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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옛글나눔 Jun 07. 2021

우리가 길을 떠나야 하는 이유

예전에도 지금도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계속되고 있다

COVID19 로 인해 꽉 막혔던 여행길이 백신 접종으로 심폐소생술을 받아 살아날 조짐이 보인다.  괌과 사이판을 비롯해서 푸켓까지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던 여행지들이 발빠르게 백신 접종자들에게 격리 면제를 제안하며 러브콜을 보내고 있으니, 발 빠른 사람들은 다가올 추석이나 크리스마스를 해외에서 보낼 계획을 세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행을 갈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나서 마치 태생적으로 여행을 가지 않고는 못 배기는 방랑의 달인이라도 되었던 것 마냥 아쉬운 마음을 토로하곤 했지만 사실은 코로나 사태와 별개로 시간과 돈을 들여 해외로 나가는 일이 이른바 '가성비'가 떨어지는 일은 아닌가 싶어 괜히 시들해지고 있던 참이었다. 이국적인 유럽의 도시, 에메랄드빛 바다와 반짝이는 백사장의 휴양지가 줄 수 있는 즐거움의 역치가 이미 높아져버린 것이 문제다. 비단 해외여행 뿐 아니라 국내 여행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데, 매주 되풀이 되는 '이번 주말은 뭐하지?' 라는 고민의 해결책이 되기에는 국내의 산과 바다도 이미 볼 만큼 보지 않았나 싶어 별달리 계획이란걸 세우고 싶은 열정이 솟아나질 않는다.


꼭 여행을 가야 한다고 누가 등을 떠미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여유 시간에 그저 집 주변만 맴돌고 있기에는 뭔가 손해보고 뒤쳐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불안하다. 안 가자니 불안하고 가자니 권태로워진 여행 불감증을 치료할 처방전을 혹시 찾을 수 있을까 싶어 여행의 의미를 다룬 책을 집어 들었다. 다른 이들은 과연 여행을 통해 무엇을 느끼기에 끊임없이 떠나고자 하는지를 들여다 본다면 나의 밋밋한 여행 의지가 조금은 다채로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이 안전하고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떠나고 싶어한다. 거기서 우리 몸은 세상을 다시 느끼기 시작하고, 경험들은 연결되고 통합되며, 우리의 정신은 한껏 고양된다. 그렇게 고양된 정신으로 다시 어지러운 일상으로 복귀한다. 아니, 일상을 여행할 힘을 얻게 된다, 라고도 말할 수 있다.

《여행의 이유》, 김영하


김영하 작가가 같은 책 중에 언급한 '독특한 화제들을 진부하지 않은 방식으로 말하는' 동료 작가들에 대한 찬사는 그 자신에게도 충분히 돌아가고도 남는다. 여행이라는 잘  짜여진 시작과 끝이 있는 인위적 경험을 통해 그저 어지럽기만 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일상을 견뎌낼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김영하 작가의 여행에 대한 고찰은 반복적인 일상을 치료하기 위해 이보다 더 좋은 처방은 없을 것만 같은 설득력이 있다. 


알랭 드 보통이 《여행의 기술》에서 워즈워스의 시를 인용하며 여행을 통해 겪는 아름다운 순간들이 '시간의 점(spots of time)'으로 내 마음에 남아 어느 때고 나를 고양시킬 것이라 말 한 것도 맥락이 비슷하다. 특히 광대한 자연에서 느끼는 숭고함은 살면서 마주하게 되는 여러 고난을 유연하게 대처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하니, 이쯤 되면 건강한 몸을 위해 삼시 세끼를 챙겨먹듯 건강한 정신을 위해 주기적으로 여행을 가야만 하겠구나 싶어 귀가 팔랑인다.


가장 훌륭한 태도로, 가장 예의를 갖추어 우리를 넘어서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은 아마 자연의 광대한 공간일 것이다. 그런 공간에서 시간을 보낸다면, 우리 삶을 힘겹게 만드는 사건들, 필연적으로 우리를 먼지로 돌려보낼 그 크고 헤아릴 수 없는 사건들을 좀 더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데 도움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이처럼 시름을 잊게도 하고, 문학적 영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자연의 위대함을 느끼게도 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분명해 보이기에 여행이라는 행위는 안전과 교통이 심히 염려스러웠던 과거에도 끊임없이 이루어졌다. 그 중에서 수려한 풍경을 찾아 낯선 곳으로 떠나는 조선시대의 여행은 유산기(遊山記), 산수유기(山水遊記) 등으로 분류되는 유람기록을 통해 엿볼 수 있는데, 이런 기록들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 다른 문인들이 유람 계획을 세우는 데 유용한 자료로 쓰이기도 했으니, 요즘 사람들이 블로그를 참고하여 여행 계획을 세우는 것과 비슷하다. 어딘가를 직접 다녀온 사람의 글과 그림을 통해 간접적으로 흥취를 즐기는 것을 옛 사람들은 '누워서 유람한다.'는 뜻의 '와유(臥遊)'라고 그럴 듯한 이름을 붙였다. 아마 지금 어딘가에서도 누군가는 옛날과 비록 매체는 다를지라도 그때처럼 와유를 즐기고 있을 것이다.


