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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칠한 고양이 Jan 29. 2021

ep2-2. 아무 것도 갖지 못한 변태들을 위한 기도

# 마땅한 죄의 이름으로 그들을 불러주소서.

(1편에 이어서 계속)



그는 내게 대뜸 말했다.


“어른하고 그렇게 부딪쳤으면 사과를 해야지.”

“네?”


나는 전혀 모르는 눈으로 그를 한참 바라보았다. 그리곤 조금 전 불과 몇 분 전이나 이미 내 기억 속에는 없던 어깨를 부딪친 아저씨를 떠올렸다. 아저씨가 이렇게 생겼었구나. 처음 그의 얼굴을 똑바로 제대로 보았다. 키가 나보다 한 뺨 정도 밖에는 크지 않은 160cm 후반의 마른 사람. 중학교 2학년인 나에게 그는 몇 살로 추정도 되지 않았다. 그냥 아저씨.


나는 모범생이 아니던가. 어디 가서도 꿀리지 않는 공부 잘하고 예의바르고 칭찬을 늘 들어야 하는 모범생 아니던가.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다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내가 그에게 부딪친 건지, 그가 나에게 와서 부딪친 건지, 생각해볼 필요도 없었다. 부딪쳤던 건 사실이고 어른은 내게 사과를 요구한다. 나는 사과한다. 그게 내가 어른들에게 배운 예절이다.


그는 이런 식으로 넘어가서는 안 되겠다고 따라오라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와 나는 정류장 옆에 5층짜리 건물로 들어갔다.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시장통 버스정류장과는 다르게 그 건물은 새로 지어져 병원들로 채워진 최신 건물이었다. 건물 입구 양 쪽으로는 정형외과와 안과가 있어 할머니나 아줌마들 몇이 드나들며 서 있었다. 아마 이상해 보였다면 한번 쯤 내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을 수도 있었겠다. 하지만 나는 삼촌을 따라가는 아이마냥 순수하게 그에게 손목이 잡힌 채내 의사로 걸어갔다. 추호도 거부가 없었다.


나는 왜 손을 뿌리치질 않았을까? 예의가 아니라고 여긴 것 같다. 버스 안에서도 자리를 양보하고 어른이 말하면 끝까지 듣고 잘못한 건 사과하라고 배웠다. 어른이 꾸짖겠다니 난 혼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걸어가면서, 나의 사과법이 잘못 됐구나 반성도 했다.

건물 끝까지 올라가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때를 다시 회상하자니, 건물 옥상이 열린 걸 알고 간 걸까? 아니면 일단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려고 그 곳으로 갔다가 오르다보니 옥상 문까지 열렸던 걸까 궁금하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굳이 나쁜 기억을 끄집어내고 싶지 않았고, 생각조차도 무섭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매우 중요한 의문이다. 그가 알고 올라갔다면 그 곳은 아마도 그에게 늘 제공되던 범죄의 공간일 테니까. 거기에 손 잡혀 끌려올라간 겁 많은 또는 그게 예의라고 믿는 소녀가 나뿐이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아무튼 나는 그의 손에 이끌려 올라갔고, 그는 옥상 문 한 쪽에서 내 손을 잡고 무릎을 맞대 앉았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자 했다. 그와 나는 교주와 신도처럼 두 손을 맞잡고 무릎과 이마를 맞대고 기도를 했다. 그는 진짜 기도를 했다. ‘하나님’과 ‘죄 많은 아이’와 ‘죄를 씻어달라’는 말들이 들렸다. 처음 기도를 하자고 할 때는 ‘이게 무슨 죄라고, 무슨 기도까지.’라며 가볍게 여겼는데, 갑자기 진짜 그가 기도를 시작하자 머리에서 경고등이 울렸다.



‘일어나자! 도망가자!’

그가 죈 손이 너무 꽉 조여 왔고, 그 손의 땀이 내 손에 배어왔고, 그가 기도문과 함께 내뱉는 죄 많은 숨결이 내 얼굴에 닿는 순간, 갑자기 너무 무서웠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 들은 바 없었고, 배운 바 없었는데, 갑자기 엄마가 어려서부터 이야기해온 “낯선 아저씨를 절대 따라가지 말라”는 말과, ‘인신매매’ 등의 단어가 떠올랐다.


