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묘하게 '잘' 만든 영화 <TAR>를 보고 *스포일러 주의
나는 그저 예민하고 버석한 중년의 천재 레즈비언을 감상하러 갔을 뿐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보다 더한 것을 내게 보여줬다. (일단은 상영 시간이 2시간 38분이다.) 오랜만에 시네필 감성이 되살아나 글 한편을 완성하기로 한다.
일단 이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 내가 바라던 영화이다. 나는 레즈비언이 주인공인 영화가 아니라 주인공이 레즈비언인 영화를 보고 싶노라고 수년 간 외쳐왔다. 이러한 외침에 처음 응답해준 영화로는 <I care a lot>이 있겠고, 그 영화의 주인공은 결코 도덕적이지 않은 레즈비언 커플이다. 어디까지나 그걸 재미있게 봤던 건 영화의 톤이 일종의 풍자극에 가깝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제는 윤리적이지 않은 케이트 블란쳇을 정성스럽게 내세웠는데 완전히 예술영화, 독립영화, 다큐멘터리 톤이다. 나는 모든 양상의 레즈비언이라는 인간에, 혹은 인간이라는 레즈비언에게 노출될 준비가 되었나?
이 영화에 대한 반응이 매우 엇갈릴 것으로 예상되는 지점 중 하나는, 주인공을 성공한 레즈비언으로 설정한 게 다분히 의도적이라는 생각마저 든다는 것이다. 일단은 케이트 블란쳇만을 위해서 쓰였다고 하는 지점에서 그가 이 영화를 하기로 한 것이 여러모로 엄청난 도전이지 않았을까 싶다. (자세한 줄거리와 영화 너머 맥락에 관해서는 다음 기사를 참조할 수 있다: https://slate.com/culture/2022/10/tar-cate-blanchett-movie-cancel-culture-ending-meaning.html)
이 연출의도를 섣부르게 판단내리기보다는 다소 에둘러서 설명해보자면, 나는 영화를 보면서 최근 개그우먼 강유미씨의 작품을 떠올렸다. (링크 참조: https://youtu.be/JTgftQyHMXw) TAR와 강유미씨 모두, 인간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우리는 주인공을 불쌍하다고 생각해야 할지 고민하는 지점에 이른다. 어떤 이야기가 대중들의 입맛에 맞춰지고 자극적으로 소비되는 과정을 다루기 때문이다. 주인공과 거리를 둘 수 있다면, 다시 말해 주인공이 xx했기 때문에 당해도 싸지, 라고 중얼거리며 자리를 벗어날 수 있다면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영화 TAR는 이 작업을 무척 묘하게(또는 속된 말로, 킹받게) 한다. 당신은 자리를 벗어날 수 없다. 이 영화를 보는 당신은 오직 관객만이 아니다. 한 장면에서는 묘사를 지나치게 자세하게- 그 아무것도 생략하지 않고 지리멸렬하게 하다가 다른 장면에서는 그 어떤 설명도 생략해버린다. '열려 있는 해석'이란 게 섬뜩하게 다가오기까지 한다. 해석은 모두에게 열려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앞다투어 서로에 대한 판단을 내린다. 요즘과 같은 시대에 모두의 도마에 오르는 위치에 있다면, 그리고 그게 직설적이고 즉흥적이고 불안정하고 열정적이며 약간의 바람기가 있는 '여성'이라면? 저지른 일이 폭로되는 것은 시간문제고 저지르지 않은 일도 루머로 퍼지기 쉽다.
이게 이 영화가 주인공과의 거리두기를 실패하게 만드는 이유이고, 그게 너무도 괘씸한 이유이다. 주인공이 페미니스트였다면, 유색 인종이었다면, 명망을 좇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뭐 어떤 이유로든 위계에 의한 포지셔닝에 '현명하게' 처신하는 사람이었으면 되는 문제일까? 영화 말미에 나오는 나레이션이 제일 열받는다: Let no one judge you. 그게 가능한가? 해석이 열어주는 문이 당신을 위한 연단일지 낭떠러지일지 결코 알 수 없다. 당신은 아무것도 그리 애매모호하게 남겨둘 수 없다- 모든 사람들이,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든 당신을 해석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정말 불쾌했던 부분을 하나 짚고 넘어가야겠다. 동남아가 당신들의 condescending한 무대 & 휴식을 취하고 재기를 꾀하는 공간 & 자신의 행동에 대해 깨닫게 하는 거울 장치로 쓰이게 만든 건 별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