옛 유람기록을 살피다 보면 흥미로운 점이 있다. 이 당시 금강산과 같이 풍경 좋은 산사(山寺)에 거주하는 승려들은 히말라야 등반을 돕는 네팔의 셰르파 마냥 유람나온 사대부들의 수발을 들어야만 했다. 가마도 메야하고, 숙식도 제공해야 하고, 서신과 물품도 전달해야 했으며, 하다못해 정상에 있는 돌에 이름을 새겨달라는 부탁을 받기도 했다. 평생 한 번 가기가 어려운 금강산 비로봉(毗盧峯) 정상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고 싶었던 누군가의 부탁은 비록 지켜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제 이름을 비로봉(毗盧峯)의 정상에 있는 돌에 새기는 것은 동행했던 한 승려가 새겨 주기로 약속했는데, 지금 새겨져 있지 않다니, 이는 그 승려가 필시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일 것입니다.

鄙名書於毗盧頂上一石。約同行一僧刻之矣。今無之則其僧必不踐約也。

《명재유고(明齋遺稿)》 윤증(尹拯,1629~1714) , 권여유에게 답하다(答權汝柔)


물론 이러한 노동력을 그저 헛되이 제공한 것은 아니었다. 숭유억불(崇儒抑佛)의 조선사회에서 위축되어 있기는 하였으나, 불교는 성리학보다 훨씬 오래 전에 전래된 만큼 그 역사와 전통이 깊었고, 산사를 찾는 유생들은 승려들의 가이드 없이는 제대로 된 유람을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승려들은 여행의 편의를 제공하는 대신 유생들에게 불가(佛家)의 교리를 슬쩍 설파하기도 하고, 이름있는 유생들의 글을 청하여 불가의 이야기를 녹여내기도 하며, 절의 현판이나 비문을 받아놓고 후대 유생들이 선유의 발자취를 찾아 꼭 들러보게 만들기도 했다.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였지만 이런 관계로 인해 오랜 세월 산사를 향하는 유생들의 발걸음은 끊이지 않았고 그런 교류 속에서 다산 정약용과 초의선사처럼 심금을 터놓으며 교유한 이들도 더러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험준한 산길을 오르며 승려의 도움을 받는 순간에도 유교의 가르침인 경(敬)과 의(義)를 더욱 가슴에 새기던 한 선비의 글을 보면, 아무리 몸 바쳐 정성스레 수발을 들었다고 하더라도 성리학으로 똘똘 무장한 유생의 마음을 녹이기는 그리 쉽지만은 않았으리라 짐작해 본다.


서쪽으로 백 걸음쯤 가서 몽상암(夢想庵)을 찾았는데 가는 길이 가파르고 높아서 올라가려고 해도 몸이 뒤로 처지니 두 승려가 나를 끼고 올라갔다. 내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도를 배우는 것도 이와 같다. 경(敬)과 의(義) 두 가지로 붙들게 한다면 갑자기 아래로 놓는다 해도 떨어지지 않고 위로 올라가 천덕(天德)에 이를 수 있다.”하였다.

西行百步許,尋夢想庵。所向之逕,崚嶒高絶,欲進身退。二僧挾我而上。余喜曰:“此如學道者,使敬義二者相挾持,則要放下霎然。不得,只得向上去,便達天德也。”

《송암집(松巖集)》 권호문(權好文, 1532~1587), 청량산 유람록 (遊淸凉山錄)


그 시절 사대부들의 유람이 자기 두 발로 이루어졌든 남의 두 발로 이루어졌든지 간에 풍경을 보고 느끼는 감상만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고, 웅장한 자연 속에서 일상의 어지러움을 씻어내던 마음 만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무릇 사람이 세상에 처할 때에 밖으로는 온갖 일이 모여들고, 안으로 온갖 생각이 떠올라서 기운이 막히고 뜻이 침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가, 큰 산과 멋진 계곡을 보러가 웅장한 모습을 눈에 담고 시원한 물소리를 들으면 그 동안 막혀서 펴지지 않았던 기운과 뜻이 스르륵 남김없이 풀린다.

