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쓰다, 2023)을 읽고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296쪽
인생의 모순을 탐구하던 25살의 여성, 안진진은 책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인생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고, 이 모순을 연구하다 보면 "삶의 부피"를 키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안진진이 내린 결론이다.
모순.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어떤 사실의 앞뒤, 또는 두 사실이 이치상 어긋나서 서로 맞지 않음을 이르는 말."이다.
안진진은 스물다섯 해의 시간 동안 이 모순을 가까이서 관찰해왔다. 일란성 쌍둥이였지만 전혀 다른 삶을 산 엄마와 이모의 모습을 통해서 말이다.
안진진의 어머니는 타인이 보기엔 불행하지만 안진진의 눈에는 행복해 보였다.
어머니는 여전히 행복했다. 이젠 완전히 누운 채로 대소변을 받아내게 하고 쉴 새 없이 헛소리를 해대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지루하지 않게 했다. (중략) 부쩍 말수가 줄고 홀로 처박혀 있기를 좋아하는 나, 안진진의 우울도 어머니를 행복하게 해준다.
293쪽
가정폭력, 짊어져야 하는 한 가족의 무게, 감옥에 들어가 있는 아들, 우울증에 걸린 딸. 객관적으로 봤을 때 불행한 상황이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이런 상황 덕분에 활기찬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이모는 어머니와 다른 세계의 삶을 살았다. 결혼기념일마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유럽 여행을 다녀오고, 자녀들이 모두 외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부유하고 큰 어려움 없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이모는 어머니를 부러워했다.
무엇이 그렇게 힘들었냐고 묻는다면 참 할 말이 없구나. 그것이 나의 불행인가 봐. 나는 정말 힘들었는데, 그 힘들었던 내 인생에 대해 할 말이 없다는 것 말이야. 어려서도 평탄했고, 자라서도 평탄했으며,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한 이후에는 더욱 평탄해서 도무지 결핍이라곤 경험하지 못하게 철저히 가로막힌 이 지리멸렬한 삶.
283쪽
불행하지만 행복한, 행복하지만 불행했던 두 사람의 삶을 보면서 안진진은 미래의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사랑하지만 경제적으로 궁핍했던 김장우와, 이성적인 사랑은 없지만 안정적인 삶을 제공해 주는 나영규와의 줄다리기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실험했다. 그리고 결국 모순적인 선택을 한다.
안진진이 모순 투성이의 삶이라는 결론을 내리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사실은 아침 드라마에서 보던 신파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아버지 때문에 힘들었지만 꿋꿋이 살아가는 캔디형 여성 안진진, 김장우, 나영규와의 삼각관계, 결혼을 통해서 삶의 부피를 확장할 수 있다는 1998년도에나 상식적이었던 생각 등. 책에는 빛바랜 소재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책이 전혀 빛바래지 않고 오히려 출간된 지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도 사랑받고 있는 것은 양귀자의 빛나는 문장 덕분일 것이다.
당시의 풍경, 인물의 마음을 묘사하는 문장들은 여전히 아름답다. 상투적으로 "시큰거리게 하는" 문장들을 여기저기서 발견할 수 있다.
내 마음대로 해석한 김장우의 전화 메시지 때문에 나는 쉽게 하늘색 전화기 앞을 떠날 수 없었다. 동전은 넘치도록 많은데, 뒤에서 빨리 끊어달라고 재촉하는 사람도 없는데, 조용조용 꽃가지를 흔들고 있는 라일락은 저리도 아름다운데, 밤공기 속에 흩어지는 이 라일락 향기는 참을 수 없을 만큼 은은하기만 한데.......
79쪽
책의 곳곳에 녹아있는 시대를 관통하는 인사이트들도 책이 사랑받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시간이 지나도 살면서 느낄 수 있는 감정들, 나와 타인과의 관계에서 겪었던 감정들은 30년이 지난 지금의 나에게도 날아와 꽂힌다.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억울하다는 생각만 줄일 수 있다면 불행의 극복은 의외로 쉽다.
188쪽
인생은 결국 모순 덩어리라는 주제를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을까. 책을 읽는 내내 감탄했던 지점이다.
책의 마지막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이 너무 갑작스레 변해버린 요즘. 불안하고 당황스럽기만 한 시절에, 소설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용기를 잃고 주저앉은 사람들에게 무언가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어 이 소설을 시작했으나, 모순으로 얽힌 이 삶은 여전히 어렵기만 하다.
307쪽
책의 초판이 인쇄된 때는 1998년. 우리나라가 IMF로 휘청이던 시절이었다. 회사들은 줄도산을 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길바닥으로 내몰렸다. 작가는 이런 사람들에게 나름의 위로를 건넨 것일지도 모른다. 어머니처럼 불행해도 행복할 수 있고, 누구나 부러워하는 삶을 사는 이모처럼 행복해도 불행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말이다.
미국에서 유학하고 세상을 착하게만 바라보는 이종사촌 주리에게 진진은 이렇게 말한다.
세상은 네가 해석하는 것처럼 옳거나 나쁜 것만 있는 게 아냐. 옳으면서도 나쁘고, 나쁘면서도 옳은 것이 더 많은 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야."
176쪽
IMF는 아니지만 여전히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저마다의 부침으로 시들어가는 사람들이 많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의 구별이 어려운 모순 속에서 저마다의 의미를 찾아 탐구하다 보면 왜 사는지 이유를 모르겠는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작가의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행복하지만 불행했던 이모의 삶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진진의 뒷모습을 보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