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격적인 첫 밥벌이 단상
2024년 7월, 업무로 받은 첫 원고를 제출했다. 조금 거창하게 의미를 담아본다면 한문을 공부하여 직업인이 되어보자고 결심한 뒤 쉼 없이 달려온 지난 7년의 시간이 첫 결실을 맺는 순간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어디 돈 버는 일이 쉽기만 하던가. 여기에 반점을 찍어야 하나 고리점을 찍어야 하나 몇 시간 동안 원고를 잡고 씨름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아! 하기 싫어!” 푸념이 튀어나오자 남편이 한마디 한다. “그거 하고 싶어서 몇 년 동안 공부한 거 아니었어?” 맞네. 나 이거 하려고 공부했네.
근황을 묻는 지인들에게 여전히 공부 중이라는 소식을 전하면, 아직도 공부라니 지겹지도 않냐며 혀를 내두르지만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늘 이런 생각을 한다.
“공부만 하는건 오히려 쉽답니다. 배운 공부로 밥값하는게 더 어렵죠.”
괜히 하는 말이 아니라 뒤늦게 시작한 한문 공부는 늘 재밌었다. 영화 ‘패왕별희’와 만화 ‘초한지’에서나 보았던 항우와 유방에 대한 생생한 기록을 『통감절요』에서 직접 읽어보고, 세기의 명문이라는 소동파의 「적벽부(赤壁賦)」도 원문으로 감상하고, 이순재 배우님이 떠오르는 영조의 하루가 어땠는지 승정원일기에서 살펴보기도 했다. 졸업 후 업무로 받은 첫 원고에는 사육신(死六臣)으로 알려진 성삼문, 박팽년의 글부터 「조의제문(弔義帝文)」으로 부관참시를 당했던 김종직, 지폐에서 자주 뵙는 이황과 이이의 글까지 이름을 대면 알만한 유명한 분들의 글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글 보는 것’ 자체는 흥미롭고 즐거웠다.
그러나 지적 유희가 아닌 업무로 다가왔을 때의 문제는 바로 ‘평가’에 있다. 내가 제출한 원고는 당연히 평가의 대상이 되고, ‘통(通)’과 ‘불통(不通)’의 기로에서 향후 번역자로서의 길이 화창할지 먹구름이 가득할지가 결정된다. 익혀야할 지침은 많은데 처음에는 어떤 사례에 어떤 항목의 지침을 참고로 해야할지도 몰라 우왕좌왕. 필요한 지침을 찾았어도 행간을 파악해서 응용해야만 알 수 있는 다양한 실전 문제들이 수시로 튀어나왔다. 어제의 내가 찍은 반점은 오늘의 내가 보기엔 마땅치 않아 지웠다 넣었다를 반복하기도 했다.
원고 마감을 2주 정도 남겨놓고 남편의 해외 출장으로 며칠간 집이 비게 되었다. 지난 한 달을 두문불출하며 원고와 씨름하다 보니 사람이 그리워진터라 동기 동생들에게 S.O.S를 쳤다.
“우리 집 비는데 혹시 놀러와서 숙식하면서 같이 원고 볼 사람?”
전국 곳곳에서 고군분투하던 몇몇 동생들이 짐을 싸들고 ‘여름표점캠프’에 참가했다. 거실로 프린터도 옮겨다 놓고, 식탁을 업무 테이블 삼아 각자의 노트북과 원고를 펼쳐놓고 있자니 그럴듯한 사무실 분위기가 난다. 집중해서 각자 원고를 보다가 궁금한 것이 있으면 서로 묻기도 하고, 식사 준비하며 도란도란 얘기도 나누고, 시시껄렁한 소리에 왁자지껄 웃기도 하다보니 언제가 되든 사무실을 차려서 함께 일하는 것도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원고를 보며 3박4일을 보냈는데, 우리 동네 핫플이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음에도 저녁에 나가 술 한 잔을 못 하고 집에서 원고만 보다가 해산했다. 매일 자정을 넘겨 자면서도 말이다. 그만큼 다들 첫 원고의 압박이 심했던 것이겠지. 그래도 같이 있는 동안에 지침에 대해서 서로 의견이 달랐던 부분을 맞춰가기도 했고, 미심쩍었던 표점도 같이 상의하고, 주석은 제대로 달려있는지 서로 검토도 했다. 무엇보다 고독하게 원고를 해 오다가, 같은 고민을 하던 동기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 것만으로도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가 풀리는 듯했다. 요즈음 집에 곧잘 혼자 있는 나를 보며 혹시 나도 I였던 것일까 싶었는데 아무래도 E가 맞는 것 같다. (I는 절대 본인이 E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지 않는다지.)
원고 제출하는 날까지 첫 원고 제출자들의 호들갑은 계속되었다.
“메일 보냈어?”, “나 이제 보낸다.”, “떨려서 못 보내겠어.”, “으악! 보냈다!”
원고를 제출하고 며칠 뒤에는 꿈도 꿨다. 제출한 원고에 너무나 확실하게 틀린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지만 다시 고칠 수 없다는걸 알아서 괴로워하는 악몽이었다. 원고 제출 마감일에 무섭고 떨리고 걱정되서 메일의 전송 버튼을 누를 수가 없다는 동생들에게 “제출하는게 뭐 어려워. 다 했으면 그냥 내는거지.”라며 호기롭게 말한 것 치고는 소심한 행보가 아닐 수 없다. 얘들아, 사실은 나도 심장이 벌렁벌렁하고 떨렸어.
첫 원고를 제출한 뒤 평가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다음 원고를 받았다. 앞서 제출한 원고가 불통을 받으면 하던 원고와 이미 받은 원고료도 일부 반납하는 경우가 있다고 교육 때 들었던 것 같은데. 제발 원고료를 반납해야 하는 일만은 벌어지지 않기를.
이 글을 쓰고 두 달이 지난 뒤 드디어 기다리던 평가 결과가 나왔다.
제출할 때만큼이나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확인한 평가시스템 화면에 선명하게 찍힌 “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