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시게 불완전한》(동아시아, 2023) 읽기 노트
일라이 클레어의 《눈부시게 불완전한》을 읽으며 쓴 조각글입니다. 이어 붙인 조각의 틈새로 스며든 빛을 닮은 이 책은, 불완전함 속에서 더 눈부시게 빛나는 것 같습니다. 그런 믿음을 핑계 삼아 일관성 없고 정갈하게 다듬어지지도 않은 글을 공유합니다. 책을 읽는 과정을 소개하는 글이라 여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책에 이런 대목이 등장하는데, 관련해서 여러 의문이 든다.
아이에게 선천적 장애를 물려줄지도 모르는 장애인 예비 부모나 농인 예비 부모는 빗발치는 비난에 직면한다. 청각 장애를 가진 레즈비언 커플인 샤론 두셰스노 Sharon Duchesneau와 캔디스 매컬로 Canda ce McCullough가 아이에게 청각 장애를 물려줄 확률을 높이려고 청각 장애를 가진 정자 기증자를 찾았을 때에는 비난이 쏟아졌다.
청각 장애가 있는 레즈비언 커플이 ‘청각 장애’ 유전자를 찾아 나섰기 때문에 더 가혹한 비난을 받은 건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이들이 ‘건강한’ 정자 기증자를 찾았다면, 아무도 이들을 비난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건 ‘청각 장애’를 물려주지 않기 위해 아이를 낳지 않거나, 최소한 초조해하기라도 하는 부부의 모습이다. 따라서 사람들의 비난 속에 장애 차별적 인식과 모성에 대한 기대가 깃들어있는 건 확실하다. 하지만 ‘청각 장애’ 유전자든, ‘건강한’ 유전자든 원하는 유전자를 고를 수 있다는 발상 자체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싶다.
물론 이성애자 커플도 함께 아이를 낳고 싶은 파트너를 찾을 때, 자연스럽게 해당 파트너가 2세에게 끼칠 유전적 영향을 고려한다. 때문에 이성애자 커플에게 보장된 선택지가 레즈비언 커플에게도 보장되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청각장애인으로부터 정자를 기증받는다고 해서 100퍼센트 청각 장애 아이가 태어난다는 보장이 없으므로, 배아의 유전 정보를 분석해서 유전자 쇼핑을 하는 게 아닌 이상, 정자 기증자의 조건 정도는 따질 수 있는 거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이성애자 부부도 서로의 유전적 조건을 따지기 때문에, 레즈비언 부부에게도 같은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신, 태어날 아이에게 특정한 모습을 바라는 인식 자체를 뿌리 뽑는 게 맞지 않나 싶다. 그래야 장애 차별적 인식과 우생학이 더 깊이 뿌리내리는 걸 막을 수 있다.
언급된 커플과 관련된 자료를 더 찾아봐야 할 것 같다.
저자가 사고로 전신마비 장애인이 된 배우, 크리스토퍼 리브에 대해 남긴 평가와 관련해 생각해 볼만한 지점이 많다고 느꼈다. 당연히 장애가 ‘극복’이나 ‘치유’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한다. 또한 그의 ‘장애 극복기’를 담은 다큐멘터리(<크리스토퍼 리브: 움직이는 희망>)가 ‘장애’를 마땅히 정상화되어야 할 비정상의 범주에 넣는 ‘치유 이데올로기’의 확산에 기여하고 있다는 비판에도 공감한다. 더군다나 리브는 전담 치료사를 두고 하루 종일 재활에만 전념할 수 있는 재정적 여유가 있으며, 아내의 헌신적인 돌봄을 받을 수 있는 백인 남성이다. 그런 리브가 ‘장애는 노력으로 극복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질 때, 그와 다른 사회경제적 조건에 놓인 장애인들은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예전처럼 승마를 하고 카메라 앞에서 자유자재로 쓰고 싶다는 욕망 자체가 비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저자처럼 장애를 자신의 고유한 특성으로 받아들이는 이들도 있지만, 지금과는 다른 몸을 바라는 장애 당사자도 있다. 그런 욕망 자체가 부정당할 경우 장애 당사자는 사회에 만연한 비장애 중심주의와 장애를 긍정해야 한다는 압력 사이에서 고립될 수밖에 없다.
