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포기의 위엄
건조한 대기와 스트레스에 적응하느라 피부가 온갖 염증으로 다 뒤집어진 적이 있었다. 그때는 하루 종일 열감과 가려움에 시달렸는데,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도리어 내 생활을 끈질기게 영위해야 했다. 뭐랄까, 할 일이 없으면 그 괴로움에 눈길을 줘야만 하니까 그럴 틈이 없도록 무엇이든 해야 하는 거였다. 그래서 얼레벌레 성실해진 느낌이 들었다. 컨디션이 좋지 않으니 딱히 열심히 하는 건 아니었지만, 해야 할 일들을 어떻게든 해치워서 넘겨버리고 사람을 대할 때도 오히려 걱정이나 부담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지냈던 감각은 지금도 무척 묘하게 기억된다. 고통에 마비된 자아는 내 속에서 부피를 무척 줄였고 나는 체념이 가져다주는 기묘한 자유를 느꼈다. 기계처럼 움직이며 완벽하게 하고 싶다는 집착을 자연스럽게 버렸던 나날들. 살아지니까 살아가던 날들.
'지금 이 순간'에만 충실할 수 있다면 하루살이처럼 사는 것도 썩 나쁘진 않다. 하루하루를 무사히 넘기겠다는 마음가짐이면 못 할 건 없지 않나 싶다. 말 그대로 하늘이 무너지더라도, 하루살이에 불과한 내게는 솟아날 구멍이 있기 마련이다. 실제로 공중을 나는 모기나 파리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빗방울에 맞아 죽는 일이 없다고 한다. 어깨 위 모든 것을 비우고 날아온 이곳에서 나 역시도 무척 가벼운 존재이다. 그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흠뻑 젖어 잠깐을 추락하더라도, 종국에는 비틀거리며 털고 일어날 것이다.
결국 나를 '지금 이 순간'이 아니라 내면의 세계로, 과거에 못 한 일 또는 미래에 해야 하는 일들로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것은 자의식의 지독한 질주이다. 자아는 말이 너무 많아 가끔 뮤트 해줄 필요가 있다. 명상이나 운동, 예술 등 아무 생각 없이 몰입할 수 있는 취미들은 이를 위해 좋은 해결책이 되기도 한다니 아이러니하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나를 잊어도 줘야 한다는 게.
기억과 고통
내게는 기억나는 고통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고통들도 있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워버리는 버릇 때문이다. 내 안의 지우개는 힘들었던 한 해의 기억을 깔끔하게, 어떤 사람이 왜 그토록 밉고 싫었는지에 대한 기억을 희뿌옇게 지워놓는다. 기억력을 믿지 못하니 중요한 사건과 이벤트를 잊지 않으려면 일기를 꾸준히 써야 한다. 하지만 일기장이란 건 계기가 없으면 잘 들여다보지도 않게 되니 말이다. 어쩌면 있지도 않은, 겪지도 않을 고통들에 내가 그토록 방어적인 이유가 아마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미 너무 잘 아는, 무척 선연한 고통들이라서 무의식 저편에 묻어두고 봉인한 것들이 아닌가. 위험한 것들 근처에는 가까이 가지 않는 게 상식이니까, 귀신 들린 집인 줄을 알면 홀린 게 아닌 이상 들어가 살지 않는 게 당연한 것처럼. Ghost가 유령뿐만 아니라 '나쁜 일에 대한 기억'을 뜻하기도 한다는 것은 무척 의미심장하다.
게다가 사람을 아주 자주 만나지도 않건만 기억은 지극히 '나' 위주로만 하는 편이다. 예를 들면 언제쯤 어디를 갔다거나 무슨 말을 했거나 들었거나 하면 그 사실만 기억이 나고, 그때 어느 누구와 같이 있었는지는 그게 불과 엊그제의 일이더라도 좀처럼 떠올리기 힘들다. 그러다 보면 그 말을 해줬던 당사자한테 대고 다시 '누구한테 들었던 건데' 하면서 들려주는 웃긴 상황이 있기도 하다. 나의 이런 '메모리 부족' 증상이 못내 찜찜한 것은 세상을 너무 이분법적으로, '나 자신'과 '그 외 타자'로 구분해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서이다. 얼굴도 이름도 그렇게 쉽사리 지워지고 마는 타인들에게 괜스레 미안하기도 하다.
나는 오래간 무조건적인 애정이란 걸 믿지 않는다고 말해왔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도 든다. 그런 애정이 있단 걸 믿는 것 자체가 또 다른 고통이 되는 것이다. 그런 애정의 가능성이야말로 내게는 근원적인 공포이다. 그게 정말로 가능한 거라면, 그렇다면 왜 나는 그것을 가질 수 없지, 에 대한 질문에 또 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 인간관계는 바보 같은 미련과 복잡한 욕구로 점철되어 있다. 애초에 기대나 희망을 품지 않으려 노력을 했음에도, 실망을 부르는 모종의 사건이 있으면 그때부터 그 인연을 '이미 끝난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안부를 묻는 연락을 이어갈 수 있더라도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고 싶고, 이따금은 아예 내 쪽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기도 하다. 이 서늘함의 기저에는 당신이 멀어지는 나를 아쉬워하면서 붙잡아 줬으면 좋겠다는, 다시 말해 우리의 단절을 아쉬워하는 게 나 혼자가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