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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칠한 고양이 Aug 04. 2017

차갑고 따뜻한 '가'  

1화 

"가"를 쓸 땐 선을 반듯하게 그어야 한다. 기역자의 아래 끝이 너무 왼쪽으로 치우치면 지나치게 가벼워 안되고 아래로 곧게 뻗어도 멋이 안난다. 적당한 각도를 유지해야 멋이 난다.

10살 난 외손주에게 한글자씩 얻어 배우는 일이 재밌어질즈음 글씨를 예쁘게 쓰는 일에 빠졌다. 소리에도 모양이 있다니 남들 다 아는 사실이 나에게는 왜 기적같은지 제법 즐겁다. 여태 살면서 노래가사 하나 제대로 못 읽는다는게 그닥 창피하다 느끼지 않았는데 글씨를 배우고 보니 왜 진작 안배웠나 싶기도 하다.


"가" 가나다라의 첫글자. 그 양반한테 가라는 소리를 들었을땐 비수 같이 들렸는데 글씨를 쓰고 보니 냉정하게 뿌리치는 소리로는 안보인다. 염려하고 걱정하며 무심히 내뱉는 소리로만 보인다. "가"는 그런가?!


85년 그해는 농사가 잘되었다. 논에 물이 그렁그렁 차올랐고 해도 너무 뜨겁지도 않고 적당해 모를 심으면서도 풍년이 들겠다 싶었다. 만날 나한테 본거 없고 배운 거 없다며 십원 한장 제대로 준적도 없는 위인이라 집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 내가 알턱은 없었으나 몇몇 집들이 우리집 양반한테 적지 않은 돈을 빌리고 있는 걸 알았다. 내가 눈칫밥 몇년이고 이렇게 20년 넘게 다섯자식을 낳고 키웠는데 그 정도 눈치 없을까. 그런데도 그 양반은 날 무슨 바보 천지로 알았다. 밥 걱정안해도 되고 돈 갚을 걱정도 없고 추수가 끝나고 나면 다들 번듯한 옷한벌 해입혀야지 생각했다.


윗동네 배씨가 죽고 산일을 가자며 사람들이 찾아왔을때 내가 말렸다. 워낙 힘이 좋기로 소문나 산일이라면 빠지지 않았고 나도 말린 적 없으나 그땐 사주도 안좋았고 창고도 짓고 있었다. 그럴땐 안움직이는 거다. 그래서 욕먹을 거 뻔히 알면서도 말렸다.


마루에 걸터앉아 양말 안에 바지를 말아넣는 애아빠의 손길이 급하다. 6살난 막내가 마당을 뛰놀다 넘어져 우는데 쳐다도 안본다.

"안가면 안되나?!"

"....."

"아니 맨날 갔응게, 오늘은 좀 안가면 안되나?! 내가 이런 건 귀신같당게. 이렇게 공사하고 막 이럴때는 그런데 안가는겨. 귀신붙어와."

"......."

"아 무슨 내 말은 들리지도 않는 가. 사람이 말하면 듣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됐네됐어."


사람말을 그리 무시하나. 대꾸도 없이 일어나 간다. 부아가 나 궁시렁궁시렁 잔소리를 해대며 대문밖을 함께 나선다.


"아니 내가 무슨 병풍도 아니고 사람이 말을 하면 듣는 척이라도 해야지. 가끔은 여편네 말도 좀 들어주면 안되나. 응? 가지 말라고."


신작로 아래에 한둘 동네 사내가 모여있다. 옆집 민자아빠도 벌써 나와 반갑게 손을 든다. 애 아빠는 벙어리처럼 입만 닫고 있다가 사람들을 보더니 옆에 따라붙은 내가 성가셨는지 겨우 한마디 한다.

 

"가"

"뭐라고?!"

"왜 갑자기 유난이여. 들어가라고."

"안되겄어?!"

"그럼 안되지. 되겄어. 어여 집이나 가.


 그렇게 말리고 싶더라니. 아니나 달라. 그이는 그 날이후 며칠 지나지도 않아 밤에 칫간을 갔다가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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