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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XAXO Mar 15. 2020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의 의미

글쓰기 모임, 첫 번째 에세이

그게 나를 멈춰 세웠다.


나는 아주 골똘히,  시끄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대체 사람들은  연인에게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가? 어떤 때에, 무슨 마음으로 그런 욕망을 느끼는가?
이것은 어느  시간짜리 프랑스 영화를 보고 나서, 그리고 이십 분짜리 미국 드라마를 보고 나서도, 마치 신발 밑창에 눌어붙은 껌처럼 내게 끈질기게 따라붙은 질문이었다. 타오르는 모닥불 근처에  있는 아름다운 나의 연인을 보고 드는 생각이, 서로의 등과 허벅지에  여드름을 보여주며 낄낄대고 나서 드는 생각이, ‘키스하고 싶다 말이야? 나는 도통  감정선을 따라잡기가 힘들었다.
사랑스러운 상대방에게  입술을 부비는   이상이 키스이리라-적어도 뽀뽀와 키스의 차이는 <건축학개론>  납득이가  설명해   있다- 그렇다면, 상대에게 키스하고 싶다는  상대가 무엇을 하고 있든 간에 멈추어 세우고,  바라보게 하고, 가까이 다가가서  혀를    안에 집어넣어 진득하게 한바탕 침을 섞고 싶다는 의미이다. 대체 ?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너무 아름다워서? 눈을 마주쳤는데 딱히  일이 없어서? 문득 바라본 상대의 입술이 빨갰기 때문에? 도대체 사람들은 어떨 때에 키스 뾰족이 세우는가? 그럴 때에 키스를 하는 거라고 누가 가르쳐줬는가? 본능이 그리 하라고 일러주더라면,   본능은 그토록 잠잠한가?  어째서 한 번도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키스를 하고 싶었던 적이 없는가?  
애당초 키스가 로맨틱한 행위로 인식되는  자체가 내게는 의문투성이였다. 나아가 나는  누가 굳이 키스란  발명해 퍼트렸냐며 울분을 느끼곤 했다. 키스의 근원을 좇노라면 혹자는 어미새와 아비새가 자식에게 입으로 먹이를 나눠주던 것을 들먹이며 키스가 위로(comfort)  말로   없는 깊은 감정의 교류를 가능케 한다고 주장한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정말 기상천외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애정을 표현하니까. 그러나 애정을 느끼는 사이라고 모두 키스를 하지는 않는다. 특히 스킨십이 아주 보편적이지는 않은 유교 정서상, 조선시대 때에 키스는 성관계의 전희 단계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여전히 지금도 혀를 섞는 프렌치 키스는 몸을 섞는 애무의 일종이라는 인식이 크다. 내가  사람과 키스할  있나 없나를 가리며 우리는 온갖 것을 점치기도 한다. 이를 테면 내가 그와 사귈  있겠는지, 내가 그에게 성적으로 끌리는지 등등을 판단할 때에 대뜸 상대와 키스하는 상상을 해보는 것이다.
귓가에 종이 울리느니 하는 첫 키스 경험도 없었고, 남의 침과 구취를 맛봐야(?) 하는 것에 거부감이 드는 것은 여전하지만, 서로의 숨결과 호흡을 느끼고자 하는 인류의 관습으로 해석하자면 그래, 키스는 어쨌든 흥미로운 행위이다.
 


그러나 그게 나를 멈춰 세운다.


 안의 내밀한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눠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점에서 키스와 연애는 별반 다르지 않다. 나는 결국  무엇에든 멈칫거리는  고유한 습성을  알고 있다. 혼자서 간직하고 홀로 감상하는 사랑을 항상 선호해 왔던 것이다. 힘주지 않고 사랑하는 법을 터득했기 때문에  사랑은 나를 다치게 하지 않지만, 남의 사랑은  것과 결도 방향도 조금씩 다르더라.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끈적하게 섞고 싶지 않았다. 불순물 없이 투명하게 사라져야 , 거품 같은  사랑.
키스는 아마,  순간만큼은 혀를 얽고 있는  사람을 짜릿하게 연결하기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현실의  사람과 내가 사랑하는 머릿속  사람 사이에 거리를 두고 싶어 했다.  둘이 다른 거라는 인식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야만 현실의  사람이, 혹은 우리의 관계가 어떻게 변하든 간에  사랑만큼은 흠집 없이 안전하게 시작하고 끝맺을  있었다. 그러니 필연적으로  거리를 좁히다 못해 충돌시켜야만 하는 ‘입술 박치기라는 사건을, 아주 견딜 수가 없는 걸지도 모르겠다.
오고 가야 하는 눈길, 미묘하게 맞춰야 하는 각도, 분위기에 맞는 리듬과 박자와 세기까지, 어쩌면 키스는 둘이서 추는 춤과도 같다. 자연스러우려면 분명 많은 경험이 필요할 것이고, 때문에 사실 나는 파트너 앞에서 괜히 뚝딱이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감고 들이대기에는 너무  자존심과 살짝의 완벽주의, 깔끔함에 대한 고집 등이 키스 자체를  포도로 만들어버렸다. 나는 앞발을 낼름 핥으며 중얼거린다, 그거   아니더라고.  하는지 모르겠더라고, 엣헴.
그래서   앞의 사람이 예뻐 보일 때에, 혹은   그와 가까워지고 싶을 , 성적 긴장감이 어색하고 민망하게 넘실거릴 , 나는 웃으며  발짝 뒤로 물러나는 것이었다.  마음을 흘리지도 뱉지도 않고, 멋쩍게  뒤로 넘기는 마른침과 함께 그저, 혼자서 집어삼키려는 것이다. 키스를  수도 있었겠지만 하지 않은 순간들, 아쉽게 달짝지근했던 추억들은  안에서 빛이 난다. 사귀어도 좋았겠지만 그러지 않아도 충분했던 인연들은 흔적 없이 반짝이며 나를 지나간다. 달뜨지 않고 평온하고 싶었던 나는 그렇게, 입을 맞추지 않고도 여러  사랑을 했다.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 없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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