저자는 리브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마지막 순간에 당신이 장애를 가진 몸-마음, 커뮤니티, 사회적 정의에 대한 열망에서 희망을 찾았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나는 저자의 이러한 말에 약간의 불편함을 느꼈다. 모든 장애 당사자가 ‘치유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소수자에게 투사의 삶을 바라거나 더 엄격한 ’정치적 올바름‘의 잣대를 들이미는 것 또한 일종의 차별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비장애 중심주의적 사회에서, 사고를 겪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리브의 욕망이 온전히 그의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비난의 화살이 소수자 개인에게 향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비장애 중심주의적 구조에 있다.
치유는 손상된 것을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려 한다. 장애를 개개인의 몸-마음에 주어진 손상이라고 받아들인다 쳐도 어떤 이들에게 이 교리는 곧 뒤엉킨다. 이들에게는 본래적인 비장애 상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감히 내가 혹은 의료산업 복합체가 나의 몸-마음을 회복시키겠는가? 떨리는 손과 어눌한 발음이 없는, 보다 균형도 잘 잡고 근육도 잘 움직이는 나에 대한 비전은 내 몸의 역사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어떻게 생겼어야 했는가에 대한 상상으로부터, 정상적인 것과 자연스러운 것에 대한 규정으로부터 생겨난다.
물론 장애차별과 성차별이 동일시될 수 있다는 건 아니지만, “내가 어떻게 생겼어야 했는가에 대한 상상”에 나를 맞추려고 하고, 그에 맞지 않는 현재 내 모습을 부정하는 건 여성들이 흔히 겪은 일이다. ‘날씬하고 예쁜’ 특정 시기의 내 모습을 진짜 ‘나’로 간주하고, 그 외의 내 모습은 교정되어야 할 대상으로 느끼는 건 비장애중심적인 정상성에 대한 갈망과 다를 게 없다. 비장애중심주의와 여성억압의 공모 관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19세기 중반에 미국의 백인 의사는 도망치는 노예에게 ‘출분증’, 게으른 노예에게 ‘에티오피아 이상감각증’이라는 진단을 내림으로써 흑인 노예에 대한 통제와 학대를 정당화했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의사, 과학자 등 당대의 엘리트들이 ‘에티오피아 이상감각증’이라는 병을 진지하게 믿었다는 사실이 기괴하게 느껴진다. 한편으로 이는 오늘날에도 ‘과학’의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폭력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우리가 완전무결한 과학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믿는 건 오만한 일이다.
얼마 전에 내 몸과 마음에 대해 생각하며 쓴 글의 일부를 공유한다.
“….물론 가장 좋은 건 생산성이 떨어진다고 판단되는 몸과 마음을 가진 사람이 쉽게 고립될 수밖에 없는 사회를 바꾸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을 바꾸려면 일단 살아남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나만의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
나는 지금 그 방법을 터득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힘든 시기는 나의 패턴을 파악하고, 새로운 방법을 시험해 볼 절호의 기회다. 패턴을 아는 것만으로도, 나는 내 몸과 정신에 대한 통제권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다. 그렇게 조금씩 억압의 굴레를 느슨하게 만들다 보면, 내가 세상을 믿고, 세상도 나를 믿어주는 순간이 올 것이다. 시간이 조금 오래 걸리더라도, 조금 돌아서 가더라도 꼭 이 매듭을 풀고 싶다. 그게 나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다.“
이 글을 쓸 때는 별다른 점을 느끼지 못했는데, 《눈부시게 불완전한》을 읽고 이 글을 다시 보니 “내 몸과 마음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하겠다는 대목이 눈에 띈다. 우리는 흔히 이성적으로 몸과 마음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인격성의 핵심 요소로 간주한다. 그리고 이는 몸과 마음을 이성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존재를 차별할 근거가 된다. 그렇게 덜 존엄하고 충분히 ‘인격적’이지 않은 존재가 탄생한다. 저자는 온전한 몸-마음을 지닌 상상 속의 주체에 맞춰 모든 타자를 교정해야 한다고 보는 비장애중심주의적 사고를 ‘치유 이데올로기’라고 부른다. (참고로 여기서 ‘치유’는 heal이 아닌 cure의 번역어다.)
내 글을 다시 읽으며 나 또한 치유 이데올로기에 강하게 얽매여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에게 필요한 건 온전한 몸과 마음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통제되지 않는 몸과 마음을 인정하는 자세다. 체념하겠다는 게 아니다. 내 몸과 마음을 합리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과 정상성에 대한 갈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뜻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건강 신화’가 아니라,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몸과 마음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지혜다.