夫人之處于世。外則萬事萃之。內則百慮營之。以至于氣塞而志滯。及見山林之大。溪澗之勝。嶔然目謀。泠然耳謀。則向之胷中滯塞而不宣者。消釋無餘矣。

「관악사 북암을 유람한 기록(遊冠岳寺北巖記)」 성간(成侃, 1427~1456)


특히 금강산은 산수 좋기로 워낙 유명하다보니 유람기록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서울에서 그 좋다는 금강산 구경이라도 한 번 해볼라치면 열흘에서 한 달은 족히 걸리는 일정을 계획해야 했고, 그나마도 중간 중간 신세를 질 수 있는 지방관리나 친척들의 도움 없이는 이루기 힘든 여행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처럼 마음을 단단히 먹고 떠나야 하는 장거리 여행만이 큰 즐거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문을 나서지도 않고도 방 안을 탐색한 뒤 《내 방 여행하는 법》을 쓴 소설가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의 경지는 아니더라도 어느날 홀연히 떠난 한나절 즐거웠던 근교 유람의 기록이 남아 있으니 바로 정약용 선생의 「세검정에서 노닌 기록(游洗劍亭記) 」이다.


화재로 인해 정자가 새로 지어지긴 했지만 아직 같은 장소에 남아 있는 종로구의 세검정 터는 물이 맑고 너른 바위가 있어 실록을 편찬하면서 썼던 자료를 씻어내어 내용을 파기하고 또 종이로 재활용하는 과정인 세초(洗草)를 하던 곳이기도 했다. 정약용 선생의 글에 의하면 이 곳의 진면목은 비가 내려 물이 콸콸 흐를 때에 비로소 볼 수 있는데, 도성에서 멀지 않은 곳임에도 그 때를 딱 맞춰 구경을 가기는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뜨거운 여름날, 친구들과 모여 술 한잔을 하고 있는데 마침 폭우가 쏟아질 기미가 보이자 이때다 싶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 뜨거운 열기가 찌는 듯하더니 검은 구름이 갑자기 사방에서 일어나고, 마른 천둥소리가 은은히 들렸다. 나는 벌떡 술병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이는 폭우가 쏟아질 징조군. 그대들은 세검정에 함께 가보지 않겠는가? 가기 싫은 사람은 벌주로 술 열병을 한 번에 다 마셔야 할걸세."

酷熱蒸鬱。墨雲突然四起。空雷隱隱作聲。余蹶然擊壺而起曰。此暴雨之象也。諸君豈欲往洗劍亭乎。有不肯者罰酒十壺。以供具一番也。


아니나 다를까 말을 타고 달려가는 도중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더니 세검정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크게 비바람이 치면서 계곡에 물이 가득하여 장관이 펼쳐지고 있었다고 한다. 물이 콸콸 흘러내리는 모습을 보며 정자에 앉아 흥에 겨워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시간을 보내다 비가 그치고 물이 잔잔해 진 뒤에 흐뭇한 마음으로 돌아오는 풍경을 기록한 이 글은 생생한 현장감이 느껴져 글을 읽는 동안 나도 같이 그 곳을 다녀온 것 마냥 흥이 올라 좋아하는 글 중 하나다.  


같은 장소라도 계절과 시간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 처럼, 그 시간의 그 장소가 과연 볼 만한 곳인지 아닌지는 아무리 다른 사람의 글이나 사진을 봐도 알 수 없고 그저 직접 가서 겪어보는게 제일이다. 말을 타고 수레를 끌고 짐을 이고 지고 가야 했던 그 옛날보다 훨씬 떠나기 좋은 여건에 있으면서도 그저 귀찮은 마음에 집에서 뒹굴거리고만 싶을 때, 비오는 날 세검정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술을 마시다가도 말을 타고 달려나간 행동파 정약용 선생의 흥취를 장작삼아 밋밋한 나의 여행 의지를 다시금 활활 타오르게 해야겠다. 






참고자료

- 이상균, 『朝鮮時代 士大夫 遊覽의 慣行 硏究』,역사민속학회 제38호, 2012

- 이상균, 『조선시대 유람의 유행에 따른 문화촉진 양상』, 대동문화연구, 제80권, 2012

- 박은정, 『근대 이전 소수자의 삶과 문화 탐색- 조선시대 여행문화에 나타나는 승(僧)의 역할과 의미를 중심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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