‘내가 어느 날 낯선 아저씨를 만나서 인신매매를 당한다면 날 어느 공장에 팔아먹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그가 이렇게 불쾌하게 얼굴을 맞대고 기도할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그가 이렇게 날 만질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하면서 머뭇거리는 동안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그의 기도는 끝나고 있었다.


그는 나의 이상한 두려움과 공포, 예감을 한 번에 충족시켜주고자 했나보다. 기도가 끝나고 그는 손을 풀며 자신을 안으라고 당당하게 요구했다. 울며 떠는 아이가 무서워서 도망도 못 갈 거라는 그의 확신이 내게 풍겨왔다. 하긴 너무 당당해서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 같기도 했다. 그 명을 거역하면 더 무서운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그때 날 살린 건, 막연한 무서움이었다. 여기에 있다가는 다시는 엄마를 못 볼 것 같은 두려움. 악 소리 한번 지르지 않고 나는 그를 밀치고 뛰었다.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누구에게 도움도 청하지 않았다. 버스정류장으로 가지 않고 건물 뒤편으로 돌아서 걸어서 갈 수 있던 둘째언니 집으로 뛰어갔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도 더 이상 못 뛸 것 같은 기분이 들어도 멈추지 않았다. 뒤 한번 돌아보지 않았고 그렇게 언니네 집 문 앞에 다다를 때까지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내가 낸 작은 소리가 그의 귀에 닿을까 두렵고, 내가 돌아보는 눈길이 그의 눈에 꽂힐까 무서웠다.


그건 그냥 아무 일도 아닐 수도 있었다. 그는 진짜 기도하고 한번 안아준 후 널 용서하노라 하고 끝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일 정도는 괜찮다는 게 아니다.) 그는 진짜 내가 길거리에서 만났던 바바리맨 같이 내가 조롱할 수 있는 변태새끼가 아니라는 직감이 기도소리 가운데 죽음을 앞둔 공포처럼 다가왔다. 그런 직감은 살면서 몇 번 갖지 못하는 감정이다. 그 감정은 진짜다. 끝이 어땠을지라도 그 순간에는 내게 진짜였다.


숨을 진정하고 나의 매무새를 한 번 더 살핀 후 언니 집으로 들어갔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행동했고, 그렇게 오랜 시간을 지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은, 피해자에게 돌아올 수많은 힐난들이었다. ‘어른의 어깨를 치고는 겨우 그따위로 사과하다니’부터 시작해서, ‘그렇게 바보같이 따라나서다니’하는 바보스러움을 꾸짖는 것을 넘어, ‘대체 행실을 어떻게 하고 다녔길래.’ 까지 내가 들을 수많은 비난들을 먼저 떠올렸다.

태생적으로 나는 왜 그런 비난들을 먼저 떠올렸을까? 순수한 피해자라고 나 스스로 생각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마신 사회의 공기는 그런 것이었다.



그 버스 안의 치한도 끝은 아니었다. 

대학 때도 그 똑같은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에 버스에서 같이 내린 젊은 남자가 나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날 따라와 걸었다. 같은 길을 간다고, 무서워하는 게 너무 호들갑 같아서 “너 그렇게 안 예뻐!”라며 스스로 생각하며 웃고 돌아서는데 아파트 입구까지 따라 걷는 그를 보자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 그를 피해 엘리베이터를 안타고 복도식 건물의 바깥 계단으로 걸었는데, 그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4층까지 나와 같이 걸어 올라왔다. 집을 앞에 두고 문을 열면 그가 문을 잡을 것 같아서,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안쪽 계단을 달려 뛰어가 슈퍼로 들어간 후 뒷문으로 도망쳐 나온 일도 있었다. 뒷문으로 나오며 숨어본 그는 슈퍼문 앞에 서있었다.

