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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나 Sep 02. 2020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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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만난 교감선생님들 중에는 ‘미안하다’라는 말을 교사인 내게 선뜻 하는 분이 없었다.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는 건 항상 내 쪽이었다. 7년 전, A라는 교감선생님은 명명백백히 본인의 과오로 나의 동반 휴직 신청이 물거품이 될 뻔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변명을 하며 사과하지 않았다. 다른 글에서 따로 적겠지만 나의 교직생활 중 최악의 상사로 기억될 에피소드들을 아주 많이 만들어주신 분이었다. 2년 내내 나를 괴롭히다가 나의 동반 휴직을 일주일 남겨둔 시점이었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구구절절 핑계를 대며 어쩔 수 없지 않냐고 말하는 A 교감 선생님의 옆모습이 무척이나 초라하고 뻔뻔하게 느껴졌다.




  “저는 한 달 전에 휴직 서류를 제출했고요, 교감 선생님이 잊어버리고 제출을 안 하신 겁니다.
비행기표는 이미 결제했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저는 장학사님께 전화해서 사실대로 말할 거고, 예정대로 출국할 겁니다.”




  이 말을 남기고 나는 먼저 돌아섰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를 상냥하게 말하던, 또는 억울한 침묵으로 순응하던 신규 교사가 4년 만에 처음으로 이를 악물고 하고 싶은 말을 한 날이었다. 그 이후로 난 해야 할 말이 있다면 참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 구역의 미친년’ 혹은 ‘또라이 선생’ 소리를 듣는 한이 있더라도 나를 무시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  



  개인이 타인을 대하는 방식은 습관이다. 대부분의 습관들이 그렇듯, 우리는 내가 남을 어떻게 대하는지 평소에 잘 인지하지 못한다. 그냥 그래 왔으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타인이 나를 대하는 방식의 옳고 그름에 대해 표현해야 한다. 그 결과가 항상 같은 것은 아니다. 화를 내는 사람도 있고, 겉으로는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칼을 가는 사람도 있다. 드물지만 이번 교감 선생님처럼 진심으로 사과하는 사람도 있다. 나도 후자가 아닐 때 마주할 사회적 불편함이 여전히 싫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반응이 아니다. 내 생각을 표현한다는 그 자체가 목적을 충족시킨다.

  

  첫 번째 목적은 타인을 ‘이해’ 하기 위해서다. 만약 내가 지금 교감선생님을 찾아가 마음을 꺼내놓지 않았다면 이 분의 속마음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내게 사과를 했을 수도 있지만 그 지점에 이르기까지 나는 그분에 대해 부정적인 마음을 품었을지 모른다. 지금 교감선생님과 휴직 처리를 맡았던 A 교감 선생님은 내게 잘못을 했다는 점은 똑같다. 하지만 내가 의견을 표출했을 때, 한 분은 마음을 열고 사과를 할 줄 아는 분이었고, 다른 한 분은 그렇지 않았다. 결국 내 마음을 표현하는 행위가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를 더 잘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으로부터 어떤 반응을 얻어내든 타인을 알아간다는 점에서 이미 의미가 있다.



  의사 표현의 두 번째 목적은 자존감이다. 타인이 나를 부적절하게 대하고 있다면 알려주는 것이 나에 대한 예의다. 누군가 대신 말해주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런 부당한 대우를 받아서는 안돼라고 스스로 말하는 것이다. 물론, 수직적인 한국 문화, 고용과 승진이 얽혀 있는 관계 속에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왜 갑질에 대해 끊임없이 관심을 갖는 것일까?  개인으로서 존중받으며 살기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세상을 움직이는 모멘텀은 사람들의 ‘욕구’였다. 만약 현시대 사람들의 욕구가 가리키는 방향이 자존감을 지키며   있는 사회라면 나는 우리 사회가 그렇게 변화해 나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존감을 지킬 수 없는 조직은 서서히 버려질 것이고, 타인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들 또한 점점 더 외로워질 것이다.



  말하지 않으면 누구도 알 수 없다. 내가 나를 꺼내보이지 않으면 타인은 내 의중을 알 수 없고, 나도 상대방의 속마음을 알 수 없다. 무엇보다, 말하지 않으면 말하지 않을수록, 나 자신은 스스로를 의지할 수 없게 된다. 힘들 때 내 편이 되어주지 않는 부모에게 아이들이 더 이상 고민을 털어놓지 않듯이, 내가 나를 돕지 않으면 나는 나 자신과 멀어지게 된다.



  교무실을 나오며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동학년 선생님들께 대신 마음을 전해드린다는 약속을 지키려 선생님들을 불러 모았다. 아침의 일을 이야기하자 모두들 속이 후련하다고 했고, 한 선생님은 눈물을 흘렸다. 마음을 전한 후련함과 이런 마음을 받아준 데 대한 감사함의 눈물이라고 했다.



  마음보이기를 참지 못하는 내가 철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잘 참았던 과거의 내가 어른스러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차이점이라면 딱 한 가지다. 예전의 나는 그저 두려워했고, 지금의 나는 여전히 두렵지만 입을 연다는 것뿐이다. 어차피 후회할 거라면 난 앞으로도 말하겠다. 그렇게 나를 보여주고, 상대방을 알아가겠다.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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