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와 체호프가 그린 죽음이라는 낯선 세계
필자는 종종 다음과 같은 상상을 하곤 한다.
영험한 기운을 내뿜는 광활하고 황량한 평원에 ‘구원’으로 가는 두 갈래 길이 있다. 하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어둑하고 침침한 지하 세계로 향하는 길이고, 나머지 하나는 톨스토이의 곧고 좁은 영혼의 순례길이다. 늘 그렇듯 두 갈래 길 사이에는 갈 곳을 잃은 한 사람이 있다. 한참을 망설이던 여행객은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는데, 이때 익숙한 체호프의 얼굴이 나타난다. 체호프는 추위에 떨고 있는 여행객에게 사모바르에 담긴 따뜻한 차를 건넨 뒤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의 구원은 여기에 있소.
이것이 필자가 그리는 러시아 문학의 세계이다.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톨스토이와 체호프의 거리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거리만큼이나 멀게 느껴질 것이다. 톨스토이는 백작 가문의 아들이며, 웅장한 대서사시의 창조자이자 도덕적 설교의 주인공이었던 것에 반해, 체호프는 가난한 잡화상의 아들이며, 정교한 단편소설의 작가이자 해학적 필치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개인적인 거리는 가까웠으나, 러시아 문학의 계보에서 두 작가 간의 거리를 좁히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렇듯 상반된 인상과 매력, 상징성을 지닌 두 작가는 놀랍게도 같은 시기에 비슷한 내용의 중단편 소설을 발표했다. 톨스토이의 소설치고는 매우 짧고, 체호프의 소설치고는 길었던 두 작품은 바로 «이반 일리치의 죽음»(톨스토이, 1886)과 «지루한 이야기»(체호프, 1889)이다. 두 작품은 모두 높은 사회적 지위와 명예 등 겉으로 보기에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중년과 노년의 남성이 죽음을 앞두고 좌절 속으로 빠져드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필자는 두 소설을 비교함으로써 톨스토이와 체호프가 그린 죽음이라는 낯선 세계에 한 발자국 다가가 보려고 한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이반 일리치와 «지루한 이야기»의 니꼴라이 스쩨빠노비치는 여러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두 사람은 법관과 학자로서 흠잡을 데 없이 성공한 삶을 살았다. 명민하고 밝은 성품을 가진 이반 일리치는 법률학교 졸업 이후 꾸준한 승진을 거쳐 항소법원 판사가 되었으며, 니꼴라이 스쩨빠노비치는 저명한 의학자 및 교수가 되어 삼등 문관의 지위와 ‘각하’라는 칭호도 부여받았다. 두 사람은 상류 사회의 일원으로서 훌륭한 사회적 평판까지 갖추었으며, 살면서 인생에 오점을 남길만한 일탈을 한 번도 저지르지 않았다. 이들은 부인과 결혼을 앞둔 딸로 구성되어 있는 (겉으로 보기에)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는 점에서 공적 영역뿐만 아니라 사적 영역에서도 빈틈없이 완벽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두 작품은 각각의 인물이 삶의 정상을 맛본 뒤 추락하는 시점에서 시작한다. 따라서 두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바로 두 인물 모두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점이다. 예기치 못한 치명적 부상을 입은 이반 일리치와 불치병을 앓고 있는 니꼴라이 스쩨빠노비치는 모두 죽음의 공포를 실감하기 전에는 자기 자신이 삶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먼저 이반 일리치를 삶의 주인으로 만든 것은 공과 사를 철저하게 구분하는 능력이었다. 그는 판사봉을 들고 있을 때 마치 섬세하게 음을 조율하는 바이올리니스트처럼 공과 사를 분리해냈고, 그러한 능력 덕에 재판장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가 공무로부터 “살아 있는 생생한 것들을 배제”(p.45)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공사를 혼동하지 않고 엄격하게 구분하는 데에서 이반 일리치는 최고의 수완을 보여주였다. 그것은 타고난 재능과 오랜 경험을 통해 놀랄 만큼 빼어나게 조련된 것이었다.” (p.46)
그는 재판장뿐만 아니라 삶 전반에 공사분리의 원칙을 적용시켰는데, 이는 작중에서 공무와 카드놀이로 양분된 생활양식으로 표현되었다. 늘 ‘높은 사람들’의 기준을 의식하고 인생의 모든 문제를 가볍게 대하는 태도로 살아온 그가 가장 중시한 것은 ‘품위’와 ‘유쾌함’이라는 가치였는데, 이에 각각 대응되는 것이 ‘공무’와 ‘카드놀이’였던 것이다. 이반 일리치는 품위 있고 유쾌한 삶을 위해 언제든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다고 느꼈기에 스스로를 삶의 주인이라 여길 수 있었다.
