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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운장 Jan 11. 2020

순례객을 호구로 만드는 호텔이 있다

HOTEL ZENDE

2018년 8월의 어느 새벽. 

호텔 문밖을 나와 역시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체념하는 내가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순간 사람들은 행복해진다고 이야기한다. 자연과의 교감. 길을 걷는 즐거움. 다른 나라의 순례객들과의 자연스러운 대화. 아니면 그저 여행이라 즐거움 등의 이유가 있겠다. 나는 산티아고 길에서 행복한 이유 중 하나는 사람들의 욕구가 기본적인 수준으로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추울 때 내가 가지고 있는 바람막이 하나에 감사할 줄 알고, 목이 몹시 마를 때 내 목구멍에 넘어가는 코카콜라에 감사하고, 오늘도 이 비천한 몸을 누일 장소가 있으면 그걸로 무척이나 행복해지는 곳. 그곳이 바로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이 의식주 중에 주(住)와 관련된 이야기를 할까 한다.



산티아고 길에서 만날 수 있는 숙박 형태는 크게 4가지다. 

1. 알베르게 : 순례자들만 머물 수 있다. tvN 스페인 하숙을 생각하면 된다. 가격은 싸지만 지역에 따라 시설이 천차만별이고 성수기 때는 자리가 없어 잘 수 없을 때도 있다.

2. 호스텔 : 우리가 게스트 하우스라고 말할 수 있는 곳. 알베르게보다는 비싸다.

3. 호텔 혹은 여관 : 방 한 칸을 나 혼자서 묵는 숙박 형태. 비싸다. 

4. 기타 : 노숙. 소방서에서 공짜로 잘 수 있다곤 하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산티아고 포르투갈 길 2일 차. 나는 8월의 땡볕에서 12시간을 넘게 걸어다. 발에는 물집이 잡히고 약간의 탈수 증세도 있었다. 드디어, 오늘 도착하고자 한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관리인에게 갔더니 자리가 없다고 한다.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 시내에 있는 호텔에 묵으라고 한다.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라고?


비루한 육신을 질질 끌고 걸어왔던 길을 거슬러 시내로 갔다. 30분 정도 걸었을까. 보이는 그곳에 HOTEL ZENDE라고 간판이 있었다. 뭔가 짜증이 났다. 순례객이 호텔에 묵어도 되는가 하는 생각과 필요 없이 숙박에 돈을 쓰게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너무 피곤해서 아무 곳이나 들어가 빨리 씻고 자고 싶은 생각이 먼저였다.


말이 호텔이지 미국 영화에 가끔 나오는 모텔 수준의 건물이었다. 들어갔더니 결혼식 피로연이 열렸는지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로비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다. 안내 데스크에 직원은 보이지 않고, 10분 정도 기다리다 결혼식 피로연장을 거슬러 주방 쪽으로 가서 직원을 불렀다.


40세 전후의 통통한 여자 직원이었다. 정확한 액수가 기억나지는 않지만 50유로라고 했다. 한국 돈으로 65000원 정도. (공립 알베르게는 5~10유로 정도다.) 호텔 밖에서 부킹닷컴 사이트에서 가격을 봤을 땐 45유로였다. 그래서 아까 부킹 닷컴에서 45유로로 봤다. 그 가격으로 해달라고 했더니 그건 안된다고 해서 부킹 닷컴에 접속을 해보겠다 했더니 직원이 알았다고 했다. 근데 그 사이 부킹닷컴에 이 호텔의 오늘 숙박이 마감된 것으로 보이는 거다. 딱 봐도 여자 직원이 내가 접속하는 틈에 컴퓨터를 조작해서 마감 처리를 한 것 같다. 


순간 화났지만, 여기에 묵을 수밖에 없는 몸상태로 문을 박차고 나갈 수 없었다. 그리고 하는 이야기가 조식이 포함이 된 가격이라고 했다. 나는 먹지 않겠다고 했다. 돈을 빼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또 그럴 순 없다며 내일 몇 시에 나가니? 물어보길래 6시에 나가 했더니 6시에 준비해줄게 이러는 거다. 그래서 프로미스 약속하자고 손으로 제스처를 했는데 그냥 쌩을 깐다. 근데 이 여자. 기본적으로 너무 친절했다. 의심을 살 정도의 과도한 친절 말이다.


여자가 안내해준 방으로 갔다. 정말 낡았다. 그런데 또 하는 말이 에어컨이 안 나온단다. 부품을 주문했는데 2주째 오지 않는다며. 이 말을 또 믿어야 하나? 내가 보기엔 시설 관리고 뭐고 하지 않는 호텔로 보였다. 그런데 별 수 있나. 그냥 묵어야지.


6시에 일어나 식당에 갔더니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예상했던 대로 조식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아주 크게 속은 것이다. 포르투갈의 이미지가 한 번에 사기꾼의 나라가 된 순간이었다. 배낭을 둘러메고 호텔 문을 나섰는데 문 앞에 빵 봉지가 걸려 있다. 거기에는 꽤나 많은 빵이 들어 있다. 매일 새벽 빵공장에서 호텔로 배달을 하는 것 같았다. 


그 빵 봉지라도 들고 가버릴까. 잠시 생각했지만 모든 게 귀찮아졌고 내 갈길을 갔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다. 어떤 이의 눈에는 순례객이 아닌 호구다.

왔다 갔다 갔다 지금 봐도 진절머리나는 이 길.
카페에 걸려 있던 빵 봉지. 아침에 걷다보면 흔히 보이는 풍경.


다른날 묵었던 여관
다른날 묵었던 닭장같던 알베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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