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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많은김자까 Mar 02. 2023

학부모단톡방에서 나올 용기

슬기로운 학부모생활 (1)

대딩 두명, 고딩 한명, 중딩 한명, 막내 초딩3학년까지.

나는 다섯번째 학부모를 수행중이고, 23년째 학부모이며, 앞으로도 10년쯤(의무교육기준)은 더 학부모일 예정인 학부모다.

그러니까 실력으론 몰라도 세월로는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을 학부모 경력자인 셈이다.

지금은 50대로 지나치게 늙은 엄마인 관계로 학교에서 부여되는 학부모활동은 죄다 멈춤 상태지만(할렐루야!!),

명예교사, 녹색어머니, 밥먹듯 반대표, 운없으면 학년대표까지 지내봤으니

'슬기로운 학부모 생활'은 몰라도, '징글징글한 학부모 생활'에 대해선 더러 할말이 있을 것도 같다.



1호가 제법 공부를 잘했다.

그래서, 못나게도 한때 어깨에 뽕깨나 넣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1호가 재수 삼수를 거쳐 2023년인 지금 24살이니,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얘기다.


요즘 인기리에 방영되는 드라마 '1타스캔들'을 보다, 문득 그시절의 못난 내모습이 떠올랐다.

극중 '방수아'라는 아이는 밉상 엄마만큼이나 공부만 잘하는 밉상 청소년이다.

점수 1,2점에 일희일비하고, 내신 한등급에 목숨을 거는 아이.

그런 방수아는

뒤늦게 영어문제 복수정답이 인정되자. 이성을 잃고 만다.

복수정답으로, 라이벌인 해이의 등급이 올라가는 대신, 자신의 등급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교사에게 항의해봐도, 받아들여지지 않자,

길길이 뛰며 히스테리를 부린다. 그런 아이를 달래는 수아엄마도 가관이긴 마찬가지였다.

혀를 끌끌차며 드라마를 시청하다....기시감 드는 1호의 중1 중간고사가 떠올랐다.



중1 1호는 당시 가채점 결과 전교 1등을 했다.

학부모들의 반 단톡방에서는 '역시 1호'라며, 축하 분위기가 무르익었는데...

뒤늦게 과학이었나? 여하튼 국영수가 아닌 과목에서 복수정답 문항이 나오면서,

1호는 0.04 차이로, 2등으로 밀려나게 됐다.

이미 축하란 축하는 다 받은지라....침묵하는 단톡방 분위기가 머쓱하고 영 불편했다.

몇몇 엄마는

"그래도 국영수는 1호가 1등"이라며 위로(?) 했고 "암기과목 잘하는 게, 어디 잘하는 거냐?"

"1호는 사교육 하나도 안하잖아. 걔는 전과목 과외 한대"라며

1등이 된 죄없는 그 아이를 깎아내림으로, 불편한 위로를 했다.

이렇든 저렇든 어떠한 말과 위로에도, 난 왠지 모르게 약이 올랐다.


그런데 정작, 그날 귀가한 1호의 모습은 지나치게 평온한 게 아닌가?


"넌 약 안오르니?"

- 왜? 무슨 일 있어?

"얘 좀 봐. 무슨일 있어라니...전교 일등이다가 하루아침에 이등으로 밀렸는데, 무슨일이라니?"

- 그게 뭐? 그 문제 다시 봤더니, 복수정답 맞더라고

(참내 기도 안차서) "약 안올라? 0.04점 차이로 밀려났는데? 니가 국영수는 더 잘봤잖아."

-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약이 왜 올라? 걔가 나보다 열심히 했겠지. 난 전교 2등도 잘한거라고 생각하는데? 엄만 아니야? 나 전시험보다 성적 오른건데? 그런데 엄마는 왜 화가 났어?

(괜히 겸연쩍어서 짜증) "화가나긴 누가 화가났다그랫?!!"



그러게 말이다. 난 그때 왜 화가 나고, 왜 약이 오른 것일까?

내가 밤을 새며 공부를 한 것도 아니고, 고작 한 일이라곤

시험끝날 시간에 맞춰 빚쟁이마냥 "시험 잘봤어?" 전화로 다그친 거 밖에 없는데....


게다가 중학교 시험, 그게 뭐라고?

인생 도화지에서 점하나도 되지 못할 그까짓 시험이 뭐라고?

언젠가 담임선생님께서 상담때 "1호가 훌륭한 건, 일등이어서가 아니라 인성때문입니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친구가 잘되면 기꺼이 박수쳐 줄 수 있는 아이입니다. 어머니 참 잘 키우셨습니다."


난 자격없는 '잘 키우셨'단 선생님의 칭찬앞에 한없이 작아질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부모) 위해서 공부하라고 하니? 다 너(자식) 위해서 하라는 거야"라는

엄마인류들의 공통의 후렴구가 정말 말처럼 '아이를 위해서일까'??

적어도 그때의 나는 아니었던 것 같다.

내가 당시 약이 올랐던 건, 전교 1등을 하지 못한 아이의 인생에 큰 오점이 남을까봐, 낙오자가 될까봐....

노심초사했던 게 아니라,  

'공부꽤나 하는 아이의 엄마'라는 학부모단톡방(=남의 눈)에서의 나의 위상에 손상. 아니! '손상'이라는 점잖은 한자어를 쓰기에도 우스운 '뻐김''허영심'. 그러니까 'ㅉ팔림' 때문이었던 것이다.


아이의 성적이 나의 지위나 되듯,

아이의 대학간판이 나의 능력이자 위상이나 되듯,

난 애초 그런 못난엄마로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면서도

그랬던 것이다.


난 그후로 학부모 반단톡방에서 나오거나, 소위 눈팅만 했고.

내가 반단톡방을 소집해야 하는 방장, 반대표가 되면

학기 초에 단한번 인사자리 외에는 불필요한 온오프라인 반모임을 결성하거나 주도하지 않았다.


종종 MBTI 'I'성향의 지인들이, '반모임에 꼭 나가야 하냐'며, 조언을 구할 땐.

"아이들을 위해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아이를 매개로 맘맞고 친한엄마들을 사귄다고 생각한다면, 나가도 좋지 않겠냐"고 말한다.


대학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고,

공부는 공부재능이 있는 아이들이 하면되고,

다 잘할 수 없는 공부에, 안되는 내아이를 돈들여 꿰 맞춰야 할 필요도 없다는 게,

23년 학부모 경력의 애다섯 늙은학부모, 나의 생각이다.

아이가 저멀리 올라가는 사다리가, 스스로의 노력이어야지.

누군가를 계단 삼아 올라가선 안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올라간 자리는 늘 불안하기 마련이고, 늘 나쁜맘을 먹기 마련이지 않겠는가.


이제 막 학부모가 됐는데,

MBTI 'I' 성향이거나, 귀가 얇거나,

말한마디에도 상처를 잘 입는 성향의 엄마라면,

'학부모단톡방에서 나올 용기' 또는 '눈팅만 할 용기'를 추천하는 바이다. 

아니면, 아빠를 학부모단톡방에 밀어넣던가.

말그대로 학모가 아니라, 학부모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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