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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칠한 고양이 Aug 07. 2019

좋기도, 나쁘기도 한 '다'

3화

“다 내 탓이겠지만, 다 내 탓도 아니다.”

겨우겨우 첫 줄을 쓰니 생각보다 쉽게 다음 줄이 써진다. '다'를 쓰다보면 늘 느끼지만, '다'는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다. 자식들에게 손톱만큼도 짐 될 생각 없고, 걱정을 안겨줄 생각도 없지만, 내 글은 어쩌면 자식들에게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겠다. 그래도 다 알았으면 좋겠다. 그래도 내가 애미니까. 

........


글씨를 배워 제일 좋은 건 번듯하게 글씨 써서 남들에게 보이는 일이고, 글씨를 배워 제일 나쁜 건 여기저기 내 돈 뜯어가겠다며 보내온 고지서들을 읽는 일이다. 소일삼아 아파트 단지를 돌아다니며 빈병을 주워 집에 들어오는데 우편함에 또 우편물이 꽂혀있다. 맨 내 돈 뜯어가는 것들뿐이다. 오는 전화는 받지 않으면 그만인데, 우편물은 모른 척 하기엔 신경이 쓰인다. 각종 벌금에, 세금에 제 때 안내면 내야할 돈만 불어난다니 보기 싫어도 본다.

“체납”, “채권추심”, “미래정보통신”…. 뜻 모를 글자들로 가득한 고지서를 보다가 막내한테 전화를 걸어 띄엄띄엄 우편물에 있는 글자를 읽어주곤 전화를 끊었다. 막내는 아마 조곤조곤 설명을 하다가, 곧 바로 화를 냈겠지만, 어차피 귀가 어두워 하는 말이 들리지도 않는다.


보나마나 재경이꺼다. 시내 한 곳에서 골프 연습장을 하는 하나뿐인 내 아들. 물론 하나뿐인 게 다행이다. 아들이라며 내가 오냐오냐 키워서 그렇다고 딸들은 뭐라 하지만 금세 욱하고 대답 한 번 시원하게 않는 꼴이, 애 아빠랑 똑같은 기질을 타고났다. 나는 알 수 없지만 다양한 이유들로 내 이름은 재경이의 사업에 쓰였다. 귀 어두운 엄마인 게 그럴 때는 도움이 되는 모양이다. 자동차세와 전화요금부터 카드요금, 재산세까지 내가 가진 게 뭐 있다고 다 내 이름으로 나왔고 내 집으로 고지서가 날라들었다. 지가 번 돈 지가 알아서 내겠지 하지만 볼 때마다 화가 난다.

재경이는 씀씀이가 헤프다. 맨날 못 보던 옷에, 여자도 자주 바뀐다. 지난번에는 마을 경로당에 과일이며 음료수며 갖다 줬다는 이야길 듣곤 얼마나 화가 났는지 전화해서 욕을 해댔다. 그 노인네들 우리한테 잘하는 거 하나 없는데, 나는 이렇게 살고 있는데, 그 노인네들한테 음식을 왜 갖다 바치나. 하나같이 애 아빠 죽고서는 모른 체하던 인간들이다. 분명 윗동네 박씨랑 몇몇은 애 아빠한테 돈 빌려간걸 내 다 알았지만, 어느 하나 돈 갚은 인간이 없다. 그 양반이 장부하나 남기지 않고 죽어버려서 말도 못 꺼냈다. 그래도 난 안다. 내가 이렇게 멍청하게 살고 있지만, 다 기억한다.


막내한테 전화가 오고, 재경이한테도 전화가 오고, 나는 내 말을 하고, 그네는 그네들 말을 하고 전화를 끊는다. 나이 들어 귀가 더 어두워지고 전화 소리도 못 듣게 되면서 막내는 손주에게 내게 글을 가르치는 일을 시켰다. 손주는 학교가 끝나면 집에 와서 간식을 먹고 내게 글씨를 가르치다 학원을 가고, 나는 식당으로 나선다. 그렇게 한 1년 넘으니 손주는 내 핸드폰으로 게임만 하다 가고, 나도 딱히 그 시간에 글씨를 배울 일은 없어졌다. 가끔 내가 쓰는 쪽지나 편지를 손주에게 보여주면 손주가 틀린 글씨를 고쳐주는 정도다. 내가 쓰는 글씨라고 해봤자 명절 때나 자식들 생일 때 용돈 넣은 봉투에 ‘건강 조심하고 차 조심하고 아이들 잘 키우고 부부간에 싸우지 말라’는 말들이 전부다. 작년에 십년 넘게 일한 식당을 그만두고 나올 때 인사말 대신 편지를 남기고 나왔다. 그때만큼 글씨를 배운 일이 보람되고 좋았던 적이 없다. 


그때부터 시작했다. 틈틈이 글을 남기는 일. 말로 하지 못한 말들을 쓰다보면, 말한 것처럼 속이 좀 시원했다. 내가 말을 못해서 그렇지, 아니면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지 내 안에 말이 없지 않았다. 아들이고 딸이고 간에 이씨네 집안 성질이 워낙 불 같아 가만히 들어주는 성격들이 아니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은 해야 직성이 풀리는데, 남들한텐 소리도 지르고 다 하는데 그래도 내 자식들이라고 그렇게 까진 못하니 나중에라도 알라고 쓰기 시작했다. 남들이야 죽을 때 다 좋게, 좋게 죽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죽을 때 해대지 못한 말들 다 해놓고 죽고 싶다.


그렇게 손주의 큼지막한 노트의 뽀얀 장을 열어, "다 내 탓이지만, 다 내 탓인 것만은 아니다"로 시작하는 첫 글을 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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