요즘 계속 비장애중심적으로 구조화된 과학의 본질을 비판하는 동시에, 소수자를 위해 과학적 성과를 활용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 중이다. 그런 맥락에서 오늘은 《눈부시게 불완전한》에 등장하는 다음 문장에 대해 한참을 고민했다.
다면적이고 모순적인 불협화음이기는 해도, 치유가 박멸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만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진단, 치료, 관리, 재활, 예방과 협력하여 작동하는 치유는 꽤나 적응에 능하다. 이 여섯 가지 과정이 모두 우리의 몸-마음을 움직이고, 부추기고, 보살 핀다. 정상과 비정상을 정의하고 또 재정의한다.
《눈부시게 불완전한》은 ‘치유’를 비판하는 책이다. 저자에 의하면, 치유는 손상이 없는, ‘온전하고 정상적인’ 몸의 획득을 의미하며, 자연스럽게 장애의 ‘박멸’로 이어진다. 그래서 사실 처음에는 위 문장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지금까지 저자가 말한 ‘적응’의 주체는 장애 당사자였기에, ‘치유’ 또한 다양한 치료 과정에 ‘적응’하면서 ‘유연성’을 갖게 된다는 표현이 잘 와닿지 않았다.
근데 다시 생각해 보니, 장애 당사자가 손상에 적응하면서 자기 몸이 가진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처럼, 치유도 다양한 몸, 다양한 욕망과 만나는 과정에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위 단락은 그 유연성 또한 결국은 이윤을 축적하기 위한 교묘한 속임수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런 의도가 있다고 하더라도, 진단, 치료, 관리, 재활, 예방 과정에서 치유가 ‘박멸’보다 ‘적응’에 가까워지는 돌발적이고 우연한 순간들을 잘 포착하면, ‘치유’를 소수자의 것으로 재전유할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현실에는 다양한 몸과 다양한 욕망이 존재한다. 장애를 자기 정체성의 핵심 요소로 여기고 자랑스러워하는 당사자도 있지만, 손상을 최소화하고 고통을 완화하고 싶어 하는 당사자도 있다. 이들 모두를 존중하기 위해서는 장애를 교정되어야 할 것으로 간주하는 의료적 접근의 전제를 비판하는 동시에, 지금까지 축적된 의학적 성과를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치유의 본질과 유연성에 대한 저자의 통찰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눈부시게 불완전한》는 정말 좋은 책이다.
저자는 자신의 반치유 정치가 고통을 자기 정체성의 일부로 삼기 힘든 만성 통증 환자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걸 인정하면서 다양한 몸들과 함께 비장애중심주의에 도전할 방법을 찾는데, 그 치열한 과정이 정말 눈부시게 아름답다. 자신의 주장이나 사상을 무결점의 논리로 만들기 위해 누군가를 배제하고 소외시키는 대신,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다양한 경험에 귀 기울이는 태도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저자는 불완전함을 수용하는 자신의 그러한 태도가 ‘불완전’하다고 여겨지는 자신의 몸과 그 몸 위에 내려앉은 경험 덕분에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자신의 삶 자체가 자기 몸에 대해 갖는 애정과 프라이드의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순환인가.
사실 ‘프라이드’ 정치가 여러 한계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한계가 있는 사상과 운동을 모두 쓸모없는 것으로 낙인찍는 사고방식이야말로 극복의 대상이라는 걸 이 책을 통해 배우고 있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자칫 잘못하면 장애를 무언가 특별한 것으로 낭만화하는 전형적인 차별 논리와 닮았다는 오해를 받기 쉽다. 그런 여지를 남기지 않는 동시에, 자기 몸에 대한 사랑을 진정성 있게 고백하고, 타인의 경험도 끌어안는 저자가 정말 대단하게 느껴진다.
《눈부시게 불완전한》에서 저자는 비장애중심주의에 맞서기 위해 “지성에 저항”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성, 즉 생각하고 소통하고 육체의 경험과 외부 정보를 처리하는 능력은 흔히 한 사람의 인격성을 존중해야 할 근거로 여겨진다. 정신을 육체의 우위에 두는 이분법적 사고와 비장애중심주의가 결합된 결과 “지성”이 왕관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사실 예전에 장애 활동지원사로 일할 때, 이용자에게 지적 장애가 없다는 걸 굳이 ‘해명’해야 하는 상황을 자주 겪었다. 겉모습만 보고 이용자와 직접적인 소통이 어려울 것이라 판단한 사람들이 늘 내게 말을 걸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머리를 쓰다듬거나 사탕을 주는 등 이용자를 대놓고 무시하는 무례한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이용자에게는 지적 장애가 없으니 직접 소통하시라는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는데, 어느 날 문득 ‘그럼 지적장애인들은?’이라는 의문이 생겼다. 이 사람에게는 지적 장애가 없다는 해명은 자연스럽게 지적장애인은 ‘덜’ 존중받아도 된다는 논리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일을 계기로 지적장애인이 겪는 이중의 소외를 실감하게 되었다.