“...이반 일리치가 진정으로 기쁨을 느끼는 것은 카드놀이였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살면서 부딪힐 수밖에 없는 그 어떤 불쾌한 사건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마치 촛불처럼 다른 모든 것들 앞에 환하게 타오르는 기쁨이 있다면 그것은 마음에 맞는 좋은 친구들과 둘러앉아 너무 시끄럽지 않게 카드를 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p.48)
한편 «지루한 이야기»의 니꼴라이 스쩨빠노비치는 개별적이고 파편화된 학문 분야, 직업, 사상을 ‘통합’하는 힘을 발휘함으로써 삶의 주인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는 학문의 발전을 위해서 “의학, 법학, 기타 등등 간의 학문의 경계를 허문 학제 간 교육”(p.24)이 필요하다고 여겼으며, 자신의 전문분야에 얽매이지 않고 과학의 전 영역을 꿰뚫는 견해를 제시하는 학자를 “학문의 주인”(p.25)이라고 규정할 정도로 ‘통합’의 가치를 중시했다.
이러한 그는 ‘강의’를 통해 ‘통합’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었다. 일단 그는 강의를 할 때 오랜 연구 경험을 통해 얻은 노련함, 고도의 집중력, 타고난 재능 등 자신이 가진 모든 역량이 하나로 합쳐지는 경험을 했다.
“훌륭한 지휘자는 작곡가의 사상을 전달하기 위해 동시에 스무 가지 일을 한다. 악보를 읽는 동시에 지휘봉을 휘둘러야 하고 가수를 보아야 하고 또 드럼 주자를 향해, 혹은 프렌치호른 주자 등등을 향해 모종의 제스처를 보여주어야 한다. 강의할 때의 나도 그와 똑같다.” (p.26)
또한 그는 강단에 설 때 자신의 내면에 있는 “다양한 형식과 현상과 법칙들 그리고...무수한 사상들”(p.27)이 결합되는 것을 느꼈으며, 자신이 한꺼번에 과학자, 교육자, 웅변가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니콜라이 스쩨빠노비치는 강의를 하며 여러 능력, 직업, 사상을 하나로 ‘통합’하고 학문과 삶의 주인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어떤 토론도 그 어떤 취미나 게임도 나에게 강의만큼 그렇게 큰 기쁨을 준 적이 없다. 나는 강의를 하는 동안에만 나 자신을 전적으로 열정에 내맡길 수 있었고 영감이란 것이 시인들이 지어낸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p.28)
하지만 두 인물 모두 다가오는 죽음의 기운을 느낀 뒤 자신을 삶의 주인으로 만들어주었던 일들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안정되고 균형 잡힌 삶에 금이 가고, 죽음이라는 낯선 세계에 내던져지면서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늘 가볍고 유쾌한 태도로 만사를 대하던 이반 일리치는 매 순간 자신을 덮치는 통증으로 인해 적대적이고 불만 가득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눈에 띈 것은 자신을 진찰하는 의사였다. 그는 일말의 연민도 없이 오로지 병리학적 관점에서 환자를 바라보는 의사로부터 공과 사의 분리를 철칙으로 여기는 법관의 모습, 즉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반 일리치는 충격에 휩싸였고, 자신의 삶을 지탱하던 원칙과 생활양식에 대해 깊은 회의감을 느끼게 되었다.
“한 번은 친구들이 찾아와 카드를 치기 위해 둘러앉았다...즐겁고 활력이 솟았다...그런데 갑자기 이반 일리치는 빨아들이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입안에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카드에서 이기는 것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이 왠지 기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p.61)
“이젠 재판 업무에 매달리는 것도 자신이 숨기고 싶은 것을 더 이상 숨길 수 있게 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젠 법원 일도 그를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방편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p.74)
이반 일리치는 더 이상 자신이 품위와 유쾌함을 추구할 수도, 공사분리의 원칙을 통해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죽음이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이라는 사실만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에 죽음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공포가 그의 삶의 고삐를 잡게 되었다. 빈자리에 새로운 주인이 들어선 것이다.
«지루한 이야기»의 니콜라이 스쩨빠노비치 또한 위대한 학자라는 명성을 지닌 인간도 죽음의 운명 앞에서는 무력하다는 사실로 인해 괴로워했다. 그리고 이는 ‘빛나는 이름’과 ‘실제 삶’ 사이의 괴리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졌다.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 한평생 의학에 몰두했건만, 남은 것은 죽어가는 자신의 육체에 대한 진단과 이를 뒤따르는 정신적 공포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에 그 또한 강의로부터 더 이상 활력과 기쁨을 얻지 못하게 되었다. 자신이 노년에 이르기까지 ‘이름’과 ‘삶’을 하나로 통합시키지 못한 실패자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신문마다 내 병세를 알리고 내 동료와 학생과 대중이 쓴 위로의 편지가 쇄도한다고 쳐보자.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내가 낯선 침대에서 고통과 철저한 고독 속에서 죽는 것을 막아주지는 못할 것이다……물론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죄 많은 나는 내 유명한 이름이 싫다. 꼭 나를 배신한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서다.” (p.100-101)
이렇듯 각각 ‘카드놀이’와 ‘강의’로 대표되는 기존의 삶의 방식에 큰 환멸을 느낀 두 인물 모두 ‘삶의 주인’에서 죽음의 공포에 의해 지배받는 ‘하인’으로 전락하는 경험을 했다.
페이지 표기는 다음의 책을 따름.
-레프 니꼴라예비치 똘스또이 지음, 이강은 옮김, «이반 일리치의 죽음», 창비, 2012.
-안똔 체호프 지음, 석영중 옮김, «지루한 이야기», 창비,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