그 모든 상황이 우연이랄 수도 있고, 나의 호들갑이랄 수도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어느 날 내 인생이 잘못 되었다는 느낌이 불현듯 갑자기, 그러나 너무 확고하게 들 듯 잘못됐다는 직감, 두렵다는 직감은 틀림없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이젠 진짜 어른이 됐다고 생각이 될 때, 그래서 더 이상 외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나이가 되었을 때 처음으로 그런 이야기들을 술의 힘을 빌어 입 밖으로 꺼냈다. 각자 생일에 받은 선물이야기를 하듯,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그런 사연들이 테이블에 가득히 쌓여져갔다. 세상에 변태새끼는 차고 넘쳐서, 나와 같은 일들을 겪지 않은 여자들을 찾기 어려웠다.

20대 후반에는 영등포역 지하에서 지상으로 가는 에스컬레이터에서 위에 선 여자의 치마 속을 핸드폰으로 찍고 있는 젊은 변태도 만났고, 심심찮게 여자화장실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했다는 어떤 변태에 대한 뉴스들도 자주 본다.


몇 년 전 여름밤에는 강남역 주변의 어느 바에서 술을 마시다가 화장실에 가려는데 화장실이 바 안에 있는 게 아니라 문을 열고 나가면 복도 끝에 위치해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화장실을 가야하나 말아야하나 심각하게 망설였다. 그 해는 내가 술을 마시던 강남역 주변의 한 건물 화장실에서, 20대 여성이 일면식도 없는 남성에게 묻지마 살해를 당한 2016년이었고, 그 일이 있은 지 석 달도 되지 않은 때였다. 몇 년이 지난 지금은 달라졌을까? 아니다, 여전히 건물의 공공화장실을 갈 때, 밤 늦은 시간 버스에서 내려 길을 걸을 때 불쑥 두렵다.

나는 그렇게 살았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이 땅에 또 다른 여자아이가 태어난다.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애정에 헐벗고 관심에 굶주린 평생 진정한 유대와 사랑은 모르고 살아갈,

굶주린 그를 위해 나의 신께 기도를 드립니다.


낮은 곳을 한 번 더 굽어보듯,

가지지 못한 그를 한 번 더 굽어보소서.


그는 바바리 아래 숨겨진 맨다리의 숭숭 달린 털을 볼 눈을 갖지 못하고,

스스로 업신여기는 어린 여자들의 조롱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는 귀를 갖지 못했으며,

행동의 옳고 그름을 구별할 판별력과, 부끄러움을 알아채는 염치와, 두려움과 조롱을 구분할  있는 머리를 갖고 태어나지 못했나이다.


그는 평생 자신의 잘못을 깨우칠 기회를 갖지 못할 것이며,

그는 평생 진정한 사과를 할 기회를 갖지 못할 것이고,

그는 평생 마음이라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오니,

어찌 가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죄 덩어리로 똘똘 뭉친 그 몸에서 태어나,

더 많은 죄를 짓고 늙어갈 그 몸에서 죽어갈 것이오니,

그를 불쌍히 여기소서.  


태어나 한 번도 탈출하지 못하는,

탈출을 스스로 생각도 하지 못하는

몸의 감옥, 죄의 감옥에 갇힌 그를 위해 오늘도 기도합니다.


용서할 줄 아는 신의 너그러움으로

그가 오직 부끄러움에 눈뜨게 하소서.

그가 오직 스스로 죄 많음에 눈뜨게 하소서.

그 밝은 눈으로 자신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처음으로 눈을 뜬 날부터 마지막으로 눈을 감는 날까지의 자신의 여정을  

하나하나 곱씹게 하소서.


그렇게 온전하게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그에게 주소서.  


마지막으로

섬기는 신의 다름에 상관없이

우리 모두에게 비옵니다.


부디,

나비가 부끄럽지 않게,

변태라는 단어를 그에게 부여하지 마시옵고,

변태라는 단어 뒤에 그가 숨지 않게 하소서.


오늘도 수많은 나비들이

같은 변태라는 단어에

울고 또 우나니...

날기를 포기한 나비들이 하늘을 다시 날 수 있도록.


정정당당하게

그들이 가져야할 마땅한 죄의 이름으로 그들을 불러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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