩을 매번 해 왔다.
한번 집에 들어가면 잘 나오지 않는 나와의 약속을 성사하기 위해 삼고초려를 마다하지 않는 친구에 대한 보상의 의미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환상의 짝꿍이다.
내가 조금 빈 구석이 있어야 다른 사람의 빈 구석도 애정으로 채워진다.
역지사지는 이렇게도 작용하는 인간관계의 꿀팁이 된다.
이렇게 같이 넘어져 본 동료를 보조하는 즐거움이 있는 것처럼, 매끄럽고 완벽해 보이는 사람의 실수는 인간적인 내적 친밀감을 높여 주기도 한. 그렇다고 내가 빈 틈 없어 보이고 싶은 순간에 저지르는 실수를 달갑게 느낄 수는 없다. 완벽한 육각형 인간을 지향하는 분위기는 거스를 수는 없기에.
지향점은 방향일 뿐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일 수 있다. 드러나는 단점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우리는 우리의 단점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서로에게 기대어 산다. 덜 실수하려 노력할 뿐이지 실수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
지금은 혼자 하는 모든 일의 전성기다. 뭐든 함께 하는 것을 강요받으며 살았던 전 세대를 거울삼은 세대의 반대급부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개인적 관계에서는 결핍의 상호보완 기능이 남아있다.
좋은 것은 남긴 셈이다.
하지만 과거에는 군집 속에서도 이러한 상호보완의 여력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젠 개인의 사회가 되다 보니 '우리' 안에 녹아 있던 이런 허용이 많이 사라진 점이 아쉽다.
그렇다고 예전의 연대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고, 돌아갈 수도 없다.
이미 혼자 설 줄 알게 된 개인이 집단으로 뭉개어져 들어가는 것은 시대흐름을 역행하는 것이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도 원치 않는다.
그럼에도 협력의 이점을 놓지 않고 개인의 능력으로 흡수하는 사람은 다른 육각형 지향자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퍼포먼스를 갖게 될 것이라고 본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나는 요즘도 집순이를 집 밖으로 빼주던 성골 길치와 함께 길에 선다.
화면으로 종로를 함께 걷는 것이지만......
서로의 빈 곳을 채우는 찌그러진 육각형끼리 사이좋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