뇌병변장애에 대해 긍지를 가지게 되었을 때도 ‘지적 장애’를 갖고 있다는 오해만큼은 피하고자 노력했다는 저자의 고백은 다시 한번 지적 장애인의 위치를 돌아보게끔 만든다. IQ에 근거해 사람을 차별하는 게 잘못되었다는 걸 아는 사람도 지성을 한 사람의 인격성과 가치를 판단하기 위한 지표로 삼는 관념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저자는 장애 인식 개선 캠페인의 일환으로 자폐인의 지적 능력을 알리기 위해 활동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들의 곁에서 장애인 대 장애인으로 묻고 싶다. 우리가 [정말로] 영리하지 않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는 우리의 삶을, 가치를, 인격성을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요?
지성에 저항하는 것은, 존중받기 위해 지적장애와의 단절을 택해야 하는 현실에 맞서는 것이다. 생각하고 소통하고 정보를 처리하는 방법은 다양할 수 있으며, 그 방식과 속도를 차별의 근거로 삼으면 안 된다는 주장은 ‘몸과 마음의 이분법’뿐만 아니라 ‘종차별주의’도 흔들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성은 어쩌면 소수자 정치가 넘어야 할 가장 높은 산일지도 모른다. 지성에 저항하자!
마지막 파트에 정말 중요한 쟁점이 많이 등장한다. 특히 저자가 가슴을 제거하고 호르몬 주사를 맞는 트랜지션을 과정을 거치며 하는 통찰이 매우 인상적이다. 저자는 젠더화되고 섹스화된 몸-마음을 재형성하기 위해 의료 기술에 의존하는 것이 자신의 反치유 정치와 충돌하는 지점에 대해 성찰한다. 그는 정상성을 향한 갈망과 ‘수치심’을 토대로 이뤄지는 치유와 달리, 자신의 트랜지션은 ‘자기애’를 근거로 삼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다가도, 이게 쉽게 단정 지을 수 없는 문제라는 걸 강조한다. 그 복잡한 모순을 끌어안고 사는 것 자체가 反치유 정치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저자가 자기 논리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면서 “나에게는 더 혼란스러운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대목이 인상 깊었다. 그 어떤 논리도 완전하지는 않다는 것은 그 자체로 다양한 몸들의 외침을 들어야 할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특히 모든 걸 너무 쉽게 ”서구 백인“의 문제로 환원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었다. “서구 백인” 문화 외의 구조적 요인이 가려지는 것 같았달까? 하지만 그러한 한계는 자신 또한 “서구 백인”의 일원이라는 반성적 성찰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였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 솔직한 자기 고백과 반성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문제였다.
이 책의 장점을 나열하기 시작하면 글을 맺지 못할 것 같다. 자신의 의문 속으로 돌진하듯 나아가는 비타협적 태도와 솔직한 머뭇거림, 다양한 목소리를 전하기 위해 자아를 투명하게 비우는 모습이 어우러져 ‘마음을 움직이는’ 글이 탄생했다.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정치적 실천이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배웠다. 좋은 정치, 좋은 글에 대한 고민이 생길 때마다 펼쳐볼 수 있는 책을 만나 기쁘다.
하은빈 작가의 번역이 정말 좋았다. 원문 대조를 안 해봐도 좋은 번역이라는 확신이 드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이 그랬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미세한 전류에 감전된 것 같은 경련과 진동을 느꼈는데, 그 감각의 진원지는 다름 아닌 역자분의 마음이었다는 걸 역자 후기를 통해 깨달았다. 일렁이는 마음을 담아주신 역자분께 감사함을 느낀다. 그 일렁임 덕분에 내 마음도 덩달아 춤을 출 수 있었기 때문이다. 훌륭한 저자와 역자로 인해 마음이 움직인다는 게 어떤 건지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